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808화 (807/853)

제 808장. 오랜만이에요

잔물결이 일고 있는, 바닥까지 보이는 깨끗한 호숫물에는 통통한 물고기 몇 마리가 노니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호숫가에 서 있던 양준이 웃는 낯으로 류귀를 따라온 운훤과 완심어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두 분, 오랜만이에요.”

완심어와 운훤은 말을 잃은 채, 순간 멍해졌다. 양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양준이 가까이 다가서자, 류귀는 읍하며 아부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주 대인, 전에는 제가 눈이 삐었나 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

류귀는 곧 긴장을 풀고서 공경하는 말투로 말했다.

“대인, 분부하신 대로 낭자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잘했어.”

양준은 친절하게 류귀를 다독였다.

류귀는 그의 친절함에 깜짝 놀라 얼른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보시다시피 전 대인께 어떤 악의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혼 낙인을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인의 소식을 누구에게도 절대 누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누설하면 날벼락을 맞아 죽을 겁니다.”

양준은 맹세를 다지는 류귀의 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신혼 낙인은 잠시 동안 돌려줄 수 없어. 하지만 말만 잘 들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제가 어찌 대인의 말씀을 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류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 양준이 성지를 떠나 수해밀림으로 갈 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양준의 길을 막았었다. 하지만 작전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오히려 양준에게 제압당해 상대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만약 조관이 알게 되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일이었다. 류귀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답답했다.

“말 잘 듣는 사람에게는 이득이 생기지.”

양준은 류귀의 표정을 지켜보면서 그의 마음속 찝찝함을 눈치채고, 얼른 단약 한 병을 던져주었다.

류귀는 약삭빠르게 단약을 받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더니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영급 단약이군요?”

“내가 시킨 일만 잘하면, 앞으로 이득이 더 많을 거야.”

양준은 잊지 않고 칭찬도 곁들였다.

“네, 네! 고맙습니다. 성주 대인!”

류귀는 감격해서 눈물을 쏟을 지경이었다. 신유 경지인 그는 전혼전에서 지위가 낮아 평소에 중시받지 못했다. 또한 문파에서는 수련용 단약도 기껏해야 매달 1인당 현급 단약 두세 알 정도를 나눠 주었다. 그런데 지금 양준을 위해 사소한 일을 했을 뿐인데, 단번에 영급 단약 한 병을 가지게 되다니, 뜻밖의 횡재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양준이 신혼 낙인을 가져가 자신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양준을 따르면 앞날이 창창할 거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양준은 류귀의 표정을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 류귀처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소인배는 조그마한 이익만 주어도 마음 놓고 부릴 수 있었다. 그는 완심어가 류귀에게 걸었던 봉인을 해제하고 손을 저었다.

“네가 할 일은 다 끝났으니까, 먼저 돌아가.”

“네, 성주 대인. 다음번에 제가 필요하면 꼭 다시 불러 주십시오.”

“그래. 다시 부를게.”

양준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류귀는 뒤돌아 떠나려다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운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낭자는 참 복이 많군요.”

그 말은 마치 양준과 친분이 있는 게, 운훤에게는 과분하다는 뜻만 같았다. 순간 운훤은 얼굴을 붉혔고, 완심어는 류귀를 노려보았다.

“네가 뭔 참견이야!”

류귀는 헛웃음을 짓고는 얼른 도망쳤다.

*

류귀가 떠난 다음에야, 양준은 웃는 얼굴로 눈앞의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몇 년 만에 만났지만, 두 분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말만 번지르르해서는! 나쁜 자식, 죽지 않았으면서 왜 여태껏 운훤에게 소식 한 번 전하지 않았어. 운훤이 너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슬퍼했는데.”

완심어는 콧방귀를 뀌더니 곧이어 호통을 쳤다.

“심어……!”

운훤은 가볍게 완심어를 부르고는 붉은 입술을 오므린 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양준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자가 너무 장대해져서 멀리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양준의 경지는 그녀보다 낮았다. 또한 그의 촌스러운 차림새는 마치 오지에서 금방 걸어 나온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 같았었다. 그러나 몇 년 못 본 사이, 그는 구천성지의 새 성주가 되었고, 경지도 그녀보다 훨씬 높았다. 지금 그녀는 신유 경지 정상이지만, 양준은 이미 초범 경지 2단계였다. 이런 경지 상의 차이는 아마 그녀가 몇십 년 동안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양준의 앞에 서는 순간, 운훤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작아지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운훤의 태도의 이상함을 감지한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운훤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절 못 알아본 건 아니죠?”

“제가 당신을 어떻게 잊겠어요?!”

