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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1화 (1/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화

제1장 나비의 꿈(1)

달빛조차 드리우지 않는 캄캄한 숲속.

비릿한 피 냄새를 품고 있는 밤바람을 뒤쫓다 보니 공터가 나왔다.

대나무가 빽빽하게 선 공터는 생지옥이었다.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참혹한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토막 나거나 절단된 팔다리.

시체에서 나온 피가 실개천처럼 경사로를 타고 흘러내렸다.

핏물을 거슬러 공터를 지나자 두 명의 무인이 천 길 낭떠러지 앞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채애애앵.

검과 도가 부딪쳤다.

새파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 무인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하게 살수를 주고받았다.

승부의 추는 좀처럼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이윽고 치열하게 합을 벌이던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새파란 애송이일 때 봤었는데 실력이 제법 늘었구나.”

혈귀 적일도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마공을 익힌 그의 눈동자는 피보다 더 붉었다.

“물론이다. 너를 단죄하는 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니까.”

서씨세가의 젊은 가주 서준후가 대답했다.

서준후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가슴 위로 치켜든 검이 달빛을 반사하며 눈 부신 빛을 뿌려댔다.

“크크크크. 입만 살아 가지고. 슬슬 네 아비를 따라 저승으로 보내주마.”

“할 수 있다면.”

“다 뒈져가는 놈이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시겠다?”

적일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준후는 좀 전의 공방으로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찢어진 무복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서 쉴 새 없이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제법 잘 버텼다만.

최후의 승자는 적일도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였다.

“내겐 아직 비장의 한 수가 남았어.”

파바바밧!

선수를 친 것은 의외로 서준후였다.

서준후는 보법을 밟으며 적일도에게 달려나갔다.

출혈로 흐트러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최후의 한 수에 모든 것을 걸었다.

아버님, 부디 제게 힘을 주십시오.

청풍검법 최종식, 풍류운산.

한 줄기 바람이 된 서준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적일도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아…… 아니? 쿨럭. 쿨럭.”

기척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적일도는 피를 토하며 자신의 심장에 박혀 버린 검을 내려다보아야 했다.

공포와 고통이 밀려오면서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수 없었다.

“네가 무시했던 우리 가문의 절기다. 아버님이 만드시고 내가 완성한.”

“크으으읍. 이런 말도 안 되는…….”

“꺼져라.”

서준후는 적일도의 복부를 걷어차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절벽에서 추락하는 적일도를 지켜보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뿌듯함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점점 숨을 쉬기 힘들었다.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고 의식도 몽롱해졌다.

복수를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준후도 결국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쨍그랑!

서준후는 검을 놓치고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이제는 주저앉아 있을 힘조차 없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

혼인을 약속했던 천 소저의 얼굴이 떠올랐다.

두 사람 다 서준후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같이 웃어주고 싶은데 서준후는 그럴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계속해서 어둠이 밀려오고 잠이 밀려왔다.

밀려오고 있는 것이 죽음임을 서준후는 알았다.

까무룩 의식을 잃기 직전.

서준후는 한 마리 나비가 자신의 가슴에 내려앉은 것을 발견했다.

저승 가는 길이 마냥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

“아…….”

눈시울이 뜨거웠다.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굵은 눈물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잠에서 깨어난 준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울고 있었다.

전신에 차오르는 슬픔과 고독, 비애를 음미하다가 준후는 몸을 일으켰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애잔한 감정을 추스르고 나니 혼란스러운 감정이 뒤를 따랐다.

준후는 분명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며칠 전 여름 방학을 맞아 늦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무림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삼십여 년을 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무림에서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지경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말이다.

무림의 서준후가 나인가.

현대의 고등학생인 서준후가 나인가.

갑자기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독한 두통과 메스꺼움까지 밀려왔다.

공황에 빠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준후는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마셨다.

이상하게도 냉장고라는 물건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무림의 서준후라면 냉장고를 괴상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할 텐데.

에어컨, TV, 소파, 벽시계 등등.

준후는 그밖에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그 용도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단순히 개꿈을 꾼 걸까.

하지만 그것도 이상했다.

30년이나 되는 시간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꾸는 개꿈이 존재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서 고요한 집안.

준후는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이 대체 어떤 일인지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때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윤리 시간에 배운 호접지몽 또는 장자지몽.

장자가 나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는 고정된 자아가 없으므로 둘을 구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즉 장자의 말에 따르면 현대의 준후도 준후고 무림의 준후도 준후인 셈이었다.

참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이야기였지만.

‘확인해 보면 알겠지.’

준후는 방으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서씨세가의 심법인 청운심법을 운용했다.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대기의 기(氣)를 몸에 받아들이고.

길게 숨을 뱉어내며 그 압력으로 단전에 기를 보존한다.

[구름은 바람을 쫓아 만물에 다다르니 진기도 혈류를 쫓으면 다다르지 못할 곳이 없다.]

청운심법의 구결을 읊으며 운기조식을 한 지 삼십 분.

준후는 혈맥을 타고 흐르는 진기와 단전에 똬리를 튼 진기를 똑똑하게 느꼈다.

