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5장. 용황 전승의 덕분이에요
“죽어라!”
손옥이 매섭게 일갈했다.
손옥의 목소리가 울리자, 이미 몇십 장 이상 도망치던 중년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중년 남자는 유한동천의 다른 네 명과 마찬가지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땅바닥으로 내리꽂히더니 목숨을 잃고 말았다.
초범 경지 무인 다섯 명이 모두 한순간에 죽었다. 손옥은 얼굴이 상기된 채 주변을 끊임없이 둘러보며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했어. 이렇게 연기하기만 하면 돼.”
그의 머릿속에서 양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옥은 순간 의욕이 넘쳐났다. 그는 온몸에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유한동천의 본거지로 날아가 쳐부수고 싶었다.
“녀석… 너… 네가 초범 경지 무인 다섯 명을 죽였어?”
능견은 은연중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덜덜 떨며 횡설수설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눈앞의 모든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2년 전만 해도, 손옥은 동급 경지의 무인도 이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단 몇 번만에 자신도 대적할 수 없는 강적 다섯 명을 죽여 버렸다.
능견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이건 모두 용황 전승 덕분이에요.”
손옥은 차마 사부인 능견을 속일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댔다.
능견은 순간 당황하다가 눈물을 쏟았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구나.”
“사부님! 쌍자각에 가지 말고 용봉부로 돌아가요. 종문을 도와 이번 위기를 해결해야죠.”
“그래… 다만 그쪽은 입성 경지가 두 명이나 있단다. 종주님께서 그중 한 명과 싸운다고 해도, 넌 아직…….”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님. 제가 알아서 할게요.”
손옥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무의식중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양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양준이 주변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무서울 게 없었다.
“좋다. 너하고 함께 가마. 종주님께는 내가 해명할게. 종문에 위험이 닥쳤는데, 종문의 제자로서 도망칠 수는 없지.”
능견은 제자 손옥 덕분에 투지가 생기고 기세가 드높아졌다. 이내 두 사람은 함께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용곡 삼십 리 밖의 하늘에서는 무인들이 떼를 지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 부상당하거나 죽어서 아래쪽으로 추락했다. 하늘 가득 피어오른 무공과 비보의 빛들이 전쟁터의 처참함을 비추고 있었다.
용봉부와 유한동천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원한을 쌓아온 상태였다. 이번에 유한동천은 만반의 준비를 했고, 입성 경지 고수도 한 명 더 많기에 당연히 먼저 승기를 잡게 되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반 시진이 채 안 돼, 용봉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진주와 여정의는 손을 잡고 입성 경지 두 사람과 싸우고 있었는데, 이미 상처를 가득 입은 상태였다.
“백경초(柏敬初), 엄집(嚴執). 오늘 우리 용봉부를 멸하지 못하면 조만간 너희들의 씨를 말려 버릴 것이다!”
진주가 매섭게 일갈했다. 그의 목소리는 우렛소리처럼 하늘가에 울려 퍼졌는데, 그 속에는 분노와 함께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여정의는 진주와 나란히 서서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아랫배 쪽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초범 경지 3단계밖에 안 되는 그녀는 이처럼 치열한 접전에서는 힘이 부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쌍수공법을 수련했기에, 싸울 때 협공하면 진주에게 힘을 더해 줄 수 있었다. 또한 그녀가 없으면, 진주는 혼자서입성 경지 고수 두 명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백경초와 엄집은 서로 마주 보더니 전쟁터에서 벗어났다. 이윽고 백경초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상, 네 소원대로 용봉부를 멸할 테니까. 다만 네가 우리의 싹을 없애는 건, 기회가 없을 거 같군.”
진주는 입가의 피를 닦아 내며 냉소했다.
“용황의 전승이 이미 나타났으니, 용황과 봉후가 조만간 다시 돌아와 용봉부를 위해 복수해 줄 거야.”
“용황의 전승? 용곡 그쪽 말이야? 시간을 보니, 내 부하들이 도착했을 거 같은데. 지금쯤 너희 용황의 후계자는 우리 손에 있을 거야. 그것도 걱정하지 마. 너희 용황의 후계자를 내가 잘 양성할 테니까.”
“그렇고 말고. 절대 홀대하지 않을 거야. 용황의 후계자는 반드시 봉후의 후계자를 찾아야 한다면서. 우리 유한동천에 미녀가 많으니까, 그 녀석은 아마 돌아올 생각도 안 할걸.”
유한동천의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순간, 진주의 낯빛이 급변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용곡 쪽에는 능견 한 사람만 남아서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실력으로는 고수들을 막아 내기가 어려웠다. 만약 정말 손옥이 저들의 손에 잡히게 되면, 용봉부는 더는 재기할 기회가 없었다.
