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4화
제1장 나비의 꿈(4)
막 1층 상가에 배달을 마친 형석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어머니나 저를 위해 항상 노력하시잖아요. 전 그거면 충분해요.
아까 아들이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콧잔등이 다시금 시큰거렸다.
아들은 알고 있을까.
그 한 마디가 못난 아버지인 자신에게 얼마나 큰 선물이 되었는지.
그 말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형석은 앞으로 닥칠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대견하고 기특한 녀석,
고마운 녀석.
형석은 담배를 피우며 아들의 변한 모습에 새삼 감탄했다.
하루아침에 아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형석을 감동시키는 말을 했던 건 물론이요.
욕만 나오는 똥짐을 들고 빌라를 질주하기도 했다. 심지어 힘든 내색 한 번도 안 비추고.
남몰래 운동이라고 하고 있었던 걸까.
아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형석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웠다.
그런데 아들이 아직 복귀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배달 속도를 감안하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말이다.
‘이상하네. 오배송할 수도 없는 곳인데.’
문득 불안함이 밀려왔다.
아들에게 무슨 사고가 발생한 건 아닐까.
하지만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마도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거나 갑자기 방전돼서 쉬고 있을 확률이 컸으니까.
조금 더 늦으면 그때 전화를 해보자.
마음을 고쳐먹은 형석은 담배를 한 대 더 입에 물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 * *
산청 빌딩 1층 로비.
준후는 배달할 물건을 경비실 앞에 모조리 내려놓았다.
그러던 중 사람들이 무엇을 둘러싸고 있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정장을 입은 중년 사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의식을 잃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우왕좌왕할 뿐 딱히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저 사람, 죽을지도 몰라.’
준후는 쓰러진 사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학교 보건 수업 때 심폐소생술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사람이 쓰러지면 의식과 호흡을 확인한 뒤 흉부 압박을 해야 한다고 배웠다.
사람을 살리는 외과의를 목표로 한 만큼.
위태로운 생명을 보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잠시만 비켜주세요.”
준후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사내 곁에 무릎을 꿇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어깨를 흔들었으나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숨을 쉰다면 오르락내리락해야 할 흉곽도 움직임을 멈췄다.
코밑에 손가락을 대었다.
예상대로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내는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식을 잃은 듯했다.
“거기 안경 쓴 남자분. 119 신고 좀 해주시겠어요?”
“신고라면 아까 다른 사람이 했어요.”
“알겠습니다.”
준후는 침착하게 학교에서 배운 매뉴얼을 따랐다.
사람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는 준후에게 만큼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무림에서 준후는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지켜봐 왔다.
장기가 배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
팔이 잘린 사람.
머리가 잘린 사람 등등.
준후가 무림에서 지켜본 부상자에 비하면 눈앞의 사내는 얌전한 수준이었다.
현대의 인생에서는 악인을 처단하지 않는다.
대신 내 손으로 사람을 살린다.
각오를 굳힌 준후는 사내의 와이셔츠 자락을 재빠르게 풀었다.
사내 가슴팍에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목걸이를 제거하지 않고 흉부 압박을 했다면 사내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투두두둑.
준후는 목걸이를 완력으로 뜯어냈다.
“학생,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어중간하게 하다가 이 사람이 더 다치면 어떻게 해?”
한 사내가 따지는 목소리로 준후의 CPR을 만류했다.
“무관심보다는 어중간한 처치라도 나을 겁니다. 말씀하신 김에 입구에 있는 제세동기 가져다주세요.”
“아니, 글쎄 가만히 있으래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준후는 내공을 담아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발목을 잡는 사내 때문에 열이 받았다.
흉부 압박은 본래 환자에게 충격이 갈 수밖에 없는 처치였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이 거의 기본일 정도로.
왜냐면 말이다.
정지한 심장에 고여 있는 피를 전신으로 짜내려면 그만큼 강력한 압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비뼈가 부러질까 봐.
또는 환자가 다칠까 봐 흉부 압박을 못 한다?
그건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었다.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준후의 기백에 눌린 사내가 어버버거리다가 제세동기 쪽으로 이동했다.
준후는 본격적으로 환자 옆에 자리를 잡았다.
깍지 낀 손을 환자의 가슴 중앙에 올려놓고 힘차게 압박을 시작했다.
분당 120회.
직관적으로 계산하면 1초에 2회.
준후는 본인의 박자에 맞춰서 환자의 가슴을 압박해나갔다.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준후가 압박을 할 때마다 환자의 몸이 들썩거렸다.
마치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이대로만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준후는 본인의 힘 조절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너무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고.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확신했다.
본디 무공이란 강과 약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흉부 압박을 하는 속도 또한 준후는 만족스러웠다.
2분이 넘어가면서 조금 피로한 감이 있었지만 분당 120회는 칼같이 지키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까맣게 모르겠지만 당신은 저의 비공식 첫 환자입니다.
죽어선 안 되고 죽을 수도 없어요.
흉부 압박을 하면서 준후는 환자의 생환을 애타게 빌었다.
무림에서처럼 사람이 죽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현대에서의 삶은 무림에서의 삶과 달라야 했다.
“저기, 제세동기 가져왔는데?”
준후와 잠시 입씨름을 했던 사내가 현장으로 돌아왔다.
준후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아…… 하아…… 그냥 패드 붙이고 사용해요.”
