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9장. 저를 따라오세요!
수풀 속,
돌아가는 길에 완심어는 여전히 화를 삭이지 못하고 툴툴거렸다.
“너 바보 아니야. 그놈을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스스로 떠날 수 있어?”
“그가 무사하면 됐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운훤은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저 이렇게 끝나도 상관없어?”
완심어는 괜히 운훤의 처지가 가슴 아팠다.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는 이미 내가 바라보기에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 되었어. 내가 억지로 그의 곁에 남으면, 그의 짐밖에 안 돼. 지금 떠나면 서로 간에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남길 수 있잖아. 그 정도면 충분해.”
“정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
완심어가 따져 물었다.
“후회할 게 뭐 있어?”
“됐다. 네 일이니까 알아서 해. 그런데 나중에라도 눈물바람으로 나한테 찾아와 오늘 기회를 잡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말하지 마.”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운훤은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 양준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결국 스쳐 지나는 인연일 뿐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양준은 진작 뒤쫓아왔어야 했다.
*
양준은 구천성지에 돌아오자마자 장로와 호법들을 불렀고, 곧이어 장로와 호법들이 도착했다.
“성주님, 철수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서휘가 공수하며 말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따라오세요!”
사람들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양준의 뒤를 따랐다.
얼마 안 되어, 그들은 거대한 청석 앞에 이르렀다. 청석에는 성릉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성릉은 구천성지 역대 성주들의 묘지로 선조들의 시체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이르자,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숙연해졌다.
“줄곧 제자들이 머무를 곳을 묻더니, 왜 지금은 묻지 않습니까?”
양준은 청석 앞에 서서,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곧이어 다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서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성주께서 이야기했던 곳이… 아니죠?”
“이곳을 제외하고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성릉은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절대 안 됩니다. 이곳은 역대 성주들께서 영면하신 곳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들이 편히 잠들지도 못하게 소란을 피울 수가 있겠습니까?”
서휘의 얼굴빛이 급변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안 될 것 없습니다.”
“성지에는 성주와 성녀를 제외하고, 누구도 성릉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은 다 사람이 정한 겁니다. 대장로!”
양준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아무튼 정말 안 됩니다. 저희가 성릉에 들어가면 조상들이 정해 준 규칙을 어기는 것이 되잖습니까? 나중에라도 어떻게 제자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 참 고집불통이시네요… 여러분들은요?”
양준은 서휘 때문에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장로, 호법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곤은 괴로운 표정을 하고서, 얼른 시선을 피했다. 맹천비와 라생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정월동은 얇은 입술을 벌름거리다가, 결국 말문을 닫고 말았다.
“대장로가 진부하고 고집불통인 건 사실이지만, 이 일에서만큼은 대장로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옥영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옥영 장로도 같은 생각인가요?”
양준은 놀란 눈빛으로 옥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옥영은 진지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은 이마를 문지르다가, 시선을 마지막 한 사람에게 돌렸다.
“안령아……!”
“나한테 묻지 마. 난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애란 말이야.”
안령아는 얼른 발뺌했다.
양준을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그녀가 자기편에 설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아예 자신을 무시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안 됩니까?”
양준이 다시 서휘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일은 성주께서 명령만 내리면, 제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지만 이 일만은…….”
서휘는 충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비장한 표정으로 우렁차게 말했다.
“됐습니다!”
서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준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럼 여러분은 스스로 살 길을 알아보세요. 이제 며칠만 지나면 장오 일행이 쳐들어올 것이고, 요족 대존도 요족 고수들을 거느리고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누가 살아남는지 보고 싶군요. 그런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양준은 말을 마치고 곧장 떠나려 했다.
서휘는 얼른 양준의 옷자락을 꽉 잡고서, 깜짝 놀라 물었다.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당신들은 여기서 죽기를 기다린다지만, 전 아직 창창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당연히 여기를 떠나야죠.”
양준은 당당하게 말했다.
“성주께서 떠나시면 성지는 어쩝니까?”
서휘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살 길을 마련해 주어도, 당신들은 가지 않으려고 하잖습니까? 아니면 저도 당신들과 함께 죽어야 하나요? 전 그렇게 고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양준은 입을 삐죽거리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서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젊어서 그런가? 일 처리에 기준이 없군. 전에는 그럴싸하게 성주 책임을 다하려 하더니, 어떻게 한순간에 마음이 이렇게 바뀌지?!’
“그리고… 성주로서 내린 결정을 누구도 따르려 하지 않는데, 제가 여기 남아서 뭘 하겠습니까? 혹여 이번 난관을 버텨내더라도, 나중엔 당신들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 성주가 될 것 같군요.”
양준이 코웃음을 쳤다.