“비열한 놈들!”
진주가 이를 갈며 욕을 퍼부었다.
엄집이 눈빛을 반짝이자, 강한 신식의 힘이 그의 식해에서 폭발하며 진주 옆에 서 있는 여정의에게 쏘아졌다.
진주는 두 사람의 말에 마음이 어지러워져 미처 방어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정의가 이미 엄집의 신식의 공격에 적중된 뒤였다. 여정의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커다란 힘에 의해 뒤쪽으로 몇십 장이나 날아갔다. 이윽고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아래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진주가 눈을 부릅뜨고서 여정의를 구하려는 순간, 백경초가 그를 막아서며 비웃었다.
“보자, 네 아내가 옆에 없으면, 무슨 재주로 나와 싸우나!”
용봉부의 쌍수공법은 무척이나 강했다. 수련한 쌍방이 손잡는 순간, 서로의 실력이 적지 않게 향상될 수 있었다. 때문에, 엄집은 기회를 찾아 일격에 여정의에게 중상을 입힌 것이었다. 그들은 여정의가 옆에 없는 진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경초는 말하는 동시에, 진주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엄집은 차가운 표정으로 둘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오히려 여정의 쪽으로 쫓아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일렁이는 것이, 이 기회에 아예 여정의를 죽이려는 모양이었다.
“비켜!”
여정의가 죽음에 직면하자, 진주는 대노하여 부들부채 모양의 비보를 펼쳤다. 광풍이 일면서 그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 같은 바람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진주, 넌 이제 끝났어. 그만 저항하고 항복하지. 두 눈으로 직접 네 여인이 어떻게 죽는지 보고, 함께 죽든가!”
백경초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구리 솥 모양의 비보를 꺼냈다. 구리 솥에서 현묘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일종의 충격파를 이루어 칼날 같은 바람의 공격을 막아냈다. 백경초는 끊임없이 말로 진주를 자극해, 그의 심신을 어지럽혔다.
진주가 잠깐 지체한 동안, 엄집은 이미 중상을 입은 여정의를 따라잡은 상태였다. 그는 잔인하게 웃으며 망설임없이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바로 그때, 은빛 나뭇잎 모양의 비보가 옆쪽에서 나타나더니 불현듯 크게 변해 여정의를 감쌌다.
엄집은 은빛 나뭇잎에 일장을 날렸지만, 어떤 효과도 없었다. 그리고 힘이 실체에 닿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은빛 나뭇잎이 빛을 반짝이자, 실체처럼 짙은 기운이 반동력으로 돌아와 순식간에 엄집을 멀리 튕겨 버렸다.
은빛 나뭇잎은 여정의를 감싸고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더니 용봉부 안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진주는 이 광경을 보고서야, 걱정과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떤 고수가 구해준 거지?’
진주는 신식을 방출해 살폈지만, 다른 입성 경지 고수가 이곳에 온 흔적은 없었다. 그가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여정의를 감싸 용봉부에 들어갔던 은빛 나뭇잎이 다시 날아 오더니, 은하로 변해 한 노인과 소년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은 은하의 물은 잔물결을 일으키며 예사롭지 않은 원기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내재돼 있었다.
백경초와 엄집은 깜짝 놀라 의문에 찬 눈초리로 노인과 소년을 훑어보았다. 갑자기 전쟁터에 뛰어든 두 사람의 경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노인은 초범 경지 1단계로 전투력이 전혀 없어 보였고, 소년은 생기가 넘쳤지만 신유 경지 7단계밖에 안 되어 노인보다도 못했다.
백경초와 엄집이 당연히 이런 두 사람을 안중에 둘 리 없었다. 다만 노인과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은하 같은 비보의 기운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것은 방금 전, 여정의를 위험에서 구한 비보였다. 여정의를 공격했던 엄집은 비보의 신비함과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성급 중품 정도는 되는 듯했다. 이 정도 등급의 비보는 엄집도 욕심내는 것이었다.
유한동천에도 성급 비보가 있었지만, 성급 하품으로 그와 백경초가 하나씩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비보들도 큰 대가를 치르고 남에게 손을 내밀어 겨우 제련한 것이었다. 두 비보를 제련하기 위해 유한동천의 밑천까지 끌어 쓰다 보니, 지금까지도 문파는 아직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과 소년은 정체가 뭐지? 경지는 높지 않은데 저리 강한 비보를 사용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군!’
백경초와 엄집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진주가 깜짝 놀라 엉겁결에 소리쳤다.
“손옥?”
그는 소년이 바로 2년 전 용곡에 들어갔던 제자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소년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용곡을 지키고 있던 능견이었다.
‘두 사람은 용곡에서 나왔으면 빨리 도망칠 것이지, 왜 굳이 이곳으로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