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806화 (805/853)

제 806장. 기회를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성지의 결계와 진법은 구천성지의 역대 성주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치하고 보강한 것으로 무척이나 단단했다. 장오, 조관과 같은 입성 경지 고수가 펼친 특수한 수단만이 겨우 결계를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결계를 뚫지 못하면 구천성지의 사람들과 정면으로 싸울 수가 없었다.

이를 인지한 조관의 얼굴에는 온통 아쉬움뿐이었다.

그의 말에 양준은 피식 웃더니 느긋한 표정으로 그쪽을 향해 손가락을 크게 튕겼다. 그의 이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곧이어 조관의 근처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몇십 명에 달하는 전혼전의 정예 고수들이 한순간에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 중에는 심지어 초범 경지도 두세 명 정도 섞여 있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공포감으로 물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조관과 거리를 두었다. 조관 본인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누구도 양준이 도대체 무슨 수단을 써서 기척도 없이 한꺼번에 몇십 명의 무인들을 죽인 것인지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양준은 어떤 무공이나 비보를 펼치지 않았고, 또한 신식의 힘도 방출하지 않았다. 오직 동작 하나만으로 살육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단은 사람들의 공포감을 불러일으켰고, 다들 자신이 다음 목표물이 될까 두려워했다.

“당신이 내가 재주가 있나, 없나를 말할 처지는 아니죠.”

양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원래 그는 서혼지충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싸우기에는 그 역시도 힘이 부쳤다. 진원은 충분했지만, 정신이 성지의 진법과 연결되어 있기에 방대한 힘이 소모되었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서혼지충으로 위압감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서혼지충은 입성 경지 이하의 무인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몇십 명을 죽이는 건 그야말로 양준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서혼지충을 제어하기 힘들어 조금만 풀어 놓았다. 또한 이곳에 온 무인들 모두가 구천성지와 척을 지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를 죽일 경우, 나중에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이곳에 운훤과 완심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만큼, 잘못하다가는 그녀들도 다칠 수 있기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전혼전에서 몇십 명의 고수들이 죽은 뒤로, 아무도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다들 경악에 물든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양준이 보여준 힘과 수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제야 그들은 이번에 구천성지를 점령하게 되더라도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무겁, 자네는 왜 구경만 하고 공격하지 않나?”

장오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유명종의 무겁을 향해 나지막하게 일갈했다.

무겁은 시종일관 온몸에 녹색 기운을 감싼 채, 마치 이 싸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무겁이 나지막하게 웃더니 대답했다.

“공격할 기회를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찾았는가?”

장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좀 있다 다시 보자고!”

장오는 불쾌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파현부와 전혼전만 양준과 싸우고 있었다. 일부 고수들이 나서서 돕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세력들은 지켜보기만 했다. 게다가 양준도 파현부와 전혼전만 공격하고, 다른 사람들은 건드릴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에 장오는 오늘 구천성지를 이기기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이 지속되어 결속력이 사라지면, 구천성지가 역으로 반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서휘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몇십 년간을 왕래한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며칠만 더 가만두지. 다음번에 오면 오늘 같은 운은 없을 거야.”

장오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손을 휘저어 파현부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재빨리 철수했다.

“다음번에 다시 찾아오면, 저희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겁니다.”

양준은 차갑게 비웃었다.

“방자하군… 아직은 젊어서 충동적이야!”

몇 리 밖에서 싸움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기염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운성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 같군. 일단 이곳에서 철수하고 다시 의논해 봅세.”

“예!”

기염은 고개를 끄덕이고 운성의 뒤를 따랐다.

결계의 변두리에 서 있던 양준은 조용히 신식을 방출해 인파 속의 한 그림자를 찾은 다음, 의념을 전했다. 사람들 속에 끼어 철수하던 청년은 얼굴빛이 바뀌더니 곧바로 긴장한 티를 감추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얼마 안 되어, 장내에는 흥건한 피와 시체들만 가득 남게 되었다. 양준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제야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 성지의 장로와 호법들은 마치 큰 승리라도 거둔 듯이 다들 기세가 드높았다. 그들은 숭배와 존경을 담은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성주… 이젠 이리 불러도 됩니까?”

서휘는 말하면서 양준의 반응을 살폈다. 양준이 부인하지 않자, 그는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주께서는 과연 대단하십니다. 짧은 며칠 동안 자신의 기운을 성지의 산봉우리와 연결시키다니요. 감탄해 마지않습니다.”

“네, 맞아요……. 전 오늘 우리 성지가 큰 재난을 겪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손쉽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줄이야…….”

