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0장. 요족이 너한테 빚을 진 셈 치지
화생지 옆,
대존은 깊은 눈매로 양준을 바라보다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먼저 회복한 다음, 다시 이야기하지.”
양준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대존의 앞에서도 여전히 신식을 화생지 밑에 침투시키고 있었다. 무언가를 각성하는 것 같았다.
대존은 이를 알아차렸지만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휘저어 구경하던 이들을 물리쳤다. 눈을 감고 좌선하는 양준을 바라보던 대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는 이제 곧 다년간 파헤치지 못했던 비밀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비밀을 인간이 알아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대존은 이 사실이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녀석……!’
대존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양준의 재주를 과소평가한 듯했다.
‘녀석이 신식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비밀인데!’
양준은 꼬박 하루 밤낮을 앉아 있었다. 그는 회복하면서 화생지 아래쪽의 비밀을 파헤쳤다. 대존은 기다리지 못하고 진작 뇌목부로 돌아갔다.
양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화생지 옆에는 오직 채접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한창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훑어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채접은 어색하게 눈길을 돌렸다.
“채접 대인……!”
양준은 채접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회복했어?”
채접이 덤덤하게 물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착각인지, 왠지 그에 대한 채접의 적의가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다 회복했으면 따라와. 대존이 기다리고 계셔.”
채접은 말을 마치자 날갯짓을 해 먼저 날아갔다. 양준은 서둘러 따라갔다.
두 사람이 말없이 뇌목부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요수와 요족 고수들은 너도나도 일어나서 친근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배척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양준이 백옥록을 구해 주면서 그들 모두에게 호감을 얻은 듯했다.
‘요족들은 역시 결속력이 있군!’
양준은 몰래 감탄했다.
인간의 어느 집단에서도 이런 일은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기껏해야 특정 몇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요족들처럼 누구 하나 양준을 얕보지 않고, 다들 그를 존귀한 손님으로 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뇌목부 위쪽에 있는 대존의 집 앞에 이르러서야, 채접은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 봐.”
“고맙습니다.”
양준은 미소로 인사한 뒤,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깐만……!”
채접이 갑자기 양준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요?”
양준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채접은 힘겨운 표정으로 분홍빛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겨우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
그러고는 몸을 날려 재빨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더니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양준은 실소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존의 방에 들어섰다.
방 안에 앉아 있던 대존이 웃는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앉아.”
그는 문 밖을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채접의 인정을 받은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성지의 전임 성주도 이곳에 여러 번 왔었지만 채접은 좋은 낯빛을 보이지 않았거든.”
“그런가요? 그럼 참 영광이네요.”
양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대존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너도 채접이 편견이 있다고 탓하지 마. 다 연유가 있어 그래.”
그러면서 대존은 술 단지를 건넸다.
“술 한잔 하면서 말하지. 이 술은 전임 성주가 가져온 거야. 우리 요족은 술을 빚을 줄 모르거든.”
양준은 받아서 한 모금 마시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네요. 저한테 좋은 술이 있습니다. 마셔 보시겠습니까?”
“꺼내 봐.”
대존은 사양하지 않았다.
양준은 웃으며 검은 책 공간에서 술 단지를 꺼내 대존에게 한잔 따라 주었다.
대존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좀 좋아지려 했는데, 왜 이리 깍쟁이야. 전임 성주는 술 몇백 단지를 가져왔었어. 나도 한 단지씩 비웠단 말이야. 이리 작은 잔으로 하나 주는 건 아니지 않나?”
양준의 낯빛이 시커메지며 말했다.
“저한테도 반 단지밖에 안 남은 술입니다. 어찌 그리 통쾌하게 마실 수 있겠습니까?”
대존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연신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고는 눈앞의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순간, 그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의 얼굴에는 흐뭇해하며 여운을 느끼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모든 불만이 깔끔하게 가시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대존은 입맛을 다시며 소리쳤다.
“좋은 술이야! 전임 성주가 가져온 술보다 훨씬 좋군. 자, 자, 한 잔 더.”
양준은 대범하게 그에게 잔을 채워 주었다. 대존은 다시 한번 단번에 잔을 비웠다. 그렇게 연이어 석 잔을 비우고 나서야 그는 만족한 듯 술 트림을 했다.
“네가 빚은 거야?”
“술을 무척 즐기는 제 사숙께서 빚은 겁니다. 대존께서는 그냥 맛만 보십시오. 이 술은 적어도 50년을 들여 빚은 거거든요.”
