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6장. 용황의 위력
진주는 다급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원래부터 여정의의 부상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는데, 손옥이 이곳에 나타나자 당황한 나머지 주춤하고 말았다. 그와 대적하고 있던 백경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현묘한 수단을 펼쳐 진주를 제압했다.
“손옥? 용곡에 들어갔던 사람이 손옥이라고 하지 않았나… 녀석, 네가 맞냐?”
엄집은 눈알을 굴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물었다.
“그래, 바로 나다. 어쩔 건데?”
손옥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엄집은 그에 태도에 화내지 않고 오히려 눈을 빛내며 크게 웃었다.
“하하! 이거 힘들게 찾아다닐 필요도 없겠군. 보낸 애들이 너를 찾지 못하고 헤맬까 봐 걱정했는데, 네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좋아, 좋았어.”
“용곡에 왔던 초범 경지 다섯 명을 말하는 거야?”
손옥은 가볍게 냉소하며 말했다.
“네놈이 어떻게 아느냐?”
엄집은 순간 실눈을 떴다. 은연중에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고수를 상대하면서, 소년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대신 소년의 옆에 서 있는 초범 경지 1단계의 노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의 위압감을 견뎌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알지. 그들은… 모두 내 손에 죽었거든!”
손옥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손에 죽었다고?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지 그래. 네가 그리 말하면, 내가 믿을 줄 알아?”
그가 용곡으로 보낸 초범 경지 다섯 명의 무인은 모두 실력이 높았다. 그런데 어떻게 신유 경지 7단계밖에 안 되는 소년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비보가 신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집은 손옥이 초범 경지 다섯 명을 죽일 재주는 없다고 생각했다.
“믿든지 말든지. 다음은 네 차례니까.”
손옥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날 화나게 하지 마. 내가 널 죽일 수는 없지만, 죽을 만큼 고생하게 할 수는 있으니까. 내가 공격하기 전에 얌전하게 스스로 내 쪽으로 걸어와.”
이쪽의 대화가 한창 백경초와 전투 중이던 진주의 귀에도 들려왔다. 그는 순간 화가 치밀어 매섭게 소리쳤다.
“능견, 노망났어! 어찌 손옥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는가?”
그는 전력을 다해도 백경초 한 사람밖에 잡아둘 수 없었다. 그럼 엄집은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데, 손옥이 그의 앞에 나타나면 무슨 결과가 기다리고 있겠는가? 손옥은 용봉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능견은 너무 일의 경중을 모르는군!’
능견은 쩔쩔매며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손옥이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종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돌아온 건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한동천에서 감히 우리 용봉부를 공격하다니요. 반드시 그자들이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 우리 용봉부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줘야죠.”
그러고는 매서운 눈초리로 다시 엄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친네, 네가 바로 그 첫 번째야.”
손옥은 젊은 혈기와 양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그의 말이 울려 퍼지자, 한창 싸우고 있던 무인들은 모두 잠깐 멈추고서 일제히 고개를 돌려 손옥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유한동천의 무인들은 크게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 반면 용봉부의 무인들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들 손옥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엄집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제자리에 서서 말했다.
“네가 나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좀 보자꾸나. 내가 이곳에 서서 꼼짝하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이 같이 공격해 봐.”
“하하! 방금 전 초범 경지 다섯 명도 그런 반응을 보였지. 그리고… 그들은 모두 죽었거든…….”
손옥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손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렁찬 용의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금빛이 폭발하면서 하늘가를 밝혔다. 입성 경지 이하의 무인들은 순간 모두 실명했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들이닥치며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분신쇄골이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옥을 마주하고 있던 엄집은 느긋한 모습을 하고 있다가 순간 낯빛이 바뀌었다. 그는 눈부신 금빛 사이로 몸집이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에게 정면으로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에 지체하지 않고 얼른 힘을 모아 앞쪽을 보호했다. 동시에 영급 중품의 방어 비보를 펼쳤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죽임을 당할 것만 같았다.
쿠웅-
대지가 흔들거리는 가운데, 횡포한 기운의 파동이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치면서 날씨가 급변했다.
엄집은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거꾸로 나가떨어졌다. 순간, 그는 방대한 힘이 정면에서 자신과 충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앞쪽을 보호하던 힘이 순식간에 흩어졌고, 영급 중품 비보가 찢기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비보가 영성을 잃은 듯했다.
‘도대체 뭐지? 일격에 내 영급 중품 방어 비보를 훼손시키다니?’
