소설리스트

무련전봉-790화 (789/853)

제 790장. 신비한 노인

하루를 바삐 움직이자, 성지의 사소한 일들은 마무리가 되었다. 드디어 밤이 되고,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이 성지를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구천성지의 호법과 장로들은 한자리에 모여 보름 뒤의 재난을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보름 뒤에 전임 성녀 또는 현임 선녀를 내놓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선포한 상태였다. 줄곧 구천성지의 보호를 받으며 억압받던 세 곳의 세력이 이처럼 건방지게 나오는 것을 보면, 이길 확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태도가 그처럼 단호할 리 없었다.

전임 성녀 남성고는 종적을 찾을 수 없기에 내놓을 수 없었고, 현임 성녀는 성지에서 내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보름 뒤의 전투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장로와 호법들은 무슨 속내인지, 안령아에게 양준을 부르게 했다.

그들이 의논할 때, 양준은 옆에 앉아서 듣기만 할 뿐 줄곧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밝힐 생각도, 그들의 의견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었다.

장로, 호법들은 줄곧 그가 성주의 자리를 계승하기를 바랐다. 그렇다 해도 지금과 같은 위기의 순간, 그에게는 결정권이 없을 게 뻔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양준은 아직 너무나 젊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듣고 나서, 양준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성지의 사람들은 누구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다들 남아서 혈전을 치르더라도 성지의 위엄을 지키려 했다. 그는 저도 몰래 고개를 저으며 이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실력을 남겨 두었다가 재기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큰 세력이 모두 도망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장로와 호법들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지만 제자들은 모두 희생될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문파의 부추김에 모여든 고수들을 설득해 물러가게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세 문파는 성지의 지금 전투력으로도 쉽게 대처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의논했으나 결론이 나지 않자, 사람들은 모두 한쪽에 앉아 있는 양준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왜 저를 보세요? 전 항상 혼자 다녀서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계속 이야기하세요. 전 그냥 듣기만 할게요.”

“흠흠… 그렇지만 자네도 나름의 생각이 있을 게 아닌가? 말해 보게나. 혹시나 그중에서 길을 찾아낼 수도 있으니까.”

서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이들도 기대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다들 그의 의견을 구하는 듯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한마디 물어보았다.

“말썽을 피우는 세 문파에는 입성 경지 고수가 몇 명이나 됩니까?”

서휘는 표정을 가다듬고 얼른 대답했다.

“그 세력들은 사실 그리 강하지 않다네. 세력마다 입성 경지는 두 명뿐이고, 또한 대부분 1단계일세. 유일하게 주목해야 할 사람은 파현부의 장오(張傲)로, 나와 같은 2단계이네. 정말 싸우게 되면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 걸세.”

세력마다 두 명이면 모두 여섯 명의 입성 경지 고수가 있을 테고, 그중 다섯 명은 1단계, 한 명은 2단계인 상황에서 인원수와 경지로 따져 보면 마침 지금 구천성지의 실력과 맞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들의 부채질에 몰려온 고수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고수들이 적지 않을 터였다. 남성고에게 맹공격을 당해 이미 만신창이가 된 구천성지가 이들을 대적하기에는 힘들었다. 게다가 정말 그들과 싸우게 되면 앞으로 구천성지는 아마 더는 대륙에서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 몰려온 세력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구천성지는 그들 모두와 척을 짓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성고가 한 짓이 있기에, 그 죗값은 구천성지가 치러야 했다.

“구원을 요청하면 어떨까요? 구천성지가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데 동맹이 있을 거 아닙니까? 동맹에 도움을 청하고, 나중에 은혜를 갚으면 될 거 같습니다.”

양준이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양준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서 금세 알아차렸다. 구천성지는 동맹이 없는 듯했다. 전임 성주가 있을 때, 그들은 콧대가 하늘을 찔러 웬만한 세력과는 상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런 재난이 닥쳐도 도움을 주려는 데가 없었다.

양준은 이마를 문지르며 할 말을 잃었다.

양준은 천소종의 호법 네 명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그가 천소종에 도착하기도 전에 구천성지는 진작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문득 양준은 눈을 반짝 빛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요족 대존… 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습니까?”

“요족 대존?”

서휘의 낯빛이 바뀌었다

“네. 한 지역의 대존인 만큼 실력이 강할 거 아닙니까? 휘하에 인재도 있을 테고.”

