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802화 (801/853)

제 802장. 도리를 따지려는 것뿐일세

결계 밖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몇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보아하니 지난 며칠간 주모자 세력들이 조력자들을 더 끌어 모은 모양이었다.

양준은 덤덤하게 아래쪽을 지켜보며 신식을 방출했다. 몇천 명 가운데 세 세력의 인원수가 가장 많았다. 파현부, 전혼전, 유명종 및 그들이 끌어들인 가문 사람들과 지인들인 듯했다. 세 세력을 제외하고 오합지졸인 세력도 적지 않았다. 다들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서 차가운 눈초리로 성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지 일행이 나타나자 결계를 공격하던 무인들은 서둘러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도 두려운 눈빛을 보였다. 구천성지가 이전 같지 않다고 하나, 어쨌든 오랫동안 맥을 이어온 강한 세력이었다. 역사로 보나 저력으로 보나, 여기 있는 어느 세력보다도 더 강했다. 여전히 그들의 위세는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만약 구천성지를 완전 뒤엎지 못한다면, 구천성지가 재기했을 때 지금 여기 있는 어느 세력도 불운에서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동안 구천성지의 성주는 모두 입성 경지 3단계의 최정상 경지였다. 대륙 전체에서도 몇 세력 외에는 이 정도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이런 세력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은 신식을 펼쳐 입성 경지 고수의 수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열다섯 명은 되었다. 그중 두 명은 입성 경지 2단계였고, 나머지는 입성 경지 1단계였다. 입성 경지의 인원수와 경지에서 구천성지는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있었다.

“서휘, 알고 지낸 지 백 년이 다 되는데, 오늘에서야 겁쟁이라는 걸 알았군. 성지의 결계 안에 숨어 있으면 무사할 줄 아는 건가? 그러면 성지의 전임 성녀가 지은 살육의 죄를 발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인원수가 많은 세 세력 중에서 선두에 선 고령의 노인이 호통을 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더니 왁자지껄 떠들면서 조소를 날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서휘는 덤덤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장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양준의 낯빛이 바뀌더니 고령의 노인을 몇 번 더 훑어보았다.

장오는 파현부의 고수로 입성 경지 2단계였다. 열며칠 전, 서휘는 세 세력 가운데서 신경 쓰이는 이는 오직 장오뿐으로, 장오는 자신과 같은 경지여서 맞붙으면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구천성지에 찾아와 죽은 가문 사람들과 지인들을 위해 도리를 따지려는 것뿐일세.”

장오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도리를 따진다고? 자네 같은 소인배가 감히 도리를 따져?”

서휘의 반짝이는 눈빛에는 온통 비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소인배인지, 아닌지는 자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지. 성지의 전임 성녀가 밖에서 사람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살육을 벌였네. 그런데 자네들은 성지에 숨어서 방관했지.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 어디 가서 도리를 따져야 하나? 그들이 구천성지를 건드렸었나? 그들이 성지에 무슨 잘못을 했다고? 심지어 그들 중에는 성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네.”

“맞아. 전임 성녀를 방임해서 세상에 해를 끼쳤잖아. 이에 대해 해명을 해야지.”

“전임 성녀를 죽이지 못하면, 오늘 그냥 구천성지를 멸할 것이다.”

“유유상종이라고 다 같은 놈들일 거야. 이들이 전임 성녀에게 시킨 건지도 모르잖아.”

“…….”

다들 분개해서 떠들어 댔다. 모두 듣기 구차한 말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장로와 호법들은 분노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들은 남성고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 능력이 모자라 그녀를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전임 성주가 죽은 뒤, 유일하게 남은 성녀와 미래의 성주도 멀리 마강에 가서 데려온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어디 남성고를 처리할 여력이 있겠는가. 더욱이 남성고는 구천신기에 능통해서 장로와 호법들은 그녀의 적수가 못 되었고, 그녀를 찾아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지난번 남성고가 습격했을 때도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겨우 물리친 것이었다. 그때 성지의 근본이 많이 무너졌고, 사상자도 많이 나왔었다.

성지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보던 장오는 의기양양해서 더욱 몰아붙였다. 그는 숨겨 두었던 남성고를 당장 내놓고, 모든 이의 앞에서 그녀를 죽여 무고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달래라고 소리쳤다.

성지의 장로와 호법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성녀는 살아생전 한 사람도 죽이지 않지만, 죽은 뒤에 살육을 벌인다는 사실은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성지의 비밀을 해명한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장오, 정말 이렇게 나올 건가? 전임 성주께서 계실 때, 파현부를 홀대하지 않았네만.”

서휘는 분노에 차서 일갈하고는 다시 옆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관(曺管), 무겁(巫劫), 자네들도 꼭 이렇게 해야겠나?”