운훤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왜 낯선 이를 보듯이 보는 건가요? 만약 안부를 전하지 않아 화가 났다면 사과할게요. 몇 년간 너무 바빴어요. 그리고 어떤 일은 남한테 알리고 싶지도 않았고요.”

양준은 코를 매만지며 말했다.

“흥, 네놈이 매정한 놈이란 걸 진작부터 짐작했어. 분명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고서 책임지기 싫어 도망친 거잖아.”

완심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데요? 그때 일은 그냥 사고였다고요.”

양준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사실 지난 몇 년간 그는 한 번도 운훤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운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안이나 하응상처럼 마음이 애달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때 만약 매요의 신식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그런 난감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역시 책임질 생각이 없었어.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완심어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운훤은 줄곧 침묵하다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어, 됐어, 그만 말해. 어떤 일이나 사람은 그냥 기억에 담아 두면 되는 거야. 그렇게 끝까지 따질 필요 없어.”

“너, 참 소탈하구나!”

완심어는 놀란 눈빛으로 운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전혼전의 제자를 시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죠? 그가 왜 당신 명령을 듣는 건가요?”

운훤은 의아한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보름 전에 그자와 충돌이 있었는데, 그때 그자의 몸에 손을 썼거든요. 때문에 전 의념으로 그자와 소통할 수 있어요. 오늘 그 자리에서 당신들을 보고, 그자에게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죠. 그런데 독오맹도 이번 일에 휘말린 건가요?”

“네. 성지의 전임 성녀가 우리 독오맹의 세력 범위까지 가서 제자들을 죽였거든요. 그리고 이내 파현부의 장오가 아버지를 이곳으로 불러들였어요. 구천성지에 찾아가서 직접 도리를 따지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와서 보니 그들은 성지와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이, 곧바로 맹공격을 퍼붓더군요.”

“당신들을 끌어들인 건, 그냥 쪽수를 늘려 담을 키우기 위해서일 거예요.”

“그런 거 같아요. 많은 세력들은 우리 독오맹과 같은 상황이에요.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두 개의 작은 세력이 떠나려다가 장오와 조관에게 전멸당했어요.”

“끝장을 보려는 모양이군요.”

“그 바람에 누구도 감히 여길 떠나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장오 일행은 다음번에는 반드시 구천성지를 초토화시킬 거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어요. 당신들… 막아 낼 수 있겠어요?”

“정말 맞붙어 싸우면, 결국 양쪽 다 피해가 클 거예요. 성지가 힘든 만큼, 당신들도 결코 평안하지 못할 거예요.”

“그럼 당신들은 어쩔 생각이에요? 어서 여길 떠나야죠. 이곳에 남아 있으면 너무 위험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한테 대응책이 다 있거든요. 그리고 당신들도 끼어들지 마세요.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독오맹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을 거예요.”

“그건 무슨 뜻인가요?”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어요. 아무튼 돌아가서 아버지를 설득해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며칠만 지나면 이곳에 대이변이 일어날 거예요.”

운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양준이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때, 완심어가 비꼬았다.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구천성지가 결계도 단단하고 고수도 몇 명 있다고는 하지만, 장오 일행이 불러들인 조력자 가운데서 입성 경지 고수의 인원수가 성지보다 배는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요? 감히 돌아가지 않고 성지와 맞선다면, 누구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양준이 냉소하며 말했다.

“넌 도저히 알 수가 없어…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구천성지의 새로운 성주가 됐는지 몰라?”

완심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각자 기연이 따로 있는 거죠. 전 성주 자리가 별로거든요.”

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완심어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양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생각하건대 어떤 남자든 구천성지의 성주 자리와 같은 기연을 만나게 되면 기뻐서 날뛰는 것이 당연했다. 누가 양준처럼 하찮게 여길 수가 있겠는가?

‘분명 이득을 다 챙기고서 잘난 척하는 걸 거야!’

완심어는 양준을 점점 더 경멸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이 이처럼 빨리 향상된 것도 모두 구천성지에서 양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구천성지에서 이처럼 양성해 준다면, 자신 역시도 양준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할 말이 더 있나요?”

운훤이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양준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그럼 우리 이만 먼저 가 볼게요.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의심받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귀띔에 감사드려요. 아버지께 잘 말해 볼 게요. …당신도 조심하세요. 당신이 예전보다 훨씬 강하고 지위도 높아졌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해결하기 힘든 일에는 너무 객기를 부리지 마세요.”

운훤은 복잡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당부했다.

“네, 알겠어요. 기억할 게요.”

양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린 이만 갈게요. 이번 고비를 넘기면, 나중에 독오성에 놀러 오세요.”

운훤은 생긋 웃어 보이고는 완심어와 함께 떠나갔다.

양준은 제자리에 서서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운훤이 이처럼 소탈하고 깔끔하게 떠나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는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달래 줘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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