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0장. 기대를 저버리지 않다
얼마 안 되어, 일행은 마신성으로 돌아왔다. 양준은 멀리서 많은 고마 일족들이 성곽 앞에 모여서 그들을 기웃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파 속에서 한 소녀가 손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양준! 양준!”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그쪽을 바라보던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완아는 애당초 그가 이곳에 잡혀 들어왔을 때, 그를 시중들던 사람으로 려용의 시녀이기도 했다.
“계집애가 너무 방자하군! 주인, 쟤는 무시해도 됩니다. 돌아가서 제가 단단히 혼내줄 겁니다. 신분의 차이를 제대로 알려주겠습니다.”
려용은 이를 갈며 완아를 욕하고는 다시 양준에게 말했다.
양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도 말끝마다 주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편한 대로 부르세요. 제가 불편합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당신들은 애당초 저를 어떻게 불렀습니까?”
려용, 한비, 화묵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저도 모르게 모두 얼굴을 붉혔다. 양준이 처음 잡혀 들어왔을 때, 세 사람은 모두 그를 ‘인간 녀석, 비열한 인간, 나쁜 녀석 등등’으로 불렀었다. 지금 어떻게 그런 호칭으로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마신성에 들어서자, 완아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는 먼저 지배자들에게 예를 올린 다음, 양준의 옆으로 가더니 들뜬 표정으로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마치 양준이 떠난 뒤에 한 번도 말문을 연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려용은 실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양준이 불쾌한 표정을 보이지 않자, 그녀도 따로 완아를 질책하지 않았다.
완아는 한참을 말하다가, 문득 무겁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이 사람인지 귀신인지도 모를 작자는 누구야? 왜 이런 사람도 함께 왔어?”
무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려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하 밀실을 사용해야겠습니다. 기껏해야 이틀 내지 사흘이면 될 겁니다. 밖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무겁에게 물어보십시오. 무겁이 당신들에게 상황을 말해 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려용 일행은 엄숙한 낯빛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 대인……! 제가 이곳에 있어도… 위험하지는 않겠죠?”
무겁은 급히 양준에게 다가가더니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안절부절못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안에 떠는 그의 모습에 양준은 실소하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마족 같죠?”
무겁이 의문이 가득 찬 표정으로 물었다.
“이들은 마족입니다. 게다가 보통 마족이 아니에요. 시간이 많지 않아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양준은 웃으며 무겁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곧 자리를 떴다. 무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려용 일행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은 양준이 방금 전에 한 말을 떠올리고는, 모두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 2~3일 뒤면, 수천 년 동안 고마 일족을 봉인하고 있던 속박이 해제될 수 있어. 우리는 다시금 오매불망 그리던 대지를 밟을 수 있고, 해와 달, 별 그리고 다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을 거야.’
고마 일족 지배자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양준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려 대인,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묵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래. 때가 된 것 같군.”
려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쁜 표정으로 무겁을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겁이라고 했죠?”
“네.”
무겁의 표정은 당황함과 불안감으로 뒤섞여 있었다. 얼마 전에 그와 양준은 마족의 마장에게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소현계로 도망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입성 경지의 마족 고수 다섯 명이 서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호랑이 굴을 벗어나자마자 늑대 굴에 떨어진 것 같은 비애를 느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의 사람들은 그에게 악의가 없었고, 양준과도 두터운 관계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주인의 친구면 남이 아니죠. 저를 따라오세요. 저희도 밖의 상황에 대해 좀 물어야 할 게 있어요.”
려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서 성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 이리로 오세요!”
한비는 냉담한 표정으로 무겁을 안내했다.
무겁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려용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 역시도 마족 고수들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
마신성의 지하 밀실 안에서 양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급하게 단약을 제련하지 않고, 먼저 숨을 죽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밀실은 예전에 그가 마신변을 수련할 때 사용하던 곳으로 익숙한 곳이었다.
지금 그의 연단 수준은 성급 하품 연단사의 한계에 다다라 중품하고는 한 끗 차이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성급 중품 단약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진과 만약영액의 도움을 받는다면, 성급 중품 단약을 제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과 정신을 비우고 모든 욕망과 잡념을 버리자,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연단하던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연단진결에서 경험과 지식을 탐지하던 과정, 연단술을 배우면서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과 이루었던 성취 등 모든 기억들이 그가 목적성을 가지고 되새기자 점차 하나로 이어졌다.
