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8장. 화생지
요족은 연단, 연기에 능통하지 못했지만, 수해밀림에는 재료가 풍부했다. 요족들은 영초, 영약을 직접 씹어 먹거나 희귀한 광물이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재료들을 잘 이용하면 그들의 실력은 훨씬 더 높아질 수 있었다.
대존은 단호한 태도로 인간 사이의 충돌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양준은 그의 말에서 또 다른 뜻을 읽을 수 있었다. 대존은 요족들을 성지에 끌고 가서 그곳의 짙은 영기로 수련하고 싶어 했다. 다만 양준이 내건 조건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에 부족했을 뿐이었다. 결국 대존도 충분한 이익만 있다면 원칙 같은 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양준은 성지의 연단사와 연기사를 모두 남겨 두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과연, 대존은 마음이 많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망설였다.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성지에는 정석 광맥이 있죠. 저희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음껏 채굴하고 사용하셔도 됩니다.”
대존은 금세 눈썹을 치켜세우며 재미있다는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네 제안은 모두 우리 요족의 이익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무슨 연유 때문인 것이냐? 우리에게 성지를 지켜 달라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닌 거 같은데?”
“대존께서 한 곳을 잘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지가 다른 이의 손에 떨어지면 그곳을 훼손시킬 수도 있거든요……. 그건 제가 원하지 않습니다.”
양준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너한테는 중요한 곳인가 보구나.”
“맞습니다. 하지만 대존과 요족 고수들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곳입니다.”
“우리 요족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가 너희들이 돌아오면 곧바로 반환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냐? 혹여 우리가 그대로 그곳을 차지하면서 우리 영토로 삼을 수도 있지 않느냐?”
대존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존께 잠시 지켜 달라고 했을 때는, 물론 때가 되어 성지를 되찾을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성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요족한테도 좋은 거 아닙니까? 앞으로도 예전처럼 물물교환도 할 수 있고요.”
양준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때가 돼서 네가 무슨 수로 성지를 되돌려 받는지 두고 보자. 만약 그때에도 내 인정을 받지 못하면 성지뿐만 아니라 네 목숨도 거둘 것이다.”
대존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대존께서는 승낙하신 겁니까?”
양준이 씨익 웃었다.
“그래, 어디 잘해 보자고.”
대존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양준이 많은 이익을 그냥 선물하겠다는데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인령에 들어가는 것은 일정한 위험 요소가 있지만, 구천성지는 인령의 외곽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을 치고 있으니 누구도 감히 그들을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성지에서 조용히 실력을 향상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대존의 예상대로라면, 양준은 적어도 자신과 대등한 실력을 갖춘 다음에야 성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양준이 자신의 수준에 이르려면 어느 정도의 세월이 걸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몇백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대존은 양준이 2~30년 뒤면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큰소리 친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몇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 그의 부하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높아졌을 것이고, 성지 안의 정석 광맥도 아마 동이 났을 것이다. 심지어 구천성지의 연단사, 연기사더러 요족들에게 연기, 연단 지식을 가르치게 해, 나중에는 아예 외부인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을 터였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미래가 대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들이 성지에 들어가려면, 우선 구천성지를 도와 지금 성지를 공격하는 적들을 쫓아내야 했다. 이에 대해 대존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때,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채접이 무거운 낯빛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양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화생지 쪽에 사고가 생겼습니다.”
대존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얼른 일어나 급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채접도 서둘러 뒤따랐다. 그들은 양준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
얼마 안 되어, 고목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연이어 들려왔다. 요족 고수들이 모두 아래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양준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일어서서 고수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요족들의 화생지가 줄곧 궁금했었다. 그 속에 어떤 현묘한 힘이 있어 요수들을 인간으로 변하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무모하게 요족의 핵심 지역에 접근하면 요족 고수들의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생지를 볼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에 그래도 일단 가보기로 했다.
화생지는 뇌목부에서 몇십 리 떨어진 곳으로, 그리 멀지 않았다. 어느 한 산골짜기에서 놀랄 만한 원기 파동이 발산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하늘의 색이 쉼 없이 변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짐승의 포효가 그쪽에서 들려왔다. 그 포효에 다들 이유 없이 기혈이 들끓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양준이 화생지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요수와 요족의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산골짜기를 바라보며, 긴장감 때문에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도 양준이 이곳까지 온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양준은 요수들 가운데 끼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산골짜기 안에는 지름이 삼십여 장 되는 깊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웅덩이 안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각종 현묘한 기운은 바로 그곳에서 발산된 것이었다. 아마 그곳이 바로 요족의 화생지인 듯했다.
