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3장. 전 그럴 자격이 충분합니다
게다가 지난 2년 동안, 남성고는 밖에서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다. 마음속에 오직 살의만 남아 있는지, 사람을 보면 다짜고짜 죽였다. 하지만 그전까지 그들은 구천성지의 전임 성녀가 마음씨 착한 사람이라고 전해 들었었다. 양자 사이에는 차이가 너무 커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리고 반년 전에 남성고가 구천성지를 공격한 것도 사실이었다.
선동에 이끌려 온 사람들의 표정이 흔들렸다. 결국 그들 또한 마음속으로는 구천성지와 척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냐? 남성고가 이미 죽었다고? 죽은 사람이 어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냐? 웃기는 소리! 너는 우리가 바보로 보이느냐?”
장오는 양준을 노려보며 매섭게 일갈했다.
“맞아.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지?”
“성지에서 왜 여러분을 힘들게 하겠습니까? 남성고가 밖에서 살육을 저지르면 성지에는 무슨 좋은 점이 있습니까?”
양준이 되물었다.
장오는 입을 벌름거렸으나 순간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세력들은 남성고의 일 때문에, 선동에 이끌려 성지에 도리를 따지러 온 것이었다. 정말로 구천성지를 제거하려는 것은 장오를 위수로 한 세 세력들뿐이었다. 그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빌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
“네가 누군데 감히 나서서 나와 대화하는 것이냐? 너희 성지에서 나와 대화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서휘뿐이다. 서휘, 노망 난 거 아닌가? 이런 젊은이를 내세우다니, 참 웃기는군.”
장오는 하찮다는 듯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자격이 없다고요? 미안한데, 전 그럴 자격이 충분합니다.”
양준이 피식 웃었다.
장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양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바로 구천성지의 새로운 성주입니다. 그런데도 저한테 자격이 없습니까?”
양준은 장오를 굽어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에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고, 다들 멍하니 양준을 바라보았다. 반면 성지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양준의 뒷모습을 뜨겁게 지켜보았다.
‘인정했어! 드디어 스스로 인정했어!’
‘몇천 명 앞에서 자신이 성지의 새 주인이라고 인정했어!’
서휘는 심지어 하늘을 우러러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동안 그는 양준이 구천성지에 귀속감을 느끼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하지만 양준은 성주 자리를 계승하는 것을 결코 승낙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역에서 돌아온 뒤 양준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지만, 서휘는 지금에서야 확실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양준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새로운 성주라고 인정했으니, 이제 더는 번복하지 못할 터였다.
성지의 고수들은 드디어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 그들은 기쁜 나머지, 눈앞의 난관이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았다. 옥영과 정월동은 얼굴에서 빛이 반짝이며 생기가 넘쳤다. 그녀들은 마치 성지의 무너졌던 기둥이 다시금 바로 세워져 자신들을 버텨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성주라고?”
장오의 낯빛이 창백해지며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양준을 바라보았다. 전혼전의 조관도 미간을 찌푸린 채, 눈빛이 싸늘해졌다. 유명종의 무겁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혼잣말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재미있군. 완전 헛수고를 했네… 진작 새로운 성주가 있었다니.”
주모자 세 세력들이 한데 모여, 각 세력의 고수들을 선동해 끌어 모은 것은 구천성지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구천성지의 전승이었다. 그것은 자질과 상관없이 누구라도 순조롭게 입성 경지 3단계까지 진급할 수 있는 보물이었다. 그러니 누군들 탐내지 않겠는가?
구천성지를 제거하고, 안령아를 사로잡아 자신들 문파의 최우수 제자와 짝을 지어 주기만 하면, 몇십 년이 지나 정상급 고수를 배출할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의 문파는 구천성지 못지않은 큰 세력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때문에, 양준이 자신이 새로운 성주라고 말하자, 장오와 조관은 순간 탐내던 보물을 남에게 뺏긴 좌절감과 분노를 느꼈다.
“서휘, 저 자의 말이… 정말인가?”
장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서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이네. 우리 성지는 진작 반년 전에 이미 새로운 성주를 모셨다네. 다만 그동안 안팎으로 소란이 끊이질 않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았을 뿐이었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우리도 더는 숨기지 않을 걸세.”
그 말에 장오는 크게 낙담했다. 이제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실현 불가능했다. 구천성지를 차지한다고 해도 신비한 전승을 얻을 수가 없었다.
조관은 장오의 낙담한 모습을 보고 얼른 전음을 보냈다. 곧이어 장오는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빛이 다시금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목표물을 찾은 게 분명했다. 지금 양준과 안령아를 사로잡는다면 그가 원하던 대로 전승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젊은이들은 양준의 행운을 부러워했다. 구천성지의 성주가 된다는 것은 곧 벼락출세를 의미했다. 전에 무슨 일을 했든, 경지와 자질이 어떠하든, 분명 최정상급 무인이 되어 세상을 굽어보고, 한 지역의 패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부러움은 점차 질투로 변질되었고, 양준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도 증오로 차올랐다. 그들은 마치 자신에게 왔어야 할 행운이 내력이 불분명한 양준에게 떨어진 것 같아 불만을 느꼈다.