비록 무림만큼은 아니었지만.

현대에서도 분명 내공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 이게 되네?”

준후는 가부좌를 풀며 탄식하듯 혼잣말을 했다.

심법을 운용하고 운기조식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은 명확하게 두 가지를 가리켰다.

준후가 단순히 개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

준후는 현대의 고등학생이지만 동시에 무림의 서준후도 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준후는 혼란스러웠던 정체성을 그제야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현대의 서준후다.

동시에 무림의 서준후다.

깨달음을 얻은 준후는 곧바로 화장실로 이동했다.

거울 속에 비친 준후는 무림의 준후가 어렸을 때와 똑같이 생겼다.

이름과 성만 똑같은 게 아니라 얼굴까지 판박이었던 것이다.

“휴. 인생 한 번 스펙터클하네.”

* * *

준후는 바람을 쐴 겸 집 근처 약수터를 찾았다.

약수터는 평소와 같이 사람들로 붐볐다.

핸들 카에 물통을 한가득 싣고 가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

등산복을 챙겨 입은 채 산책로를 걷는 사람 등등.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그 풍경이 준후는 퍽 낯설어 보였다.

무림에서 무려 삼십여 년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약수터 산책로를 하염없이 걷다가 준후는 벤치에 앉았다.

매애애앰.

매애애앰.

매미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한여름의 산자락은 짙은 초록빛을 띠었고 바람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가 났다.

준후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무림의 서준후를 자신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더 이상 정체성에 혼란이 오지는 않았다.

다만 아직도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누가 뭐래도 비상식적인 일을 경험한 직후였으니까.

지이이잉.

때마침 챙겨온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도착한 메신저를 확인하고 준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 이 X새끼야. 방학이라고 아주 룰루랄라지? 형님한테 연락 한 번 없네? ㅋㅋㅋㅋ]

[개학할 때까지 100만원 모아와라. 형님 요새 용돈 부족하니까. 모자란 액수만큼 처맞을 테니까 처신 잘하라고~ ㅋㅋㅋㅋ]

메신저를 보낸 건 동급생이자 같은 반 일진인 형태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준후는 형태 패거리에게 줄곧 괴롭힘을 당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일진 여자애들이 준후가 잘 생겼다고 칭찬했는데, 형태는 그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 후 벌어진 일은 실로 참혹했다.

빵 셔틀.

용돈 셔틀.

샌드백 셔틀 등등.

준후는 인간이 아닌 형태 패거리의 각종 셔틀로 전락했다.

담임에게 괴롭힘을 알렸으나 담임은 그럴 리가 없다며 준후의 말을 무시했다.

형태는 외견상으로 공부를 잘하고 반에서 모범이 되는 학생이었기에.

그렇다고 괴롭힘 사실을 부모님께 말할 수도 없었다.

부모님이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준호는 혼자서 끙끙 앓았다.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도 빈번하게 느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우관계가 무너지고 학교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준후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조무래기들. 귀엽네.’

메신저를 다 읽고서 준후는 피식 웃었다.

예전의 준후였으면 메신저를 받고 벌벌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준후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두려움에 떨어야 할 이들은 오히려 형태 패거리였다.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준후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문득 실존적인 질문이 밀려왔다.

이제 형태 패거리는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자신의 삶을 멋지게 가꿔야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장래는 스포츠 선수였다.

어떤 스포츠가 됐든 준후는 남들보다 탁월한 성취를 이룰 자신이 있었다.

준후에게는 내공이 있었고 무공이 있었다.

몸을 쓰는 일이라면 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스포츠 스타의 길이 딱히 끌리지는 않았다.

검을 다루며 이미 수많은 마두들을 물리쳤던 준후는 스포츠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스포츠에 뛰어드는 게 반칙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럼 또 괜찮은 직업이 뭐가 있을까.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수 있는, 사회적인 시선이 좋은, 스스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깊어지는 고민.

고뇌하던 준후는 자신의 내면에서 답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무림에서 보낸 삶을 찬찬히 돌이켜보았다.

후회되는 일이야 많고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이라면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것이었다.

병으로.

부상으로.

정파 간의 세력다툼으로.

또 사파인들의 습격으로.

세가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치거나 죽어 나갔다.

무림의 준후는 강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육체적인 고통과 사별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준후의 검에는 늘 한계가 있었다.

‘맞아! 그 직업이라면…….’

때마침 딱 좋은 직업이 떠올랐다.

검과 비슷한 도구를 사용하는 직업.

고귀한 생명을 지키는 직업.

강철 같은 체력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직업.

마지막으로 능숙한 손놀림이 필요한 직업.

준후는 아무래도 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검 대신 메스를 손에 쥐고 싶었다.

악인을 죽이는 대신 귀인을 살리고 싶었다.

무공을 쓰는 외과 의사라…….

이거,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준후는 공교롭게 나비를 보았다.

무림에서 목숨을 잃기 전.

준후의 최후를 지켜주었던 나비와 똑같이 생긴 나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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