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4장. 대존께 저를 소개해 주세요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심이었다. 상대에게서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을 때, 경계심을 풀고 다가가 먼저 그와 소통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초조해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괜히 요수들의 본능을 자극해 사단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밀림의 구석진 곳,
양준은 조용히 제자리에 서서 온몸의 기운을 거두어들이고 주변의 환경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의념을 방출해 자신의 호의를 전했다. 근처에 있던 요수들은 너도나도 은밀한 위치에 숨은 채 살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양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도 양준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근처에서 스르륵, 스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호랑이같이 생기고 온몸이 알록달록하며 거대한 체구를 가진 요수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스르륵- 스르륵-
요수들은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더니 사방팔방에서 물 샐 틈 없이 양준을 감쌌다.
양준은 한 바퀴 둘러보고서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요수들은 모두 모양새가 달랐지만 하나같이 늠름하고 잘생겼으며 위풍당당해 보였다. 양준과 십몇 장을 사이에 두고 요수들이 멈춰 섰다. 요수들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는데, 동시에 의념을 내보내 그와 소통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요수들은 지능이 발달하지 못해,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양준은 미소를 띤 채, 의념을 보내며 말했다.
“안녕,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찾아온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그냥 여기 대존을 만나러 왔어. 괜찮다면 나한테 대존께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의념을 보내고 얼마 안 되어 호랑이같이 생긴 요수가 포효했다. 그에게 왜 대존을 만나려는지 질문하는 것 같았다.
“대존과 의논할 일이 있어 그래.”
양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요수들은 모두 침묵에 잠겼다. 서로를 마주 보면서 머뭇거리는 것을 보니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듯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호랑이 같이 생긴 요수가 다시 하늘을 향해 길게 포효했다.
귀청을 찢을 것만 같은 소리에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짜증 내지 않고 조용히 제자리에서 기다렸다.
요족 대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에, 지금은 지능이 낮은 요수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란 포효가 전해지자, 밀림 깊은 곳에서 이에 대한 화답처럼 포효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바통을 이어 가듯이 포효가 점점 더 멀리 퍼져 갔다.
양준은 그제야 무언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아예 가부좌를 틀고 땅바닥에 앉은 뒤, 품 속에서 단약 몇 병을 꺼내 요수들에게 던져 주었다. 단약들은 모두 그가 제련한 것으로, 몸속 진원의 유동을 촉진시켜 수련하는 데 보조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요수들은 약병 주변으로 몰려들더니 고개를 숙이고 냄새를 맡았다.
요수는 태생적으로 위험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었다. 단약들은 등급이 높지 않았지만 모두 영기가 흘러넘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요수들의 흥미를 끌었다.
얼마 안 되어 요수들은 단약을 모두 복용하고 나서 다시 기대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짓고는 어쩔 수 없이 단약 몇 병을 더 꺼냈다.
반 시진이 지나, 좌선하고 있던 양준은 낯빛이 차가워지더니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거친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이는 경지가 낮지 않았는데 적어도 초범 경지 3단계 수준인 듯했다. 요수로 치면 7급 정상이었다.
쿠웅-
우람한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양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착지했다. 먼지가 휘날리면서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 기운에 거목들이 마구 흔들렸다. 원래 양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요수들도 두려움을 느끼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양준은 실눈을 뜨고서 앞쪽을 바라보았다.
체구가 장대한 40세 정도의 중년 남성이 앞에 서서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몸에는 가죽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산발머리와 온몸의 덥수룩한 검은 털이 거센 바람에 휘날리자 마치 수사자같이 몹시 늠름한 모습이었다. 요족이 틀림없었다.
양준은 곧바로 사내의 신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방금 전 바통을 이어 가는 듯한 포효는 요수들이 이 사내에게 소식을 전한 것일 터였다. 소식을 접한 요족 고수가 곧바로 달려왔던 것이다.
사내의 눈동자에는 악의와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원래 양준을 호의적으로 보던 요수들도 사내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양준은 씩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 감히 수해밀림에 쳐들어오다니, 간땡이가 부었구나.”
요족 사내는 나타나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그의 온몸의 원기가 용솟음치면서 당장이라도 양준을 죽일 태세였다.
“용건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제 말 좀 들어 보시죠.”
양준은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비열한 인간, 우리 요족은 인간과 친구로 지낼 수 없다.”