“그게 무슨 소린가? 그쪽은 요족이란 말일세. 그들은 우리 인간을 눈엣가시로 여기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 소식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구천성지는 인간 전체의 수치가 될 것이고 더는 재기할 기회도 없을 거네.”

사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맞네.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도 요족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지. 게다가 우린 요족 대존을 만난 적도 없다네. 전임 성주와 친분이 있다고는 하나, 정말 도와주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옥영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곤의 말에 동의했다.

양준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그의 제안을 이처럼 싫어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종족 사이의 갈등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준은 통현대륙 태생이 아니고, 중도 쪽에서 넘어온 사람이었다. 이곳에 온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이 세계의 뿌리 깊은 관념은 아직 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통현대륙에 오기 전까지, 그는 이 세상에 마족과 요족 같은 다른 종족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었다.

“한 사람이 있긴 하네. 그 사람을 찾으면 성지의 위험을 쉽게 해소할 수 있을 것 같긴 하구먼.”

서휘가 깊은 생각에 잠기며 가볍게 중얼거렸다.

“대장로는 지금 그 사람을 말하는 건가?”

정월동도 누군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맞네.”

“그게 누군가요?”

양준은 금세 호기심이 동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무슨 대단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신비한 노인인데 이름은 나도 모르네. 전임 성주와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듯했네. 전임 성주께서 세상을 뜨기 반년 전에 갑자기 찾아왔고,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지. 전임 성주께서는 그 노인을 무척이나 예우했네. 서로 간 친분이 두터워 보였는데, 그 노인을 찾아 도움을 청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맞네. 노인네가 뭔가 있는 듯했어. 전임 성주께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예의를 차리는 건 처음 봤었네.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하네.”

옥영이 말을 이었다.

“신비하다고요? 그분을 찾을 수는 없습니까?”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 노인은 분명 다시 우리 성지를 찾아올 걸세.”

서휘가 갑자기 확신하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노인이 성지에 왔을 때, 함께 온 여자아이가 어느 한 곳에 무엇인가 설치했었네. 두 사람이 떠난 뒤, 전임 성주께서는 누구든 그곳에 접근해 훼손하지 못하도록 잘 지켜보라고 분부하셨었네. 내 짐작으로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 노인과 여자아이가 이곳에 돌아와 무언가를 찾아갈 것 같구먼.”

“오, 맞군. 여자아이가 무언가를 설치하고 나서부터 그 근처가 모두 그늘지고 서늘해졌다네. 그것 때문에 나도 할 수 없이 거처를 옮겼지. 오랫동안 서늘한 곳에 있으려니 나도 버티지 못하겠더군.”

맹천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의 대화에서 양준은 곧 그곳이 어딘지를 알 수 있었다.

대낮에 서휘와 함께 진법과 결계를 재가동할 때, 여느 곳과 달리 특별히 서늘한 곳이 있었다. 그곳의 서늘함은 보통의 차가움과 달리,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양준은 구천성지 내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내막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노인’과 ‘여자아이’를 말할 때, 그의 머릿속에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두 인물이 떠올랐다. 그는 실소하며 이런 우연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뒤, 양준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지금 얘기하는 노인네가 혹시 얼핏 보면 비범한 풍격을 지녔으나 사실은 음험한 눈빛을 한 노인 아닙니까?”

서휘는 순간 흠칫 놀랐다. 이때, 옥영과 정월동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중 옥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

“맞네. 노인네 눈빛이 영 싫었어. 늘 이상한 데를 바라봤지.”

정월동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 나이를 먹고도 정말 나잇값을 못 했다네. 나와 옥영은 예의를 엄청 차렸구먼. 그냥 확 눈알을 빼버리고 싶을 정도였지.”

두 아름다운 부인은 마치 그 노인이 자신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처럼 매우 화가 난 모습이었다.

서휘는 그만 실소했다.

“그 정도는 아니잖는가? 혹여 실력이 강해 눈동자에 정기가 넘칠 수도 있지.”

옥영과 정월동이 동시에 그를 쏘아보았다.

“미안, 못 들은 거로 하게나.”

서휘가 멋쩍게 말했다.

양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심장 박동마저 빨라지며, 말 못할 기대감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노인네 곁에 있던 여자아이는 면사포를 쓰고,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모습이 아니던가요?”

사람들은 놀란 시선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서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성주… 흠흠, 자네, 그걸 어떻게 아나?”

“정말이군요? 여자아이의 이마에 담청색의 보석 장식이 있었죠?”

양준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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