금빛이 점차 평온해졌다. 엄집은 그제야 도대체 자신을 공격한 게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얼이 나간 채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하늘에는 몇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금룡이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경멸과 무시가 가득 서려 있었다. 금룡의 눈빛에 엄집은 순간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금룡은 금빛이 번쩍이는 비늘로 온몸이 뒤덮여 있어, 위엄 있고 단단해 보였다. 어떤 공격으로도 금룡을 상처 입히지 못할 것 같았다. 또한 용의 발톱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는데, 차가운 빛이 번뜩이는 것이 아무리 등급이 높은 비보도 손쉽게 찢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원기가 금룡으로 변했나?”
엄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자신의 짐작을 부정했다. 눈앞의 금룡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 진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것은 진정한 용이라는 얘기였다. 요족 중의 제왕으로 전설 속의 9급까지 진화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존재였다.
엄집은 일찍이 요족 중에는 대존이 몇 명 있는데, 이들은 본체가 모두 8급 절정에 달하는 요수이며, 그중 한두 명은 몸속에 진짜 용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전해 들었었다. 요족에게 있어, 용의 혈통은 가장 고귀한 혈통이었다. 그리고 용의 혈통인 요족은 입성 경지 3단계까지 수련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엄집의 눈앞에 진짜 용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전설 속 9급에 달하는 요황(妖皇)으로 이 세상 최절정의 힘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엄집은 금룡의 몸속에서 발산되는 뜨거운 원기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엄집과 마찬가지로 손옥과 함께 온 능견도 넋을 잃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혼탁한 두 눈을 연신 비볐다. 환각이 나타난 게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손옥은 영문도 모른 채 흥분했고, 눈동자에는 온통 숭배하는 빛이 역력했다.
“용황의 위력이다!”
진주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그는 넋을 잃고 금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이런 광경을 볼 날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손옥이 이 정도로 강해질 줄은 더욱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2년 전, 손옥은 진원 경지 7단계 수준의 전혀 이름 없는 제자였다. 비록 그가 용황의 전승을 얻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진주는 손옥이 용곡에서 무사히 나오더라도 용봉부에서 전력을 다해 몇십 년을 양성해야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손옥은 출관하자마자 곧바로 입성 경지 고수와 맞대결을 하면서 용황의 위력을 재현했다.
진주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선조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만큼, 지금 당장 목숨을 잃더라도 가치 있는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백경초도 더는 진주와 싸울 마음이 없어, 그와 함께 하늘에서 멍하니 금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싸우고 있던 무인들 모두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눈앞의 놀라운 광경을 구경했다. 순식간에 공포감과 불안감이 장내를 휩쓸면서, 모든 유한동천의 무인들은 얼음 구멍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손옥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양준의 귀띔에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낯빛을 바로 하고는, 엄집에게 날카롭게 일갈했다.
“오늘 이 자리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용의 울부짖는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지고, 몇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금빛으로 변하더니 엄집을 향해 덮쳤다.
이때, 엄집의 손에 장검이 나타났다. 그의 성급 하품 비보인 현빙검(玄氷劍)이었다.
현빙검을 꺼내들자 엄집의 기세가 향상되었고, 그의 온몸에서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발산되었다. 현빙검에도 한기가 맴돌면서 그 속에 숨겨진 현묘함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금룡이 덮치기 전에, 엄집은 자신의 현빙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장검은 순식간에 몇만 개로 변했고 검광이 일렁이며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엄집의 몸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연신 뿜어져 나오자, 사방 백 장 이내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성급 하품의 장검은 드높은 기세로 금룡에게 달려들었다. 체형이 거대한 금룡은 피하지 않고 꿋꿋이 정면으로 충돌해 왔다.
치지직-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수많은 공격이 금룡의 금빛 비늘에 떨어지면서 밝은 불꽃이 일었다. 뜨거운 기운이 정면으로 덮치자, 현빙검의 위력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다가 곧이어 말끔하게 증발되어 버렸다.
엄집은 깜짝 놀라 공포감에 휩싸였다.
유한동천에서는 냉성 공법과 무공을 주로 수련했기에, 몸속에 뜨거운 원기가 내재되어 있는 용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천적이었다. 때문에, 현빙검에 내재된 위력은 평소의 8할도 발휘되지 않았다. 엄집은 뜨거운 기운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수단들을 섣불리 사용할 수 없었다.
금룡이 눈앞에서 커다란 입을 쩍 벌리자, 엄집은 비명을 지르며 장검을 흔들었다. 장검은 빛을 겹겹이 내뿜었고, 빛들은 얼음 사슬처럼 금룡에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