우람한 요족 사내는 커다란 손을 휘저으며 멸시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양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상대가 인간을 너무 싫어하자 그는 무기력감을 느꼈다.
“그럼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양준이 공수하며 물었다.
“대존께서 광사(狂獅)라고 이름 지어 주셨지. 잘 기억해 두거라.”
광사는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존이 이름을 하사해 준 것이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인 듯했다.
“기억했습니다.”
양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요족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방금 전, 쟤네들이 왜 너한테 살갑게 군 거지?”
광사는 위풍당당하게 한 바퀴 둘러보고는 위협적으로 물었다.
“별일 없었습니다. 단지 단약을 조금 주었을 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수련용 단약이어서 좋은 점만 있을 뿐, 나쁜 점은 없을 겁니다.”
“단약이라고?”
순간 광사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단약에 무척이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양준은 웃으며 물었다.
“제게 더 있습니다. 필요합니까? 처음 만났는데 따로 준비한 게 없어서 이것이라도 받아 주십시오.”
그러고는 단약 몇 명을 꺼내 광사에게 건넸다.
광사는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으나 여전히 갈등했다. 그러나 단약의 향기를 맡는 순간, 욕망이 이성을 무너뜨렸다. 광사는 양준의 손에서 단약 몇 병을 확 낚아채고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비열한 자식, 이런 것들로 내 호감을 얻을 생각하지 마……. 지금은 조금 마음에 들지만 말이야.”
양준은 실소하고 말았다.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요족들이 모두 광사 같으면 어울리기 쉬울 것 같았다.
광사는 단약 몇 병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자신의 호주머니에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그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양준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듣자 하니 대존을 만나려 한다면서?”
광사는 묻지 않고도 양준이 찾아온 의도를 알아맞혔다. 양준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방금 전 요수들의 포효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던 듯했다.
“맞습니다. 혹 대존께 저를 소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광사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 수해밀림을 뭘로 본 거야? 그리고 우리 대존은 또 어떻게 생각한 거고? 네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거든? 네가 그나마 주제 파악을 하는 것 같아 죽이지는 않겠다. 그냥 돌아가. 만약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계속해 이곳에 남아 있으면, 널 기다리는 건 오직 죽음뿐이야.”
양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인내하며 말했다.
“대존을 만나서 중요한 일을 논의하려고 합니다. 편의를 봐 주면 안 되겠습니까?”
“괜히 날 건드리지 마. 인간들은 항상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 한다니까. 날 화나게 하면 끝이 안 좋거든. 수해밀림에서는 인간이 들어오는 걸 허락한 적이 없어. 이 정도면 이미 사정을 많이 봐준 거야.”
광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에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죠. 저는 전에 누군가 수해밀림에 자주 찾아와서 대존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전해 들었는데요?”
그러자 광사의 낯빛이 변하더니 큰 소리로 호통 쳤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들었어? 어… 너 그 반지 눈에 익은데?”
“그분이 여기 오실 때마다 끼었던 반지니까요.”
양준은 반지 낀 손을 그에게 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구천성지의 전임 성주께서 유명을 달리한 일은 들어서 아실 겁니다. 어찌 말하면 저는 그분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임 성주와 대존께서 친구 사이인지라 대존께 부탁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네가 후계자라고? 전임 성주는 실력이 강했어. 대존과 싸워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거든. 그런데 어째 후계자는 너무 약해 보이네.”
광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양준을 보더니 연신 혀를 찼다. 그는 양준을 얕잡아보고 마치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그를 이길 수 있다는 것처럼 굴었다.
양준은 그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전임 성주께서 그동안 적지 않은 정석과 단약들을 가져왔었는데, 지난 2년 동안 더는 그런 것들을 보지 못했던 거 아닙니까? 제가 전임 성주의 뒤를 이으면 앞으로 당신들에게 원하는 물건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를테면 뭐?”
광사는 저도 모르게 양준의 말에 빠져들었다.
“이를테면 방금 전에 당신에게 드린 단약들 말입니다.”
양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이제 내 거야.”
광사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움켜쥐며 경계 어린 시선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물론 당신 겁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해 원한다면 반드시 저를 데리고 가서 대존을 만나야 합니다. 저와 대존께서 합의를 이룬다면 당신들은 이런 물건들을 끊임없이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까?”
광사는 하늘을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구겼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네 말이 아리송하면서도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너 날 속이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는 다시 눈을 부릅뜨고 양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양준은 찔리는 데가 없었기에 태연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