“인형한테만 해봤지 사람한테는 해본 적 없는데.”
“그냥…… 하세요.”
준후는 흉부압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심정지 후 3-5분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들었다.
골든타임에 흉부압박을 멈추는 건 환자를 내팽개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라이, 이젠 나도 모르겠다.”
사내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더듬더듬 설명서를 읽다가 커넥터를 연결하고 환자의 가슴과 옆구리에 패드를 붙였다.
-심장 리듬 분석 중…… 제세동을 해야 합니다. 충전 중…… 환자에게서 떨어지세요.
건조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환자와 떨어지세요!”
준후는 처음으로 흉부압박을 멈추고 환자와 거리를 벌렸다.
깜짝 놀란 사내도 준후를 따랐다.
-제세동이 필요합니다. 주황색 충격 버튼을 누르세요.
안내에 따라 준후가 충격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환자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제세동이 실시되었습니다. 필요한 경우 계속 CPR을 진행하세요.
전기 충격이 끝난 후 준후는 다시 환자에게 붙어서 흉부 압박을 실시했다.
뚝. 뚝. 뚝.
준후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앞머리는 이미 미역처럼 젖어서 축 처진지 오래였다.
숨도 가빠왔다.
혼자서 도맡는 흉부압박은 준후에게도 살짝 버거웠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리 쉽고 간단할 리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된 흉부압박과 제세동.
“크으으읍.”
환자가 별안간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거렸다.
준후의 헌신에 의식을 되찾은 것이다.
준후는 그제야 흉부압박을 멈추고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정신이 드세요?”
“흐으음. 여…… 여기는…….”
“산청 빌딩이에요.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어요.”
준후의 이야기를 듣고 환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환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준후는 빙그레 웃을 수 있었다.
준후가 흘린 땀과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환자가 의식을 되찾았으니까.
저승에서 이승으로 되돌아왔으니까.
처음으로 사람을 살려 본 준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길이 자신이 가야 할 길임을 확신도 했다.
이젠 누구도 죽지 않게 하겠어.
* * *
타다다닥.
영재는 다급한 걸음으로 신고를 받은 건물 로비로 진입했다.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신고 전화를 받은 것이 12분 전이었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한 것이 신고 후 12분 후였다.
환자의 정확한 상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심장마비라면 환자에게 벌써 뇌 손상이 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더 조급했다.
하필이면 인근에서 교통사고가 날 건 또 뭐람.
신고 현장이 구급 센터와 가까워서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현장에 도착하자 상황은 의외로 종료되어 있었다.
신고 전화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의식을 차린 채 로비에 앉아 있었다.
그 곁을 아직 앳된 학생이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 근처에는 이미 사용한 듯한 제세동기도 놓여 있었다.
“119대원입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영재가 중년인에게 물었다.
“제가 쓰러졌는데 이 학생이 저를 구해줬어요.”
영재의 시선이 학생에게 머물렀다.
학생은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택배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과 머리가 온통 땀범벅이었다.
“학생, 장한 일을 했어요.”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학생의 대답은 차분했다.
사람이 쓰러졌으면 겁먹는 게 당연할 텐데도 기특하게 CPR을 했던 것이다.
중년인을 살린 건 영재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바로 눈앞의 학생이었다.
“근데 학생.”
“네.”
“혹시 혼자서 CPR 했어?”
“거의 그런 셈이죠. 제세동기 부착만 도움을 받았고요.”
학생의 대답에 영재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CPR은 단순해 보이지만 엄청난 체력과 인내력을 요구하는 처치였다.
오죽하면 구급 대원이나 의사들도 2분마다 교대로 실시할까.
그런데 이 학생은 무려 12분 동안 혼자서 CPR을 소화한 것이다.
와. 그게 가능하다고?
“이상하네. 혼자서 그렇게 오래 할 수가 없는데?”
“제가 체력이 남달라서요.”
학생이 씽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키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학생은 정말 고생 많았고요. 환자분은 가까운 병원으로 가시죠. 의식을 차렸다고는 해도 검사는 해봐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학생, 고마워요. 내가 사례는 나중에 톡톡히 할게요.”
중년인이 학생과 연락처를 교환하더니 명함까지 건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장에 있던 다른 사내도 학생에게 따로 연락처를 받아갔다. 언뜻 들리는 바로는 어디 기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선배, 어떻게 된 거예요?”
환자와 함께 구급차로 돌아가는 도중.
영재는 스트레쳐 카를 끌고 이쪽으로 오는 동석을 마주했다.
동석은 조금 전에 영재가 그랬던 것처럼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었다.
“상황 종료다. 웬 학생이 CPR로 환자분을 살렸어.”
“휴. 천만다행이네요. 큰일 터지는 줄 알았는데.”
환자를 먼저 구급차 후방에 태우고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나눴다.
“동석아.”
“네, 선배.”
“혹시 중·고등학생이 12분 동안 혼자서 CPR 한다는 이야기 들어 봤니?”
“혼자서 12분이요? 에이, 농담하시는 거죠?”
동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2분만 해도 죽을 것 같은데 12분을 어떻게 해요? 철인 삼종 경기 우승자가 와도 그건 안 될 걸요?”
“근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다.”
영재는 피식 웃으며 거리로 시선을 돌렸다.
환자를 살린 학생이 핸들 카를 끌고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다.
저 학생은 사실 괴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