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3장. 네가 관노 선배를 죽인 것이냐?
한쪽에서는 몇백 명의 고마 일족이 경지를 돌파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설산의 분위기는 기괴하면서도 무거웠다.
우르릉- 콰지직-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천지 기운이 인파 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여기저기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경지를 돌파하고 있던 적지 않은 고마 일족들이 천지 기운에 부상을 입고 입가에 피를 흘렸다. 한 사람만 경지를 돌파하는 것이라면 고마 일족의 강인한 신체로 볼 때 천지의 기운에 다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경지를 돌파하다 보니 천지 기운의 위력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했다. 여러 사람들이 천지 기운을 나눠 흡수해도, 어떤 이들은 버텨내지 못할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고마 일족은 당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피와 살이 꿈틀거리는 가운데, 그들은 전혀 방어하지 않은 상태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두 번째 천지 기운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온통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마치 천지간의 기운이 더욱 거세게 쏟아지기를 바라는 듯했다.
무겁은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두려워 진작 멀리 피해 있었다. 양준도 그의 곁으로 날아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미쳤어… 저들은 미친 게 분명합니다. 어떻게 저 모습으로 천지의 기운을 버텨낼 수 있습니까? 저들은 죽음을 자초하는 겁니다.”
무겁이 입가를 실룩이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양준은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인께서는 저들이 천지의 기운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첫 번째 공격에서 이미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들이 끝까지 버틴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군요. 지금이라도 모두 흩어져서 각자 경지를 돌파하는 게 더 좋지 않나요? 왜 한데 모여 있는 겁니까?”
“평범한 마족들이라면 아마 버텨내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저들은 평범한 마족이 아니거든요.”
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겁은 눈썹을 찌푸리고 망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족이면 마족이지, 또 뭐 서로 다른 종류가 있나?’
콰르릉-
천지의 기운이 계속해 고마 일족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자, 그들은 부상을 입은 채로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하지만 그들은 미치기라도 한 듯이 피를 흘릴수록 더욱 흥분했다. 밤하늘 아래에서 그들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을 뿌렸고, 그 모습은 마치 늑대같이 포악해 보였다.
파현부, 전혼전의 제자들은 모두 공포에 떨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장오와 조관도 가슴이 떨렸다. 수백 명의 고마 일족이 경지를 돌파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때, 멀리 떨어져 있는 서로 다른 두 곳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기척이 들려왔다. 한비와 화묵이 경지를 돌파하면서 이곳 못지않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설리는 이 광경을 지켜보며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마족들을 꼭 휘하에 두어야지.’
눈앞에 마족들은 각자 경지의 고하,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순수한 마족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포악함, 잔인함, 폭력성… 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설리는 이런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마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리는 마음속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저기 이름이 뭐야? 그리고 어디서 왔어?”
려용이 부드럽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이야?”
“그래. 난 4대 마장 중 한 명이고, 설리라고 해. 나한테 네 이름과 너희들의 정체를 말해 줘.”
설리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마족으로서 경지가 상대보다 한 단계 높기에, 설리는 당연히 하대하는 말투로 말했다.
“마장이라면서 우리 일족의 정체를 몰라보겠어?”
려용은 옷소매를 흔들더니 우아한 자태로 몸을 돌려 설리를 마주했다. 설리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고 불쾌해하며 말했다.
“내가 왜 너희들을 알아봐야 하는데?”
려용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개 마장이 내 앞에서 감히 그런 말투를 써? 지금의 마족은 모두 오래된 역사를 다 잊은 모양이야?”
그녀의 말에 모든 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설리는 냉소하며 악의에 찬 얼굴로 려용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마족들의 경지 돌파를 저지하지 않은 것은, 같은 종족으로 그들을 굴복시킬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통솔자로 보이는 여인이 이처럼 방자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설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서 오직 마존 한 사람뿐이었다. 심지어 때에 따라, 마존의 말도 설리에게는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인재를 아끼는 내 마음을 나약함으로 오해하지 마. 너희들이 마족이 아니었다면 진작 공격했을 거야. 너희들이 이처럼 느긋하게 경지를 돌파할 수 있게 가만 놔두지도 않았을 거고. 입성 경지 2단계밖에 안 되면서 감히 내 앞에서 방자하게 굴다니,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겠구나!”
설리가 차갑게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 말 잘했어. 정말 따끔하게 혼내줘야겠네. 우리 일족이 몇천 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지만, 같은 마족인 너희들마저 이리 까맣게 잊어버릴 줄이야……. 오늘은 우리 일족이 이 세계에 되돌아온 첫날이다. 너를 제물로 삼아 다들 우리를 제대로 기억하게 해야겠군.”
