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7장. 부탁을 받았다고?
두 사람이 한참 동안 화풀이를 한 다음에야, 무겁이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제가 나선다고 상황을 바꿀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새 성주가 보여준 공격은 두 분도 봤다시피 저 하나가 더 많아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처럼 볼품없이 지지는 않았을 걸세. 그렇게 많은 고수들이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젊은이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물러서다니, 그야말로 치욕이야.”
장오는 나지막하게 일갈하고는 앞에 있던 의자를 내리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기필코 그 녀석을 죽는 것보다 더 괴롭게 만들 겁니다.”
조관은 눈알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분노했다.
두 사람은 한바탕 분노를 표출하고 나서야, 마음이 점차 진정되었다. 이윽고 조관이 탄식하며 말했다.
“결속력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세력이 우리 파현부와 전혼전처럼 한마음이라면, 어찌 구천성지를 무찌르지 못하겠습니까?”
“맞는 말일세.”
장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파현부와 전혼전이 양준과 접전을 벌일 때, 선동해서 끌어 모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 구경만 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모두 나섰다면, 사실 오늘 내로 성지의 결계를 뚫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문주님, 문주님……!”
밖에서 갑자기 다급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파현부의 무인 한 명이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웬일로 이리 당황한 것이냐?”
장오는 원래부터 언짢았는데, 부하가 이처럼 예의도 차리지 않자 곧바로 화가 나서 호통을 쳤다.
그 무인은 놀란 표정으로 예를 올렸다.
“문주님, 몇몇 작은 세력들이 떠나려고 합니다.”
“떠나려 한다고?”
장오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서슬 퍼런 빛이 피어올랐다.
“네, 그들은 구천성지와 척을 지기 싫다면서 문파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웃기는 소리! 누구도 돌아가서는 안 돼!”
조관이 나지막하게 일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이 시기에 누군가 이탈하게 되면, 남은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이탈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우리가 직접 가서 떠나려는 사람들과 얘기해 봐야겠군.”
장오는 음산하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조관과 무겁을 바라보았다.
“두 분의 의견은 어떤가?”
“같은 생각입니다.”
조관이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은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 사람은 합의를 이루고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
근처의 다른 한 천막 안,
독오맹의 사람들은 한데 둘러앉아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운성은 시시때때로 고개를 돌려 딸 운훤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훤은 오늘 천막으로 돌아온 뒤, 넋이 나간 채로 내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운성은 자신의 딸과 구천성지의 새로운 성주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맹주님! 성라문(星羅門)과 설한루(雪寒樓)의 사람들이 떠나려고 한답니다.”
기염이 바깥의 기척을 귀담아듣고서 말해 주었다.
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두 세력의 통솔자들이 의논하는 걸 들었었네. 사실 우리 같은 세력은 남성고로 인한 손실이 그리 크지 않네. 일반 제자 몇 명이 죽었을 뿐이지. 이번에 같이 온 것도 그저 구천성지에 도리를 따지고 해명을 들으려는 것이었네. 그들과 정말로 척을 지려는 것은 아니었잖는가. 오늘 직접 구천성지의 저력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떠나려는 것도 당연한 일일세.”
“맞는 말씀입니다. 남성고 때문에 손실이 막대한 세력은 몇 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나머지 세력들은 모두 저희와 비슷한 상황일 겁니다. 오히려 장오와 조관의 목적이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그들은 아무 손실도 없었거든요. 아니면 이 기회에 그냥 엎어진 놈 꼭뒤 차려는 걸까요?”
기염이 맞장구를 쳤다.
운성은 냉소하며 대답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하지 않다네. 성지의 기반을 탐내는 것도 있지만, 내 짐작이 맞는다면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새로운 성주와 유일하게 남은 성녀일 걸세. 두 사람을 손아귀에 넣으면…….”
그 말에 기염은 눈앞이 밝아지면서 곧바로 세 세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랬군요. 그런데 그들의 욕심도 참 대단합니다.”
“이전까지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었네. 하지만 오늘 확실하게 알게 되었지. 우리 이끌려 온 세력들은 모두 장오와 조관의 바둑돌일 뿐일세. 휴… 역시나 문파가 너무 약소해서 일어난 일이지. 만약 믿음직한 버팀목이 있었으면, 우리 독오맹도 장오나 조관의 눈치를 봐 가면서 움직일 필요가 없잖겠는가.”
운성은 말하면서 무심코 운훤 쪽을 바라보았다. 운훤이 여전히 침묵을 지키자, 운성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운성은 딸과 구천성지의 새로운 성주 사이 관계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럼 우린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도 지금 떠나야 합니까?”