지금 이 순간, 화생지 안에는 희고 투명하며 머리에 뿔 두 개가 난 순록(馴鹿) 같은 요수가 빠져 있었다. 액체 중의 기운이 요수의 몸속을 흐르면서 뼈와 피, 살을 바꿔 놓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변고가 생긴 건지 순록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대존은 화생지 옆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온몸의 원기가 용솟음치며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마 순록이 인간으로 변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효력이 거의 없었다.
화생지를 중심으로 땅 위에서는 수시로 밝은 원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은 마치 진법처럼 심오하고 복잡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요족들이 진법을 모른다고 전해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화생지 주변의 진법은 어떻게 설치한 것일까? 대존의 수단을 보면, 진법을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대존의 원기가 흘러나왔지만 반짝이는 원기 빛줄기와 전혀 어우러지지 않았다. 때문에 대존의 경지가 아무리 높아도 순록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머, 너 어떻게 여기 있어?”
양준이 정신을 집중해 지켜보고 있는데, 상큼한 향기와 함께 옆에 자그마한 그림자가 번쩍 나타났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니 고양이 귀 소녀였다.
그녀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담청색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입가에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자 귀여운 덧니가 눈에 띄었다.
“안녕! 이쪽이 좀 소란스럽기에 구경하러 왔어.”
양준이 그녀에게 공수하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 정말 대담하구나. 감히 이곳까지 오다니. 조심해, 저들이 널 아주 찢어발길 수도 있으니까.”
고양이 귀 소녀는 한참을 손짓, 발짓 해가면서 말했다.
“설마?”
양준은 그녀의 말에 낯빛이 흐려졌다.
“깔깔……! 무섭지?!”
고양이 귀 소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날 놀린 거야?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야?”
양준은 소녀의 장난질에 넘어간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소녀는 슬픔에 잠기더니 웃음기를 거두고 탄식했다.
“가련한 백옥록(白玉鹿)! 사람으로 변하다가 문제가 생긴 거야. 아마 실패할 것 같아.”
“무슨 문제인데?”
“몰라. 애당초 내가 변할 때도 문제가 생겼거든. 그때는 다행히도 대존께서 도움을 주셨지. 아니면 나도 실패했을 거야.”
“결과가 안 좋아? 다들 걱정하는 것 같은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지. 이는 자신의 깨달음이 적어 실패한 게 아니라, 화생지 때문에 실패한 거니까. 만약 자신의 노력이 모자라 성공하지 못하면, 그냥 원래 모습을 유지하면 되잖아. 하지만 화생지에 문제가 생겨 실패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화생지에 문제가 있어?”
“그래.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발생했어. 그래서 다들 죽었지…….”
고양이 귀 소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쁜 자식, 넌 왜 여기 있어? 누가 허락했지?”
이때, 갑자기 여린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채접이 양준과 고양이 귀 소녀의 앞에 다급히 다가왔다. 그녀는 고양이 귀 소녀를 등 뒤로 잡아당기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게… 그냥 무슨 일인지 와 본 겁니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묘낭(描娘), 저 자식이 너한테 뭔 짓 안 했어?”
채접은 양준을 냉랭하게 지켜보고는, 등 뒤의 고양이 귀 소녀에게 물었다.
“아니, 그냥 말 몇 마디 했을 뿐이야.”
묘낭이 얼른 대답했다.
“인간을 조심해. 혹시라도 너한테 나쁜 짓을 할 수 있으니까.”
“무슨 짓?”
묘낭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고서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채접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널 잡아서 호되게 때릴 거야. 그런 다음 먹을 걸 주지 않고 굶겨 죽일걸.”
묘낭은 순간 당황하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초리로 양준을 흘끔 보았다. 그녀에게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벌인 듯했다.
“저기요. 그렇게 사람을 헐뜯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양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대존께서 명령했기에 널 공격하지 않는 거야. 주제 파악 똑바로 해… 아니면 제대로 한 번 혼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뇌목부에 돌아가서 대존을 기다렸다가 못 다한 얘기를 마저 하죠.”
양준은 억울한 생각이 들어 한마디 말하고는 뒤돌아 떠나려 했다. 아무튼 화생지도 봤겠다, 계속해 남아서 남에게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