*
이 시각 몇 리 밖,
한 세력의 집결지에서 두 여인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양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한 여인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의혹이 가득했고, 다른 한 여인은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모습이 살짝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운훤, 난 왜 구천성지의 새로운 성주가 누군가를 닮은 거 같지?”
독오맹의 완심어는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운훤의 귓가에 대고 얘기했다.
“봐봐. 정말 닮지 않았어?”
“닮은 거 같긴 한데, 그는 아닐 거야. 이미 죽었잖아…….”
운훤은 빨간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말했다.
“누가 그놈이 죽은 걸 봤어? 우린 그냥 잡혀 가는 것만 봤잖아.”
완심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죽은 게 아니라면 왜 여태까지 나한테 연락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운훤은 저도 모르게 낙심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과 눈앞의 새로운 성주의 모습은 거의 판박이였다.
‘정말 양준인가?’
몇 리를 사이에 두고 있어, 운훤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완심어는 코웃음을 쳤다.
“저놈은 기필코 바람둥이일 거야. 그래서 널 농락한 다음, 버리고는 다시 찾지 않는 거지.”
“좀 조용히 해!”
운훤은 깜짝 놀라, 몰래 곁에 서 있는 두 중년을 힐끗 보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안 돼. 아직 아무것도 모르신단 말이야…….”
완심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새 성주는 그놈이 틀림없어. 세상에 판박이처럼 닮은 사람이 어디 있어? 쌍둥이도 아니고! 저놈은 널 신경 쓰지도 않는데, 넌 아직도 저놈을 위해 말하고 싶니?”
“그를 위해 말하는 게 아니라…….”
운훤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계속해 양준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체형, 목소리 심지어 기질마저도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녀의 마음은 왠지 쓰라렸다.
“그럼 나하고 같이 가서 확인해 볼래? 가까이 가서 보면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냐?”
완심어는 운훤을 대신해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말이야?”
“물론 지금이지!”
완심어는 다짜고짜 운훤을 잡아끌고 양준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운훤아, 뭐 하러 가는 것이냐?”
독오맹의 맹주 운성(雲城)이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맹주님, 저희 구경하러 갔다가 금방 돌아올게요.”
완심어는 대답하는 한편, 운훤을 끌고 재빨리 멀어져 갔다.
운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곁에 서 있는 중년을 힐끗 보며 물었다.
“기염, 자네 줄곧 성지의 새 성주를 지켜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데, 뭘 발견하기라도 한 건가?”
기염이 얼른 대답했다.
“맹주님, 몇 년 전 제가 보고드렸던 큰 사건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몇 년 전?”
“열화성이 훼손되던 그해, 맹주님과 큰아가씨께서 화해했던 그해 말입니다.”
“아, 그 사건을 말하는 거군. 물론 기억하고 있지.”
운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독오맹 휘하 한 성곽이 훼손되어 손실이 막대했다. 하지만 운성은 오히려 기뻤다. 그전까지 줄곧 자신과 말도 하지 않던 딸이 드디어 그의 곁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기염은 열화성의 성주로서, 그때 당시 운훤을 데리고 독오성으로 돌아갔었다.
“뭔 문제라도 있는 겐가?”
운성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기염은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구천성지의 새 성주는 그때 관을 멘 사람에게 잡혀 갔던 그 젊은이입니다.”
“뭐라고? 확실한가?”
운성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기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그때 그는 큰아가씨와 함께 열화성에 왔었습니다. 그래서 인상이 무척 깊었죠. 아마 큰아가씨와 심어도 무언가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확인하려는 듯합니다.”
“그때 죽었다고 했었잖는가?”
운성은 문득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는 신비한 관을 멘 사람과 연관된 일이었다. 만약 소문이 나기라도 한다면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관을 멘 사람은 오랫동안 존재했고, 누구든 그의 몸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줄곧 누구도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고, 관을 멘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새 성주가 그때 잡혀 갔던 사람이라면, 남들보다 더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혹여 관을 멘 사람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우린 다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죠. 하지만 이제 보니 그는 잘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연을 만나 구천성지의 성주까지 된 듯합니다.”
운성은 얼굴을 실룩거렸다. 이유 없이 후회가 밀려왔다.
‘새 성주가 독오맹의 제자일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실력이 너무 빨리 오른 게 의문입니다. 그때 만났을 때는 겨우 신유 경지 8단계 정도였거든요. 이제 불과 4~5년 지났을 뿐인데, 초범 경지 2단계로 저와 비등합니다. 어떻게 수련한 거지? 큰아가씨께서 좋아하신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기염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