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1장. 성지를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까?
양준의 질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옥영이 말했다.
“노인네는 밉상이었지만, 곁에 있던 여자아이는 천진하고 귀여웠네.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성녀들 못지않을 거라 믿어. 게다가… 경지가 무척 높았다네. 자네와 비슷할 걸세. 자네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여자아이가 우리가 본 가장 출중한 젊은이였으니까.”
“2~3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은 아마 저보다 경지가 더 높을걸요.”
양준은 확신에 차 말하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분명 그들은 몽무애와 하응상이었다.
이 세상에서 구천성지의 성주가 예를 갖춰 대할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몽무애가 아마 그중 한 명일 터였다. 그리고 곁에 공교롭게도 하응상과 기질이 비슷한 여자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 두 사람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구천성지에 왔었다니,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자네, 혹시 그 두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양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서 추억에 잠긴 듯했다. 그들은 곧 양준이 두 사람과 인연이 있을 거라 짐작했다.
“네, 아는 사람입니다.”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서휘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무언가 물어보려 했다. 양준이 이를 보고 얼른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몇 년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군…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지금 상황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자네가 영혼 반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나마 다행일세. 반지가 있으니 그들이 맹공격을 하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거네.”
“맞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 적을 대처할 방법을 강구했다.
*
양준은 기회를 찾아 몰래 빠져나왔다. 그리고 낮의 기억을 더듬어 왼쪽에 있는 한 산으로 날아갔다.
이 산은 다른 산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백 길 정도 되었고 하늘 높이 우뚝 솟아서 기세가 드높았다. 그러나 산중턱 쪽부터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고, 올라갈수록 이런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산봉우리에 도착할 때쯤 되자 길이가 서로 다른 얼음 기둥이 암석에 가득 달려 있었다.
양준은 낮에 진법을 열 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연유를 묻지는 않았다. 지금 그는 하응상이 그곳에 무엇을 설치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양준은 얼마 안 되어 산봉우리에 이르렀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움에 머릿속까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양준은 자세히 감지해 보고 낯빛이 변했다. 신식의 불꽃이 있어도, 전력을 다해 싸늘한 한기를 막아야만 했다. 몸속 진원만 돌려서는 전혀 한기를 물리칠 수 없었다.
‘이상하네!’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실력이 강한 만큼 서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 없이 맑은 깊은 못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한기는 못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못 주변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구천성지의 사람들도 이곳에는 거의 오지 않는 듯했다.
못 주변에는 은은한 원기 파동이 흐르고 있었는데, 신비하고 기묘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양준은 신식을 펼쳐 자세히 감지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응상이 설치한 것이 확실했다. 기운 속에는 영진의 흔적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하응상에게 가르쳐준 것들이었다.
‘왜 여기다 이런 것들을 설치한 거지?’
서휘의 말을 들어 보면 그때 당시, 하응상과 몽무애는 구천성지에서 딱히 무언가를 가져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무언가를 찾으러 여기로 돌아올 예정인 듯했다.
‘차가운 못에는 무슨 비밀이 있을까? 몽 주인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과 연관된 건가?’
양준은 여러모로 짐작해 보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초능소는 몽무애가 마존과 전투를 벌이다가 마존의 천현결(天玄訣)에 봉인되어 경지가 신유 경지 정상으로 억제되었다고 말해 주었었다. 몽무애가 중도 쪽으로 간 것도 피난을 갔던 것이거나 또는 약령성체를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중도 지하에서 그는 첫 번째 봉인을 해제하고 초범 경지 2단계 수준을 회복했었다. 그 뒤, 지난 몇 년 동안 몽무애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양준은 몽무애의 실제 경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몽무애는 초능소, 빙종의 종주 청아, 그리고 구천성지의 전임 성주를 알고 지냈다. 세 사람은 모두 최절정 고수였고, 이런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몽무애의 경지도 그들 못지않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몽무애는 다니는 곳마다 신비로운 인상을 남겼다.
“영월담(映月潭)에는 웬일이야?”
이때,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상대가 접근하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진원이 꿈틀거렸지만 곧 진정되었다. 양준은 뒤따라온 안령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보러 왔어. 여기가 영월담이야?”
“그래. 오늘은 달이 없네. 달이 뜨는 밤이면 이곳은 나름 운치가 있는 곳이야. 영월담에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달의 그림자를 못 상공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데, 실물과 똑같아. 전에는 다른 성녀들과 이곳에 자주 놀러 왔었어…….”
