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0장. 봉서호
봉소는 용곡에서 멀지 않았다. 양준은 원래 봉소가 어떤 곳일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봉소는 별다를 게 없는 밀림이었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밀림은 마치 날개를 펴고 나는 봉황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밀림에는 전부 오동나무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는 오동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었다.
봉소는 용곡과 달랐다. 용곡은 용황 외에는 누구도 내부에 접근할 수 없었다. 외부인이 접근하는 순간, 무형의 힘에 밀려 나갔다. 하지만 봉소는 어떤 신비한 점도 없었다. 평범한 밀림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용봉부의 제자들 중에는 이곳에 와서 수련하거나 밀회를 즐기는 이들도 있었다.
용황이 나타난 뒤로, 진주는 봉소를 금지 구역으로 정하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손옥이 봉소를 살펴보겠다고 진주에게 말하자, 진주는 손옥이 봉후를 찾기 위해 준비하는 줄 알고 무척 기뻐했다. 그는 손옥을 보호하기 위해 고수들을 호위로 붙여주었다.
밀림 변두리에 이르자, 손옥은 구실을 대고 초범 경지 고수들을 모두 밖에 남겨 두고 홀로 봉소로 들어가려 했다. 지금의 손옥은 신분과 지위가 있었기에, 초범 경지 고수들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몇 사람은 모두 용황이 엄집을 죽이는 광경을 직접 지켜봤었기에, 손옥의 안전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손옥이 밀림에 들어서서 얼마 걷지 않았는데, 옆에서 그림자가 번쩍 하더니 양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봉소야?”
양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손옥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봉소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양준은 귀담아들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한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봉소의 어느 한 곳에서 은연중에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의 등 쪽 금룡 무늬는 그 부름에 빠르게 꿈틀거렸고, 그 때문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손옥은 얌전히 양준의 뒤를 바싹 따랐다.
두 사람은 앞으로 한참을 걸어갔다. 이때, 문득 앞쪽이 탁 트이면서, 두 사람의 눈앞에는 그리 크지 않은 호수가 나타났다. 잔물결이 이는 호숫물은 맑았지만 이상하게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호수 면에 마치 신비한 기운이 뒤덮여 있는 듯했다.
양준은 호숫가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호수에 보일 듯 말 듯한 봉황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봉서호(鳳栖湖)예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봉황 그림자 때문에 봉서호라고 부르죠. 지난 몇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이 호수 밑에 내려가서 탐지해 보았지만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간혹 어떤 곳은 특정한 사람이 왔을 때에만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특정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실력이 아무리 강해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에 이르자, 등 쪽 금룡 무늬가 점점 더 빨리 움직이면서 곧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양준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금룡 무늬를 억제하지 않았다.
잠시 뒤, 용의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금룡 무늬는 실체로 변해 튀어나갔다. 다만, 지금의 금룡은 엄집과 접전을 벌일 때와는 체형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지금 나타난 금룡은 일 장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였다.
금룡은 하늘에서 몇 바퀴를 회전하고 나서 봉서호로 훌쩍 뛰어들었다. 물결이 출렁이더니 금룡은 금방 종적을 감추었다.
손옥은 들뜬 표정으로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용봉부 전체에서 오직 그만이 용황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진정한 용황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곧 봉후의 전승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용봉부의 제자로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룡이 봉서호로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어, 호수 전체가 불안정해지더니 마치 아래쪽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는 것처럼 호숫물이 천천히 들끓기 시작했다. 동시에 잔물결이 퍼져 나가면서 봉서호에 비친 봉황 그림자가 일렁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봉황이 날갯짓을 하면서 당장 하늘로 치솟아 오를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이때, 형광 빛들이 사방팔방에서 날아들더니 하나하나 모두 봉서호로 떨어졌다. 형광 빛마다 현묘한 기운이 내재돼 있었다.
양준과 손옥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광 빛들은 봉소 내 오동나무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오는 길에 양준은 오동나무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봉소 전체에서 수많은 형광 빛이 마치 반딧불처럼 나타나더니 사방팔방에서 봉서호 쪽으로 모여들었다.
봉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초범 경지 고수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용봉부 안에서 중요한 사무 처리를 하던 진주도 급히 뛰쳐나와 봉소 쪽을 바라보고는 하늘을 우러러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용황의 후계자가 이미 나타났고, 오늘 봉소에서도 이상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제 봉후도 조만간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진주는 사무 처리도 뒤로 미루고 몸을 날려 봉소 쪽으로 날아갔다. 용봉부에 있던 다른 고수들도 다들 진주의 뒤를 따라 봉소로 날아가 봉후의 전승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려고 했다.