“50년? 네 사숙도 참 대단하다. 50년을 들여 술을 빚다니? 그렇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아. 이 술은 정말 맛이 끝내주는군.”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술을 홀짝였다. 그는 경지나 실력이 모두 대존보다 약했기에 마음껏 마실 수 없었다. 비우가 빚은 술에는 강한 기운이 내재돼 있어, 한꺼번에 많이 마시면 정말 취할 수 있었다.
“채접 대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양준이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오, 채접 말이야… 변형하지 않았을 때, 인간에게 잡힌 적이 있었지. 그녀의 본체는 칠채환접(七彩幻蝶)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희귀종이란 말이야. 그래서 인간은 그녀를 사육했어. 그동안 채접은 학대받지 않았지만 혐오스러운 일들을 많이 보게 되었지……. 음, 그녀를 사육했던 인간도 뭐 좋은 놈이 아니었으니까. 때문에 그녀는 인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
“그런 거였군요.”
양준은 그제야 채접이 왜 자신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내가 오래전에 밖에 나갔다가 채접을 발견하고 구해서 데려왔거든.”
대존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더는 이야기하지 말아야겠군요.”
대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채접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대존은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화생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지 준비해 두었어?”
“대존께서는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넌 무얼 알고 있는데?”
대존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이에 양준이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적인 것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지? 화생지 아래쪽 비밀은 나조차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말이야.”
대존이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천연적인 영진입니다. 진법에 대해 잘 모르시죠? 대존께서도 탐지해 보아서 아시겠지만, 산골짜기 아래쪽에는 지맥이 있습니다. 지맥에는 방대한 기운이 흐르고 있는데, 화생지는 지맥의 기운이 겉에 드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화생지는 그 외에도 다른 신비한 기운이 있습니다. 아직 그 기운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운이 요족들이 변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건 확실합니다.”
“자세하게 말해 봐.”
“사실 저는 연단사이기도 합니다. 아래쪽 천연 영진은 제가 연단할 때 사용하는 영진과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다만 화생지 아래쪽 영진은 수많은 작은 영진이 모여서 형성된 것으로, 현묘하고 복잡합니다. 요족들이 변형하는 것은 어찌 보면 연단사가 연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자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대존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화생지가 약 가마, 지맥은 영진, 못의 물은 보조 약재와 같습니다. 그 다음 그것들을 이용해 요수를 단약처럼 제련하는 것입니다.”
“요수를 단약처럼 제련한다?”
“네. 연단할 때, 각종 약재를 한데 넣으면 신기하고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 약물이 되고, 약물을 다시 단약으로 제련하게 됩니다. 변형할 때도 마찬가지죠. 들어갈 때는 요수의 몸이지만,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피와 살, 뼈가 모조리 변화하면서, 나올 때는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대존은 미간을 찌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양준의 말을 자세히 되새겨 보는 듯했다. 그는 실력이 강하고 경지도 높았지만 연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말한 걸 반밖에 알아듣지 못했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대존께서 연단술을 배우면 언젠가는 확실하게 알게 될 겁니다. 하지만 대존의 원기는 연단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양준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연단술을 알 필요는 없어. 그냥 화생지 아래쪽 영진에 대해 알면 돼.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요수들이 변형할 때 사고가 생기는 것은 영진이 훼손되었기 때문이겠지?”
“네, 맞습니다. 제가 영진을 보수해서 백옥록을 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러면 어떻습니까? 구천성지의 위험이 다 해소되면 그때 제가 관련 영진을 대존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가는?”
대존은 실눈을 뜨고서 경계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허허……! 연단사나 연기사에게 있어서 영진은 가장 중요한 비밀이지요. 쉽게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 손실이 매우 크거든요. 대존께서는 저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시겠습니까?”
대존은 화가 나서 양준을 바라보더니 한참이나 지나서야 나지막하게 일갈했다.
“나쁜 놈! 영진을 나한테 가르쳐 주면, 우리 요족이 너한테 빚을 진 셈 치지.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날 찾아와.”
“참 통쾌하시군요. 자, 그럼 이제 우리도 친구 사이죠?!”
“넌 전임 성주보다도 상대하기 힘드네. 관두자. 인간 중에서 우수한 인재가 나오기도 힘든 거 같더구먼. 네가 2~30년 뒤에 나와 맞먹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보지. 너한테 빚을 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이 일을 빌미로 나에게 구천성지의 위험을 해소해 달라고 부탁해도 돼.”
대존은 콧방귀를 뀌더니 곧이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아닙니다. 지금 구천성지의 위험을 해소하는 건, 전에 협의한 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이 빚은 남겨 둘 겁니다.”
“마음대로 해!”
대존은 입꼬리를 실룩거리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