안령아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곧이어 남성고에게 죽임을 당한 다른 세 명의 성녀를 떠올렸는지 그녀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그렇게 신비해? 이곳에 숨겨진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없어?”
양준은 그녀가 슬픔에 빠지지 않게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안령아는 고개를 저었다.
“장로님들은 감히 내려가지 못해. 영월담이 얼마나 깊은지 아무도 몰라. 전임 성주께서 한번 탐지해 본 적이 있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어. 그분은 그 뒤로 이곳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어. 때문에 안에 도대체 뭐가 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게다가 이전에는 이 산봉우리가 이렇게 서늘하지 않았거든. 오직 못에 깊이 들어가야만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싸늘하게 변했네. 아마 그 여자아이가 설치한 것과 연관이 있나 봐.”
말하는 짧은 시간에도 안령아는 참지 못하고 흠칫 떨더니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
“돌아가자. 너무 추워.”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와 함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밤새 생각하고서 결정을 내렸다.
*
이튿날, 양준은 서휘를 찾아가 뜻을 밝혔다.
“요족 대존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서휘는 그 말에 흠칫 놀라며 물었다.
“왜 만나려고 하나? 도움을 청하려는 건가?”
양준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전임 성주와 친분이 있지만 저와는 모르는 사이입니다. 제가 도움을 청한다고 해도 아마 거절할 겁니다.”
“그럼 왜……?”
서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혹시 잠시 동안 성지를 포기할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까?”
“포기라고?”
서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맞습니다. 잠시 동안만요. 사람들이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재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상대방의 전투력을 볼 때, 성지는 막아낼 수 없습니다. 정말 끝까지 버티면 구천성지가 당신들 세대에서 무너질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호법이나 장로들은 도망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제자들은요?”
양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서휘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알고 있다네. 다만 6~7천 명 되는 제자들을 어디로 데리고 간단 말인가? 그 세 곳의 세력들이 우리 성지와 척을 지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쉽게 그만두지 않을 것이네. 아마 우리가 성지를 떠나는 순간, 쫓아와서 죽이려 할 걸세. 그럴 바에는 계속 여기에 남아 죽기 살기로 끝까지 싸우는 게 낫지 않은가?”
“그러니까, 잠시 성지를 포기할 생각도 있다는 얘기시죠?”
양준은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서휘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조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성지의 혈맥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한 일 아닌가? 다시 힘을 모아 재기한 다음, 성지를 괴롭혔던 자들을 처벌하면 되지.”
말하는 동안, 서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독기를 내뿜었다.
“좋습니다. 생각해본 적이 있다니, 더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군요. 성지 제자들이 안전하게 머물 만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으면 누구도 당신들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양준이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인가? 그럼 그곳은…….”
서휘는 눈을 반짝 빛내며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물론 당신들이 저를 믿는다면요!”
양준은 살짝 뜸을 들이고서 성급하게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믿지, 당연히 믿지. 그런데 그게 자네가 요족 대존을 만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서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었다.
“이 두 가지 일은 크게 연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잠시 동안 성지를 포기할 생각이 있다면, 제가 요족 대존을 만나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지를 공짜로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죠……. 요족 대존이 만약 성지에 사람 하나 없이 텅텅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찌할 거 같습니까?”
양준이 사악하게 웃었다.
서휘는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요족 영토는 천지간의 영기가 짙지 않아, 우리 성지를 호시탐탐 노린 지 오래되었네. 만약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곧바로 이곳에 침입해 성지의 산들을 차지하고…….”
서휘는 말하다 보니, 곧 양준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얼굴을 실룩였다. 새 성주가 이처럼 음험하고 간사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양준이 간사하게 웃으며 저승사자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어머니께서는 은혜는 열 배로 갚고, 원수는 백 배로 돌려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휘는 왠지 모르게 뼛속까지 한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감탄했다.
“어머님이 참 여장부시군…….”
“됐습니다. 이 일은 대장로 혼자서 결정할 수 없을 테니 어서 가서 다른 장로, 호법들과 의논해 보십시오. 만약 다들 동의하면 다시 저한테 말씀해 주십시오.”
서휘는 눈을 반짝이더니 공수했다.
“이 일은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만약 자네가 성주의 자리를 잇겠다고 하면…….”
“어서 꺼져 주십시오.”
서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준은 인정사정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서휘는 입가를 실룩이다가 의기소침해서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