기염이 물었다.
“떠난다고? 자네 생각에 우리가 마음대로 떠날 수 있을 거 같은가?”
운성이 조소 섞인 미소를 지었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기염은 깜짝 놀라 낯빛이 급변했다.
“벌써 왔군. 나가서 구경이나 합세.”
운성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을 탐지하다가 말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천막에서 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급히 그를 따라 나섰다.
천막 밖,
떠나려고 하던 성라문과 설한루의 무인들이 장오, 조관, 무겁에게 막힌 채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장오가 음침한 얼굴빛으로 두 세력의 통솔자들과 몇 마디를 나누자, 곧바로 이변이 발생했다.
비명이 연이어 터지는 가운데, 장오와 조관은 두 세력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잠깐 사이에 백여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떨리는 눈동자로 눈앞의 비참한 광경을 바라보며 등골이 서늘해졌다.
장오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우렁차게 말했다.
“자신의 가문과 지인을 위해 복수하지 않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감히 구천성지에 굴복하려 하다니.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과 같이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이미 죽은 이들의 원수는 제가 대신 갚을 것입니다.”
조관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구천성지가 설칠 날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다음번 공격에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지금은 다들 먼저 돌아가서 푹 쉬십시오. 며칠 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두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그들에게 잘못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군. 허허!”
운성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운성처럼 형세 판단을 정확하게 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장오와 조관의 실력이 두려워 감히 대놓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장오와 조관이 성라문과 설한루를 대처하는 수단으로 보았을 때, 만약 정말 그들의 생각에 거스르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인파가 흩어지고, 누군가 와서 시체들을 거두었다.
천막으로 돌아온 운성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운훤은?”
방금 전까지 운훤은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심어도 자리에 없습니다. 아마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입니다.”
기염이 대답했다.
운성은 곧 한시름을 놓고 더는 묻지 않았다.
*
수풀의 어느 한 곳,
운훤과 완심어는 경계를 높이면서 어떤 청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벗어나 외진 곳으로 왔는데도, 청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여전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봐. 어느 세력의 제자고, 이름이 뭐야?”
완심어는 인내심이 부족한 편이라, 한참 걷다가 청년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하자 저도 모르게 소리쳐 물었다. 청년의 실력이 높지 않았기에, 그녀는 청년이 두 사람을 어찌할 거라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저는 전혼전의 제자로 이름은 류귀입니다.”
청년은 친근한 태도로 얼른 대답했다.
“전혼전이라고? 그런데 왜 우릴 불러냈어? 방금 전에 큰일이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완심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허허, 저를 따라가시면 알게 될 겁니다. 두 분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류귀가 웃으며 대답했다.
완심어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째 네 말을 들으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같지? 큰일이 있으면 너희들 전주에게 보고해야지, 이리 슬그머니 우리 둘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도야? 사실대로 말해.”
“전 아무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두 분을… 아닙니다. 이 낭자를 데려가려 한 겁니다. 당신은 스스로 따라온 거죠.”
“부탁을 받았다고? 누구한테 부탁받았어?”
운훤은 문득 가슴이 쿵쾅거리며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생겨 급히 물었다.
류귀는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말했다.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저도 말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도착합니다.”
운훤은 얼른 시선을 돌려 멀리 바라보았다. 동시에 신식도 펼쳐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도, 감지되는 것도 없었다.
“운훤, 난 왜 이놈이 의심스럽지? 앞에 뭔 함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우리 그냥 돌아가자.”
완심어가 운훤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운훤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뭐 그리 지레 겁을 먹어. 저 사람은 전혼전의 제자인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너를 데려가려 하지? 분명 말 못할 의도가 있는 거야. 혹시 네 미색을 탐할 수도 있잖아.”
“괜히 날 놀리지 마…….”
운훤은 얼른 옷자락을 꽁꽁 여몄다.
“두 분께서 그리 걱정된다면 저에게 손을 써 두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떤 위험에 부딪치든지 제 목숨은 두 분의 손에 쥐여져 있을 것입니다.”
류귀는 두 여인의 대화를 듣고서, 그녀들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제안했다.
“그래 좋아.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완심어는 곧바로 움직여 류귀의 온몸의 진원을 봉인했다. 류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운훤과 완심어는 긴장을 많이 풀게 되었다. 세 사람은 십몇 리를 꼬박 걸어서 근처의 작은 호수 옆에 이르렀다. 그제야 류귀는 숨을 내쉬고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그분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던 완심어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엉겁결에 소리쳤다. 운훤도 마찬가지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채가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로 멍하니 앞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