려용의 얼굴빛이 차갑게 변했다.
설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매섭게 일갈했다.
“너희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실력이 강한 미모의 두 여인이 날카롭게 맞서더니, 이제는 맞붙어 싸울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둘이 정말로 싸우게 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이상한 것은 실력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여인은 느긋한 표정에 여유 있는 반면, 경지가 한 단계 높은 마장 설리의 낯빛이 진중하고 살짝 두려움도 섞여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자아냈다.
려용은 한창 경지를 돌파하고 있는 동족들을 힐끗 보았다. 그들이 이미 마지막 고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그녀는 더는 억누르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네가 관노 선배를 죽인 것이냐?”
“관을 멘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어쩔래? 같은 마족으로서 감히 나를 공격해? 죽어도 싸지!”
“그래! 인정하면 됐어.”
려용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슬픈 기색을 하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관노 선배는 우리를 위해 수천 년을 힘썼어. 정작 마지막 순간에 그분을 만나지도 못하고 이렇게 보낼 줄 몰랐네……. 마장 설리, 네가 한 짓에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말이 끝나는 동시에 그녀의 몸속에서 마원이 들끓더니 검은 안개로 변해 설리를 덮쳤다.
“용기가 가상하군!”
설리는 연신 냉소를 지었다. 려용이 먼저 공격하자,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맞서 싸웠다.
아름답고 풍만한 두 그림자가 한순간 충돌하면서 횡포한 기운이 폭발했다. 입성 경지 고수 사이의 천지를 뒤흔들 결투가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녀들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대인의 휘하에 있는 마족들이 좀 정상이 아닌 것 같군요.”
무겁은 얼굴을 실룩이며 양준의 곁에 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실력이 같은 동족끼리의 충돌이면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통솔자인 려용이 먼저 설리를 도발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성 경지 3단계와 2단계는 작은 경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실제 전투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무겁은 려용이 곧바로 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변 상황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설리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 좀 이상합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어 그런 모양입니다.”
양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려용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관노가 설리와 싸우다가 육신이 산산조각 나 천지간에 흩어졌다. 려용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려용이 처음부터 설리에게 달려들어 복수하지 않은 것은, 동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동족들이 경지 돌파를 거의 다 마친 것을 확인한 그녀는 당연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두 여인의 혈투는 하늘에서 진행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마원이 사방으로 확산되고 충돌하는 가운데, 정묘한 원기 파동이 전해지자 모든 사람들은 동공이 수축되며 두려움을 느꼈다. 입성 경지 2단계와 3단계 고수 사이의 결전은 그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양준은 줄곧 전투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운의 파동으로 보아서는 려용이 제압당한 듯했다. 줄기줄기 검은 마원이 독사처럼 퍼져 나가면서 순식간에 거대한 구렁이로 변해 뾰족한 이를 드러내고 한 그림자를 감싸는 동시에 물어뜯었다.
이와 동시에 설리의 신혼 기운이 점차 강해지더니 문득 허공의 한 곳을 습격했다. 그곳에서 마침 모습을 드러내던 려용은 그대로 설리의 신식 공격에 적중된 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검은색의 거대한 구렁이가 그녀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싸움을 지켜보던 장오와 조관 일행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설리의 수단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입성 경지 2단계의 고수는 설리와의 싸움에서 일각도 채 버티지 못하고 패했다. 장오는 만약 자신이 설리와 맞붙는다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더 짧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찌지직-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거대한 구렁이의 몸속에서 가벼운 기척이 들려왔다. 곧이어 빛이 피어오르며 커다란 구렁이는 산산조각 나고, 려용이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녀의 입가에는 혈흔이 묻어 있었는데, 아마도 안에서 큰 접전을 치른 듯했다.
설리는 여유 있게 려용을 바라보며 경멸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 재주로 내 앞에서 건방을 떨어? 얌전하게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려용은 손으로 입가를 쓱 닦아내더니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온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의 가냘픈 몸에서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검은 마원이 용솟음쳤다. 마원들은 뱀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리면서 천천히 그녀의 몸에 기어오르더니 그녀의 옷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곧이어 그녀의 요염한 얼굴에 기괴한 무늬가 나타났다. 그 모습은 거칠고 사나워 보였지만, 그녀의 미모에는 영향이 없었다. 바로 마신변이었다.
려용이 수련한 것은 정통 마신변으로 양준의 것과 견줄 수는 없지만, 전투력과 기혈의 힘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입성 경지 2단계인 그녀가 마신변을 펼치는 순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칠고 포악한 기운이 설리 못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