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3장. 거머리
“젊은 혈기에 방자한 거지……. 다만… 왠지 녀석의 말이 현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녀석이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어. 그래서 난 녀석을 죽일 생각이 없단다. 녀석이 자신의 말을 모두 실천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단 말이야.”
“대존께서는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채접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좀 많이 웃어야겠다. 웃는 모습이 뚱한 모습보다는 훨씬 예쁘구나.”
대존이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화제를 전환하며 한마디 했다.
채접은 얼굴이 상기되어 대존을 흘겨보았다.
“어찌 대존께서도 광사와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하! 아름다움은 원래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하거늘, 감춰서 뭘 하느냐? 이는 사는 것과 마찬가지야. 본성에 따라야지. 이 점에서는 녀석이 멋져 보여. 다만 녀석은 아직 어려서 조만간 손해 볼 거야.”
이렇게 말하는 대존의 얼굴에는 마치 양준이 손해 보는 광경을 보기라도 한 듯이 고소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에 채접은 저도 모르게 입을 오므리고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녀는 대존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
성지 밖,
양준은 몰래 식은땀을 닦았다. 요족과 힘을 합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돌이킬 수가 없었다. 양준에 대한 대존의 태도가 좋은 편이었지만, 양준은 그 정도의 고수와 관계를 이어가려면 반드시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존이 어느 순간 갑자기 태도를 바꿀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실력의 차이가 너무 현저했다.
요족 대존이 전임 성주와 친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쌍방이 대등한 관계였을 때 이야기다. 실력도 비등하기 때문에 우정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양준은 전임 성주의 후계자지만, 초범 경지 2단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대존의 눈에는 보잘것없을 터였다.
양준은 몰래 신식을 펼쳐 뒤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성지에 며칠 더 머물렀다가는 결코 떠날 수 없을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대존이 그를 강제로 남겨 자신을 위해 연단하게 할 것이 뻔했다.
양준은 몇십 리를 질주하고 나서야 점차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하지만 미처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의 낯빛이 급변하더니 고개를 돌려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렴풋한 안개 사이로 손수건 같은 모양의 비보가 그에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손수건이 회전하자, 그 위에 새겨진 짐승들은 마치 살아난 것처럼 일제히 포효하며 뛰쳐나왔다. 이윽고 손수건 뒤로 무지갯빛이 갑자기 나타났다. 날카로운 기운에 양준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구천신기 중 하나인 호천순을 펼쳤다.
순식간에 금빛이 반짝이는 방패가 만들어졌다. 손수건에서 뛰쳐나온 짐승들은 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호천순에 충돌하더니 모두 빛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뒤를 바싹 따라오던 무지갯빛도 호천순에 부딪쳐 맑은 소리를 내고는 날아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이와 동시에 호천순도 산산조각 났고, 양준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장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감히 제 발로 걸어 나오다니. 정말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조관은 무지갯빛을 손에 받아 쥐었다. 그것은 곧이어 아름다운 빛이 흐르는 장검으로 바뀌었다. 무겁은 두 사람의 뒤를 귀신처럼 따르면서 몰래 양준을 훑어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아무리 궁리를 해도 양준을 사로잡을 방도가 없어 일단 돌아간 뒤, 다시 장기적인 계획을 도모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준이 성지 안에서 뛰쳐나오지 않겠는가? 이에 세 사람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손잡고 단번에 양준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양준은 성지의 진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장오와 조관의 공격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제야 세 사람은 자신들이 양준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어디로 도망칠 거냐? 여긴 성지에서 백 리나 떨어진 곳인데. 이젠 요족 대존에게 구원을 요청하려고 해도 불가능해.”
조관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군요.”
양준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대가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양준은 요족이 나선 다음,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문파로 돌아가 다시는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모두 돌아간 게 확실했다. 다만 주모자 세 사람만 이곳에 죽 치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입성 경지였고,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입성 경지 2단계였다. 양준은 자신이 상대의 적수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의 경지와 수단으로는 기껏해야 입성 경지 1단계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었고, 게다가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입성 경지와 초범 경지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양준은 이 차이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양준을 사로잡으려 해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양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천국을 마다하고 기어코 지옥으로 찾아왔구나. 얌전히 두 손 들고 항복하거라. 고통은 덜 수 있을 테니까.”