“저희들이 어찌 감히!”
서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절 붙잡고 있는 겁니까?”
서휘는 난감한 나머지, 얼른 잡고 있던 양준의 옷자락을 놓았다.
“성주가 되었으면 성주다운 모습을 갖추어야죠. 어찌 이리도 무뢰한처럼 구는 겁니까? 보세요, 성주 때문에 대장로께서 어찌 할 줄을 모르잖습니까?”
옥영이 양준을 흘겨보며 가볍게 나무람 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서휘에게 말했다.
“대장로, 이제 어쩌면…….”
서휘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몰래 양준을 훑어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안했다.
“성주의 뜻은 성릉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조상들이 정해준 규칙을 어기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아니면 우리 손을 들어 다수결로 결정합시다. 성주를 제외하고 일곱 명이니 반 이상이 동의하면 성릉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아요.”
옥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성릉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합니까? 손을 들어주세요.”
양준이 질문하면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서휘만 얼른 손을 들었다. 나머지 장로, 호법들과 안령아는 서로 마주 보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네들……!”
서휘는 뜻밖의 결과에 깜짝 놀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척이나 상처받은 듯했다. 조상들의 규칙을 지키는 데에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능글맞긴……!”
옥영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 양준이 다른 방식으로 물었다면, 아마 결과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새로운 성주는 아직 젊은이였다. 누가 이런 상황에서 감히 그의 의견을 반박하겠는가? 혹시라도 양준이 정말 성지가 싫다고 훌쩍 떠나 버린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수 있단 말인가?
“대장로, 양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준이 웃으면서 공수했다.
서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이젠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성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리 불쾌한 표정을 짓지 마십시오. 만약 성지의 역대 성주님들께서 우리의 지금 상황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을 용서해 줄 겁니다.”
“그러기를 바라야죠.”
양준이 영혼 반지로 성릉의 문을 열자, 사람들은 양준을 따라 성릉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경건하고 엄숙했다. 곧이어 사람들은 해와 달, 별도 없고, 흰 구름과 푸른 하늘도 없는 성곽 크기의 소현계를 바라보며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가 성릉인가?”
옥영이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실망의 빛이 어렸다. 눈앞의 광경은 그녀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성릉은 푸른 산과 푸른 물이 있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향기로 가득 찬 안락한 곳이었다. 그러나 어둑한 이곳은 순간순간 음기가 불어 닥치고, 주변에 형광 빛이 반짝이는 것이 마치 저승에 온 것처럼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과 놀라움이 가득 찬 시선으로 성릉을 훑어보았다. 오직 대장로 서휘만이 주변에 끊임없이 읍하며 중얼거렸다. 자신들이 들어와 역대 성주들의 영면에 폐를 끼칠까 봐 두려운 듯했다.
“영기가 정말 짙군요.”
정월동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고, 눈동자에는 기쁨이 넘쳤다. 성지도 천지간의 기운이 짙지만, 성릉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었다. 전임 성주가 왜 성릉에서 폐관 수련하는 것을 즐겼는지 알 것 같았다.
“환경은 좋은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조용히 힘을 키우는 데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양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짙은 영기 때문에 깜짝 놀랐었습니다. 영기들이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음, 이 소현계는 다른 소현계보다 많이 작지만, 성지의 모든 제자들이 지내기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성주께서는 다른 소현계도 가 봤었나요?”
정월동이 눈을 반짝이며 놀란 시선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소현계에 대해서 다들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소현계에 드나든 적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소현계는 대륙과 떨어져 있는, 독립된 신비한 공간으로 은밀한 입구를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
양준은 싱긋 웃으며 안령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역대 성주님들의 관은요? 왜 하나도 안 보입니까? 많은 관들이 있어야 할 텐데요?”
서휘는 그제야 주위를 훑어보다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양준은 잠시 얼굴을 실룩이고는 넌지시 물었다.
“어떻게 이곳에 관이 있는 줄 아십니까?”
“있어야 마땅합니다. 역대 성주들께서는 모두 자신의 관을 짜서 이곳에 들여보냈거든요……. 게다가 이곳은 너무 깔끔하군요. 어떻게 아무것도 없을 수 있습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어딘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성릉은 마치 칼로 베어 낸 것처럼 반듯했다. 땅 위에는 먼지와 가루가 가득했으나, 동시에 기운이 휘몰아친 뒤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맞습니다. 역대 성주님들의 시체는 다 어디로 갔죠?”
사곤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성릉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모양입니다……. 음, 제가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양준이 얼른 대답했다.
‘서휘가 만약 내가 마신의 금빛 피를 흡수하다가 성릉 전체의 유골과 관들을 모조리 훼손시켰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