지명당한 두 사람 중에서 조관은 전혼전의 주인이었고, 무겁은 유명종의 주인으로 모두 입성 경지 1단계였다.

조관은 웃으며 말했다.

“대장로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지금 도리를 따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도리가 있는 쪽을 지지할 겁니다.”

무겁은 험악한 외모와 달리 깡마른 몸에,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었다. 그는 사공을 수련해서인지 몸을 감싼 검은 도포에서 녹색 기운이 배어 나왔다. 그가 서 있는 사방 몇십 장 이내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서휘의 말에 껄껄 웃었다.

“우리 유명종은 돈을 받고 일합니다. 대장로께서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면 지금이라도 성지를 도울 수 있습니다.”

“무겁! 농지거리는 그만하게.”

장오가 음산한 눈빛으로 무겁을 바라보았다.

무겁은 야릇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장오는 연신 냉소했다.

“서휘, 방금 전에 전임 성주가 우리들을 잘 대해 줬다고 했나? 그럼 하나만 묻겠네. 우리 세 세력은 해마다 구천성지에 각종 수련 자원을 바쳤지. 하지만 7년 전 내가 성지의 사상동(四象洞)에서 수련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단칼에 거절당했네. 이게 잘 대해 주는 건가?”

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들이 물자를 바친 건 사실이네. 그렇지만 만약 전임 성주께서 보호해 주지 않았으면 자네 세력들이 지금처럼 평안하게 발전할 수 있었겠는가? 진작 수해밀림의 대존한테 제거되었을 거네.”

“대존은 입에 담지도 말게. 전임 성주가 요족 대존과 사적으로 친분이 있어서 수해밀림에 자주 드나든다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인간과 요족은 대립각일세. 그런데 성지는 이처럼 세상 사람들의 도의를 저버리는 일을 해왔지. 벌받을까 두렵지도 않나? 해마다 우리 세 문파의 제자들이 이유 없이 실종되었네. 그게 다 요족들에게 잡혀 간 게 아닌가?”

장오가 분노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일갈했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선동에 따라온 고수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을 들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너도나도 장오에게 답을 청했다.

장오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구천성지의 전임 성주는 요족 대존과 사이가 좋은 게 확실하네. 내가 직접 이 두 눈으로 전임 성주가 수해밀림을 드나드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네. 그리고 그쪽에서 요수 한 마리를 잡아와 비밀 공법으로 요수의 기억을 들여다보았지. 이는 내가 성지에 오물을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닐세.”

장오의 대답에 원래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고수들은 태도가 확고해졌다. 요족에 대한 적개심이 강한 만큼 그들의 눈에 구천성지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장오가 이런 큰일을 말하는 데도 서휘가 반박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은 모든 게 사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증오의 시선들이 성지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서휘, 왜 요족 대존에게 구천성지를 도와달라고 청하지 않았나? 요족 대존은 입성 경지 3단계씩이나 되는데 말일세. 만약 그가 나서면 우린 물러갈 수밖에 없다네. 전임 성주와 가까운 친구 사이가 아닌가? 아니면 요족들도 죽은 정승이 산 개만도 못하다는 도리를 아는 건가?”

서휘는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여간 화나는 게 아니었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는 금세 기혈이 들끓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말해 봤자 입만 아플 뿐이죠. 그리고 말할수록 성지의 입장만 난처해질 것입니다. 어쨌든 남성고의 일은 성지의 책임이니까요.”

양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겠네.”

서휘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양준은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뎌 장로, 호법들의 앞에 섰다.

몇천 쌍의 시선들이 그의 몸에 쏠렸다. 다들 ‘이건 또 뭐지?’ 하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이 시점에 젊은이가 나서서 무얼 하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구천성지 사람들이 나타냈을 때에도 적지 않은 이들은 의혹에 찬 시선으로 양준을 훑어보았었다. 서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모두 구천성지의 고수들로 이런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안령아가 구천성지의 성녀라는 것은 다들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양준만은 정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양준은 나이가 어렸지만 장로, 호법들과 나란히 서 있었고, 게다가 다들 예의를 갖춰 그를 대했다. 장오마저도 어리둥절했다. 그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구천성지에서 양준과 같은 젊은이를 본 적이 없었다.

“여러분, 남성고의 일은 확실히 성지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성지도 지금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남성고는 진작 죽었습니다. 지금의 그녀는 산송장일 뿐입니다. 때문에 성지는 그녀에게 명령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남성고는 성지에도 살심을 품고 있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대장로께서 반드시 남성고를 제거할 것입니다.”

양준은 목소리를 높여 우렁차게 말했다.

양준의 말이 끝나자, 선동에 이끌려 모여든 고수들은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다시 되새겨 보니 양준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남성고의 몸에서는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직 옅은 죽음의 기운만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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