양준은 봉서호 옆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손옥은 눈빛을 반짝이며 사방의 형광 빛이 호수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천지간의 기운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와 동시에 호수 밑에서 짙은 위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날아든 형광 빛이 모두 봉서호에 떨어진 다음, 호수에 일렁이던 봉황의 그림자가 마치 살아난 것처럼 날갯짓을 더욱 세차게 했다. 곧이어 호수의 물이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물보라 속에서 금룡과 짙은 남색의 빙황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우렁찬 용의 포효와 청아한 봉황의 울음소리가 천지간에 멀리 울려 퍼졌다.
양준은 씩 웃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용과 마찬가지로 전설 속에서 봉황은 요족의 황후로 9급까지 진화할 수 있었다. 지금 양준의 눈앞에는 용과 봉황이 어우러져 노니는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금룡은 끊임없이 하늘을 날았고, 빙황은 조용히 호수 면에 떠 있었다. 빙황의 밝은 눈동자에는 영리한 빛이 서려 있었는데, 마치 양준을 훑어보는 것만 같았다.
잠시 뒤, 빙황은 만족스러운 듯이 가볍게 한 번 울었다. 그러고는 몸을 움찔해 형광 빛으로 변하더니 사방으로 흩어져 모습을 감추었다. 봉서호는 다시금 평온해졌다. 튀어나갔던 금룡도 다시 양준의 몸속으로 돌아왔다.
양준은 눈을 감고 이 모든 것을 감지하면서 감정이 흔들렸다. 이는 소안의 전승이었다. 다만 그녀는 지금 빙종에 있었다. 나중에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 와야만 이곳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양준이 꼼짝 않고 서 있자, 손옥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양준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천천히 눈을 뜨더니 말했다.
“손옥, 부탁할 일이 있어.”
손옥은 표정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분부하십시오.”
“봉소를 잘 지켜 줘.”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도 이곳을 훼손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 믿을게.”
손옥은 빙그레 웃더니 한마디 물었다.
“이곳의 전승을 누군가에게 남겨 주려고 그러시는 거죠?”
양준은 놀란 얼굴로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방금 전, 선배의 기운이 부드럽게 변했거든요. 누군가를 떠올린 게 분명해 보였어요… 그분은 선배의 동반자 맞죠?”
“눈썰미가 좋네. 이곳의 일은 마쳤으니까, 나도 이젠 떠나야겠어.”
“네? 선배, 지금 당장 떠나려고요?”
손옥은 저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오늘날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양준의 덕분이었다. 만약 2년 전 기연이 없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기껏해야 신유 경지 1단계 수준일 것이고, 자질도 지금처럼 출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옥의 원래 자질로는 평생 수련해야 초범 경지를 돌파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입성 경지조차도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해준 양준에게 감격해 마지않았다.
“이젠 가 봐야 해. 아직 할 일이 많거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꼭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수련에 매진해 선배의 가르침에 보답할게요.”
손옥은 진지한 표정으로 공수했다.
양준은 미소를 짓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움찔하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손옥은 양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한참을 침울해 있다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봉소 밖에 이른 그는 눈앞의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용봉부의 모든 고수들이 출동해 진주와 함께 봉소 쪽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손옥이 안쪽에서 나오자, 그들은 모두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종주님, 사부님……!”
손옥은 공수하며 예를 올렸다.
진주는 얼른 답례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봉후의 전승도 희망이 보이는 겁니까?”
방금 전, 그들도 봉소 안의 광경을 지켜보았기에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손옥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조금요.”
“그 말씀은?”
진주는 크게 기뻐했다.
“어, 그게 말이에요……. 용봉부에는 아직 봉후의 전승에 적합한 제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적절한 시기가 안 되었나 봅니다.”
손옥은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서둘러 대답했다.
“네? 그럼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진주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물었다.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찾아오겠죠. 저도 정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
손옥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고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으나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용봉부의 고수들이 모두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의 대답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는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느긋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저는 폐관 수련을 해야겠습니다. 봉후의 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네.”
진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유한동천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건 종주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손옥은 연신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큰일을 내가 어떻게 아무렇게나 결정한단 말인가?’
진주는 그의 말에 더는 묻지 않았다. 그 후 용봉부에 돌아온 진주는 가장 좋은 물자와 자원을 준비해, 손옥이 폐관 수련을 할 수 있도록 금지 구역으로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