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1장. 여전하군
양준은 숨 쉴 새도 없이 질주하며 덤덤한 마음으로 산과 강들을 지나쳤다.
원래는 빙종에 찾아가 소안을 데리고 용봉부에 가서 봉후의 전승을 이어받게 할 계획이었지만, 현재 소안의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짜고짜 찾아갔다가 그녀가 아직까지 폐관 수련 중일 경우, 헛걸음을 하고 시간만 낭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양준은 천소종으로 돌아가지 않은 지 몇 년이나 되었다. 사숙들과 부운성에서 작별한 뒤로 벌써 5~6년이란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때문에, 천소종에 돌아가 사숙들과 초능소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통현대륙에 건너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양준은 왠지 이곳에 별다른 감정이나 귀속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천소종도 능소각의 창시자가 있는 곳 정도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사숙들이 아무리 잘 대해 주어도 천소종에는 능소각만큼의 유대감이나 친근감이 생기지 않았다. 통현대륙은 그에게 있어서 스쳐 지나는 인연일 뿐이었다. 중도와 능소각이야말로 그의 뿌리였다. 그쪽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양준은 머릿속으로 익숙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내내 질주했다.
당시 중도를 떠날 때만 해도, 그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시기가 되면 다들 이곳으로 데려오겠다고 말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 섣부른 약속이었다. 그는 아직 중도 쪽으로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다. 공간을 찢는 수단을 익혔다고는 하나, 그 수단으로는 몇백 리 정도밖에 이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수단도 두세 번을 연이어 사용하고 나면 신식의 힘이 바닥났다.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라면 어떤 위험도 없이 여유 있게 회복할 수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었다.
양준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순간 눈앞이 밝아졌다. 문득 초능소나 수신전의 수령도 통현대륙에서 중도 쪽으로 건너갔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던 것이다. 두 사람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전에, 양준은 먼저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켜야 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힘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 쪽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도 그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고마 일족은 매우 괜찮은 힘이었다. 구천성지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용봉부는 잠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용봉부는 소안을 만난 후에 다시 의논해 볼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아 놓아야 했다.
양준은 어느새 몇만 리를 날고 있었다. 또한 풍뢰우익을 펼친 채, 거기에 구천성지의 일천영까지 펼치자 거의 번개와 같은 속도가 되었다. 그리고 가끔 도시를 지나칠 때면, 그는 내려가서 방향을 알아보았다.
보름이 지나자, 양준의 눈앞에 우뚝 솟은 설산이 끝없이 펼쳐졌다. 동시에 옅은 한기가 정면으로 불어 닥쳤다. 천소종은 설산에서 천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느새 천소종에 가까워진 듯했다.
이틀 뒤, 양준은 드디어 천소종으로 돌아왔다.
백 개의 산에 둘러싸인 산골짜기에서 많은 무인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양준은 씩 웃고는 곧바로 그중 한 산봉우리로 날아갔다.
이윽고 그는 산봉우리의 어느 동굴 입구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기수봉이었다. 이곳은 비우가 홀로 지내는 산봉우리로, 양준은 전에 이곳에 머물렀었다.
양준은 동굴에 들어서서 고불고불한 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아직 안쪽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짙은 술 향기가 풍겨 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우 사숙은 여전하군. 도대체 얼마나 마셔야 이런 짙은 술 향기가 날까!’
이때, 귓가에 ‘촤르륵’ 소리가 들려오더니 앞쪽에서 물의 장막이 밀려왔다. 물의 장막에는 짙은 술 기운이 내재돼 있었는데, 양준은 그 기운을 코로 흡입하는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얼른 진원을 돌려 술에 취할 것 같은 느낌을 쫓아냈다.
순간, 물의 장막 뒤에서 손이 뻗어 나오더니 정확하게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양준은 반항하지 않고 그 손이 자신을 잡게 내버려 두고, 손을 휘저어 눈앞의 물의 장막을 가르고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앞쪽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사숙!”
그의 목소리를 듣자, 물의 장막 뒤에 있던 사람은 잠깐 흠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손의 힘을 풀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대의 눈동자에는 짙은 기쁨이 피어올랐고, 발그스레한 얼굴은 아름다운 빛을 뿜었다.
하지만 양준의 미소는 순간 굳어졌고, 얼른 시선을 돌렸다.
비우는 목욕하다가 그의 기척에 놀라서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몸에 얇은 실내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한 손으로 옷이 흘러내리지 않게 추스르고, 다른 한 손으로 그를 잡고 있었다.
‘시간대를 잘못 잡았네!’
양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기수봉에는 평소 창염, 역완, 비전을 제외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그 세 사람도 사전에 통지하고 오지, 무작정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난 또 누구라고? 네 녀석이었어!”
비우는 키득거리면서 양준을 놓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확 끌어당겨 그의 목을 조였다.