옥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좋아만 할 일은 아니에요. 오늘은 그들이 성지의 힘을 얕보아서 큰 손실을 입은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오늘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순간 침묵했다. 이때 서휘가 물었다.

“성주께서 계시면 성지 진법의 도움만 받아도 그들을 막을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전 아직 그럴 재주가 없습니다. 산봉우리의 기운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오늘 산봉우리들과 연결되어서야 이 문제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 그건 무슨 말씀인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제가 오늘 같은 양의 기운을 아마 한 번쯤 더 사용하면 산봉우리들에 내재된 현묘한 기운은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 공격의 위력도 배가 될 수 없겠죠. 또한 산봉우리들의 기운이 마르는 순간, 결계와 진법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양준이 나지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오늘 양준이 장오 일행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성지 진법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도움을 받지 못하면 양준은 여전히 초범 경지 2단계 무인에 불과했다. 그렇게 됐을 경우, 성지의 입성 경지 고수들이 모두 싸운다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접전을 통해, 선동에 이끌려 온 사람들 중에서 아마 절반쯤은 떠날 것입니다. 누구든 재기할 가능성이 큰 세력과 척을 지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양준이 형세를 분석하며 말했다.

“반이라도 정말 잘된 일입니다. 나머지 절반이 다시 찾아오면, 그건 정말 우리 성지의 적이죠.”

“맞습니다. 다음번에는 절대 손속에 여지를 두지 않을 겁니다.”

양준은 냉소를 연발했다. 이번 전투에서 그는 전혼전과 파현부만 공격했다.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유명종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사람들에게 성지와 적대시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려준 것이다. 양준이 자신의 뜻을 분명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건 그들이 정말로 성지를 제거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모두 채비를 마쳤습니까?”

양준이 물었다.

“네, 모두 마쳤습니다. 그런데 꼭 성지를 잠깐이라도 포기해야 되는 겁니까?”

서휘는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곧바로 다시 불안감을 보이며 물었다.

“네. 이미 요족 대존과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젠 번복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상대의 날카로운 기세를 한동안 피하는 게 좋을 겁니다. 요족과 그 사람들이 싸우게 내버려 두는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죽어도 아마 다 요족들을 원망할 겁니다. 그게 아니면 성지에서는 너무 많은 적을 만들게 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서휘는 암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싸움에서 구천성지는 어떻게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적들과 싸워 이기면 수많은 원한 관계를 만들 터인데, 이는 지금처럼 안팎으로 소란을 겪는 상황에서는 성지의 발전에 장애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만약 싸움에서 지게 되면, 손실이 막대할 뿐만 아니라 성지의 토대마저 빼앗길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실력과 인원수로 볼 때, 질 가능성이 더 컸다. 때문에, 그럴 바에야 잠시 제자들을 성지에서 철수시킨 뒤 그들이조용히 힘을 키우는 동안, 성지의 난장판을 요족에게 떠넘기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아무튼 인간과 요족은 적대관계이기에 요족들이 사람들을 얼마만큼 죽이든 성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몇천 명의 제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서휘가 간절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끝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알려주십시오. 전 먼저 어딘가 다녀와야겠습니다.”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이 시국에 나간다고요? 옥영 장로에게 모시라고 하겠습니다.”

서휘는 양준의 말에 놀랐지만, 무얼 하려는지 묻지 않고 사람을 붙여 주겠다고만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막 철수했으니 짧은 시간 안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전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오는 거니까,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양준은 신형을 두어 번 움찔하더니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신식을 펼쳐도 그의 종적을 감지할 수 없었다. 이는 구천신기 중 유일한 신법인 일천영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도 양준이 이런 중요한 시기에 밖에 나가서 누구를 만나는지 알 수 없었다.

*

몇십 리 밖,

구천성지를 공격했던 수많은 무인들이 터덜터덜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대체 이 흙탕물 싸움에 끼어들어야 할지, 말지를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수없이 많은 세력들이 한데 모여서 겨우 구천성지와 같은 큰 세력과 대적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성공하지 못하고 구천성지가 재기할 경우, 그들은 끝없는 보복에 시달릴 게 틀림없었다. 원래부터 강하지 않던 세력들은 구천성지의 보복에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세력은 한순간에 무너져 사라질 수도 있었다.

장오와 조관은 특히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느 천막 안,

장오, 조관, 무겁이 한자리에 모여 앉은 가운데, 장오와 조관은 다짜고짜 무겁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무겁이 오늘 내내 구경만 하고 돕지 않아 자신들이 체면을 구겼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무겁은 그들의 태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상야릇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의 이런 모습에 장오와 조관은 더욱더 화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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