양준은 마치 제3자가 되어 자신이 연단의 길에서 점차 성장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연단술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영기가 짙은 단약들을 연이어 제련해 내고 있었다. 단약들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저마다 영기가 넘쳐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성급 하품 단약을 손쉽게 제련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양준은 눈을 번쩍 떴다. 형언할 수 없는 자신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는 지금 상태로 성급 중품 단약을 제련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수집한 각종 영급, 성급 영초와 묘약들을 꺼내 앞쪽에 정연하게 놓았다. 그리고 신식을 방출해 작은 약 가마 안에 연단 성공률을 높일 수 있는 영진을 새겼다.
이내 그는 한 손으로 약재 하나를 잡았다. 그러자 금빛이 번쩍이면서 진원이 손에 모이더니 마치 타오르는 태양처럼 약재 속에 함유된 이물질을 태워 버리면서 약재를 약물로 응결했다. 얼마 안 되어 약물이 응결되었다. 초록빛 약물은 짙은 영기를 내뿜고 있었다. 양준은 진원으로 약물을 감싸 약 가마 옆에 떠 있게 놔두었다. 그러고는 다시 다른 약재를 꺼내 똑같이 약물로 응결했다.
한참 지나 약 가마 안의 영진이 모두 새겨졌고, 약재들이 하나하나 약물로 응결되면서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양준의 눈앞에는 오직 연단의 세계와 눈앞의 약재만 남게 되었다. 잠시 자신이 성급 단약을 제련해야 할 이유를 잊어버리자, 몸과 마음도 더는 어떤 압박감도 받지 않았다. 그의 모든 동작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지하 밀실 안에 약 향기가 점차 차오르기 시작했다.
*
마신성의 어느 한 궁정 안,
고마 일족의 지배자들은 무겁에게서 사실의 경과를 상세하게 듣고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양준이 왜 이처럼 절박하게 달려와서 그들의 봉인을 풀 성급 단약을 제련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양준도 어쩔 수 없이 일정을 앞당기게 된 것이었다.
“설리는 이미 관을 멘 사람을 찾았을 수 있습니다.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관을 멘 사람과 싸우고 있을 겁니다.”
무겁은 말하면서 다섯 명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설리라는 마장은 입성 경지 3단계인가요?”
려용이 눈썹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절정 고수 중 한 명입니다. 마족의 4대 마장은 모두 입성 경지 3단계입니다.”
“려 대인, 관노 선배는 세상을 뜨기 전에 입성 경지 2단계였어요. 그리고 그의 육신은 부패한 지 오래되어 마장과 맞서 싸우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한비가 분노에 찬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관노를 도와 싸우고 싶었다.
“관노 선배는 그 여인의 적수가 못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여인이 대마신의 단서를 찾으려고 한다면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잠시 동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2~3일 뒤에 움직이면 될 거야.”
려용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다른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주인께서는 그 여인이 오래전에 마신의 피를 얻어서 몸속에 흡수했다고 말했어. 그 여인이 마신의 신통력을 펼칠 수 없기를 바라야지. 아니면 정말 큰일이야.”
“마신의 신통력? 당신들이 얘기하는 게… 혹시 전설 속 대마신은 아니겠죠?”
무겁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표정이 연신 바뀌더니 망설이며 물었다.
“바로 그 대마신입니다.”
화묵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겁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다가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마신에 관련된 일은 그가 허투루 알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이 일에서 몸을 빼기가 어려울 터였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갑자기 어지러운 기운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며 소현계 전체가 흔들렸다.
려용의 얼굴이 차가워지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급히 밖으로 나갔다.
“시작되었군… 마장과 관노 선배가 싸우는 모양이야. 이곳까지 영향이 미치는구나!”
려용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히 관노 선배를 공격해. 나가면 혼쭐을 내줄 테다!”
한비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무겁은 문득 자신과 양준이 관을 멘 사람의 등 뒤 핏빛 관을 통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떠올리고 걱정이 되어 물었다.
“관노 선배가 져서 등 뒤의 핏빛 관이 훼손되면… 이곳은 어떻게 됩니까?”
려용은 그를 흘끔 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 소현계는 대마신이 신통력으로 만들어낸 다음, 핏빛 관에 봉인해 둔 거예요. 핏빛 관이 훼손되면 이곳도 산산조각이 날 것이고, 이곳에서 살고 있는 저희는 끝없이 펼쳐진 허공 속에 노출돼 영원히 길을 찾을 수 없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