“사질, 몇 년간 돌아오지 않다가, 오자마자 이런 짓거리를 하다니. 이건 아니잖아?”
양준은 무언가가 자신의 견갑골에 닿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얼른 비우의 팔을 다독이며 말했다.
“먼저 절 놓아주고 말하면 안 될까요?”
“나는 괜찮은데, 넌 뭐가 무서워? 사숙이 널 홀랑 먹어 버릴까 봐 두려워?”
비우는 계속해 농을 던지며 양준을 놓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목을 더 꽉 조였다.
“무슨 그런 농담을…….”
양준은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비우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양준을 풀어주었다. 그녀는 양준을 노려보더니 이를 가볍게 악물며 말했다.
“나쁜 자식, 실컷 잘 돌아다녔어? 이제 돌아올 생각이 들던?”
양준은 얼른 옆쪽의 돌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시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앞만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옷을 제대로 입은 다음,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사숙 때문에 제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잠깐 앉아 있어. 옷을 제대로 입고 나와서 혼내 줄 거야. 다시 한번 아무 말없이 사라져 봐, 하늘 끝까지 쫓아가 흠씬 두들겨 줄 거야.”
비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방 모습을 감추었다.
양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우는 정말이지 사숙다운 모습이 전혀 없어서 상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참을 기다리자, 비우가 옷을 단정하게 입고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방그레 웃으며 양준의 맞은편에 앉아서는 형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허허! 몇 년 만에 보는데 사숙은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군요. 방금 전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보니, 무척 젊어진 것 같아요. 소녀 같은데요!”
“나쁜 놈, 말만 번지르르하지. 그 말에 내가 넘어갈 거 같아!”
비우는 발끈하며 한마디 했지만, 마음속에 몇 년간 담아 두었던 화는 저도 모르게 사르르 녹아 버렸다.
지난 몇 년간 그녀는 줄곧 양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아무 소식도 없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양준은 외진 곳에서 왔고, 실력도 높지 않았다. 당시 부운성에 갈 때만 해도 그는 신유 경지 정상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세 사숙도 모두 그를 걱정했다. 그들은 모두 양준이 무사하게 돌아오기만 하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양준을 보게 되자, 비우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내내 마음속을 짓누르던 큰 돌덩이를 내려놓은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양준을 한참이나 훑어보던 비우의 표정이 순간 진중해졌다. 그녀는 신식으로 양준의 온몸을 탐지하고 난 뒤 눈동자에 이채가 반짝였다. 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너 지금 경지가 어떻게 돼?”
그녀는 양준의 경지를 탐지해 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초범 경지 3단계예요!”
“진짜야?”
비우는 벌떡 일어서더니 순식간에 양준의 눈앞으로 다가와 다짜고짜 그의 손을 잡더니 그 위에 자신의 손가락을 얹고 진원을 돌려 그의 몸속을 자세히 탐지했다. 동시에 긴장한 듯한 말투로 물었다.
“너 혹시 속성 공법 같은 걸 수련한 건 아니지?”
양준은 실소하고 말았다.
“아니요. 설령 그런 공법이 있다고 해도, 처음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초범 경지에 오른 다음에도 효력이 있을 수 있나요?”
그의 말에 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사실 세상에는 수많은 속성 공법들이 있었다. 힘에 눈이 먼 무인들은 이런 속성 공법을 수련하다가, 뒤로 갈수록 오히려 남들보다 뒤처지고 심지어 성장이 멈출 수도 있었다. 속성 공법에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폐단이 있었다.
자질이 충분하다면 초범 경지 이전까지는 통현대륙의 많은 세력과 자원, 공법으로 무인을 양성하는 게 매우 쉬웠다. 수령 또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신유 경지 정상에 이르렀었다. 그 나이에, 그 정도 경지면 중도 쪽에서는 ‘괴물’이었다. 애당초 양준도 그녀를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통현대륙에서는 그 정도는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초범 경지부터는 양성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작은 경지 하나를 돌파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고, 어떤 이들은 작은 경지 하나를 돌파하는 데 몇십 년 내지 평생을 공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비우의 자질은 출중한 편이었지만, 그녀 또한 신유 경지 정상에서 초범 경지 3단계까지 진급하는 데 족히 6~70년이 걸렸다. 그리고 초범 경지 3단계에서 또 3~40년을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계산하면 비우는 지금 백 세를 넘긴 고령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력이 강하고 주안술에 일가견이 있었기에 겉으로는 소녀처럼 보였다. 또한 그녀의 성격도 소녀 같았다.
양준은 부운성에 갈 때만 해도 신유 경지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5~6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초범 경지 3단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성장 속도는 너무나 놀라웠다. 때문에, 비우는 양준이 혹시라도 사도로 빠진 것이 아닐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