장오는 차갑게 일갈했다. 동시에 그는 신식의 힘을 폭발시켜 양준이 투지를 잃게 하려 했다. 양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장오의 신식 공격을 그냥 선들바람으로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오의 낯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초범 경지 2단계밖에 안 되는 잔챙이인데, 마치 밑 빠진 항아리라도 된 듯이 그가 방출한 신식의 힘으로는 상대의 실력을 탐지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당신들 셋이서 날 사로잡을 수 있을 거 같나요? 그럼 날 잡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시도해 보든가?”
양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세 사람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녀석, 기어코 벌주를 마시겠다는 거구나! 지금이라도 우리와 손잡으면 너를 푸대접하지는 않을 것이야. 하지만 우리에게 사로잡히면,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자, 한번 절 잡아 보세요. 이번에 사로잡지 못하면, 나중에 저한테 멸문당할 거 각오하시고요.”
양준은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언짢음을 드러냈다. 세 사람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자 정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나중에 실력이 향상되면 기필코 저 세 사람을 죽여 버릴 거야.’
“너한테 그런 기회는 없을 거야!”
장오가 손을 펼치자, 손수건 같은 비보에 무궁무진한 흡인력이 생기며 양준이 서 있는 공간이 늪지처럼 끈적거리고 일그러졌다. 장오의 얼굴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표정이 걸렸다. 그는 양준이 제아무리 대단한 재주가 있어도 결국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양준은 차갑게 웃었다. 그는 눈동자에 음산한 빛을 띠고 제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이내 손수건의 흡인력이 갑자기 강해지면서 순간 커지더니 순식간에 양준에게 달려들어 그를 똘똘 감쌌다.
조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장오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손수건을 곧바로 회수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 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손수건에 감싸여 있어야 할 양준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진작 도망친 거 같은데요!”
무겁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제야 한마디 했다.
“도망쳤다고? 언제 도망쳤지?”
장오는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아마도 당신이 공격할 때쯤요… 껄껄! 구천신기…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네요. 신법이 보통 빠른 게 아닙니다!”
무겁이 고개를 돌려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장오와 조관은 그의 시선을 따라 서둘러 신식을 방출했다. 과연 십몇 리 떨어진 곳에서 양준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 순간, 양준은 예사롭지 않은 속도로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그 속도에 장오와 조관은 저도 모르게 낯빛이 급변했다. 그 속도는 입성 경지 고수의 속도와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녀석이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
“하늘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사로잡을 거야. 이렇게 내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장오는 이를 갈며 신형을 움찔하더니 곧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조관도 서둘러 따라나섰다.
무겁은 조용히 제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음기로 가득 찬 그의 얼굴에는 흥미진진한 표정이 떠오르더니, 곧이어 녹색 안개로 변해 번개같이 사라져 버렸다.
도망치는 동안 양준은 신식을 펼쳐 뒤에 따라오는 세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의 얼굴빛이 점점 더 음울해졌다. 그는 여태껏 이처럼 쫓겨본 적이 없었다. 비록 세 사람이 전혀 두렵지 않았지만,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질주하는 한편, 기회를 찾아 세 사람을 떨쳐버리려 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모두 입성 경지의 고수였기에, 확실하게 그들을 떨쳐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
시간이 흐르고, 양준도 이제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간혹 세 사람을 일시적으로 떨쳐버릴 수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세 사람은 다시 거머리처럼 그의 뒤에 들러붙어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무슨 수단을 이용했는지, 양준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맞히고 내내 쫓아왔다.
양준은 그제야 자신이 구천성지의 전승에 대한 세 사람의 집착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수명을 대가로 한, 강한 힘의 전승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이 그것을 탐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원래 양준은 천소종으로 돌아가려 했었다. 세 사람이 감히 천소종까지 뒤쫓아온다면 결국 그들에게는 죽음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계속해 날다 보니 결국 방향감을 잃어버렸고, 천소종이 도대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양준은 어쩔 수 없이 발이 닿는 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화가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