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5화
제1장 나비의 꿈(5)
“준후야, 무슨 일 있었니?”
다음 배달 지역으로 도착하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저한테는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있었어요.”
“다른 사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이 있더라고요.”
준후는 빌딩에서 겪었던 일을 간단하게 전했다.
아버지는 멍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뒤늦게 준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했다. 아주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우리 아들 이러다가 진짜 의대 가겠는걸?”
“무조건 갈 거예요, 전액 장학금으로.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준후가 씽긋 웃으며 대답했다.
의사가 되기 전에 사람 살리는 일의 보람을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준후는 이 보람찬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문득 무림에서, 자신의 곁에서 다치고 죽어 나갔던 무인들의 얼굴이 준후의 머리를 스쳤다.
현대의 의술을 알았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안타까운 생명들.
현대의 지식을 무림에서 알지 못했으므로 무림의 준후는 그들을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현대에서 최대한 막아보리라.
죽는 자의 아픔과 남겨진 자의 슬픔을 준후는 벌써 다 경험해 봤으니까.
“이젠 어디 배달해요?”
“저기 보이는 아파트란다. 이전보다는 훨씬 편해질 거야.”
“네.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쉬어요.”
준후는 택배차 보조석에 앉았다.
이윽고 차량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아버지가 짐을 분류하는 동안.
준후는 분주하게 택배를 날랐다.
확실히 일반 주택가를 벗어나니 배달이 편하긴 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대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됐으니까.
‘뭔가…… 섭섭하네.’
일이 편해지자 오히려 못마땅한 준후였다.
주택가에서 배달할 때는 육체 단련이 됐는데 아파트에서는 그게 안 됐다.
그래서 저층 물건은 일부러 계단을 이용했다.
계단 오르기는 하체 단련에 퍽 도움이 됐기에.
준후의 활약으로 화물칸의 짐은 쑥쑥 빠졌다.
짐들이 차지한 공간보다 빈 공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빈 공간이 많아진다는 것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와! 신기록이구나. 오후 5시 40분에 배달이 끝나다니.”
배달이 끝난 후 아버지가 텅 빈 화물칸을 보며 감탄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오늘만큼 배달이 일찍 끝난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피로를 덜고.
아버지가 일찍 퇴근할 수 있게 도왔다는 사실에 준후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게 바로 효도의 기쁨인가.
“이거 원, 웬만한 일반 직장인보다 빨리 끝났는데?”
“앞으로도 계속 일주일에 두 번은 도와드릴게요.”
“녀석, 일단 두고 보자꾸나. 빚만 다 갚으면 아빠도 짐을 줄일 생각이니까.”
“…….”
“고생 많았고 또 고맙다. 아들아.”
“저야말로 감사하죠.”
서로를 바라보는 부자의 시선이 애틋하고 따뜻했다.
부우우웅.
택배차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인근 도로로 접어들었다.
퇴근 시간 언저리라서 차가 막혔지만 아버지는 흥겨워 보였다.
콧노래까지 불렀다.
아버지가 행복해서 준후도 행복했다.
행복은 전염되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은 뭐 먹을래? 아빠가 맛있는 거 사주마.”
“그럼 짜장면이요.”
준후가 대답했다.
무림을 경험하고 나서 이상하게 짜장면이 당겼다.
짜장면 특유의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좋아. 오늘은 저녁은 짜장면에 탕수육이다. 그것도 대자!”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준후는 문득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을 꺼냈다. 심정지가 왔던 환자가 건넸던 명함이었다.
[새로 한의원 원장: 김용진.]
* * *
준후는 전날 저녁에 시작했던 공부를 다음 날 오전까지 하고 있었다.
방식은 어제와 같았다.
2-3시간 동안 스스로를 몰아붙이듯이 공부한다.
그리고 집중력과 체력이 떨어지면 운기조식으로 회복한다.
이런 준후의 능력을 다른 사람이 안다면 사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기가 맞았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그것은 준후가 능력을 공짜로 얻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무림에서 준후는 치열하게 살았고 그 보상을 현대에서 받는 것뿐이었다.
오전 12시가 되었을 때 준후는 교과서를 덮었다.
집중력이 한창일 때라 공부를 접기 아쉬웠지만 볼 일이 있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도착한 지하철역.
준후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강남인데 그곳에서 어제 CPR을 실시했던 환자가 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보상은 필요 없다.
앞으로 몸 관리 잘하고 건강하게 지내셔라.
어제저녁 연락해 온 환자에게 그런 뜻을 전했지만 환자는 막무가내였다.
준후를 무조건 봐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았다.
“이번 역은 강남, 강남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상념이 끝나갈 무렵.
방송 문구가 흘러나오고 곧 문이 열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도로 양옆으로 고층 건물이 수두룩 빽빽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강남, 강남 타령을 불렀던 걸까.
준후가 살고 있는 동네와는 풍경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처음 와본 강남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준후는 주변을 살피며 걷기 시작했다.
외과의를 목표로 했기 때문일까.
수많은 성형외과 간판들이 준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준후가 사전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성형외과는 돈을 잘 버는 과였다.
대부분의 처치가 비보험인 데다가 개원해서 입소문만 잘 타면 돈을 긁어서 번다고 했다.
성형외과가 이미 포화상태에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기는 여전하다고도 했다.
‘성형외과라……. 일단 목록에는 올려두자.’
준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상 치료. 미세 수술, 절단된 신체 부위의 봉합 등등.
외모를 뜯어고치는 것만이 성형외과의 전부는 아니었다.
성형외과도 충분히 매력적인 외과의 한 분야였다.
주변을 살피며 걷던 준후는 세련된 7층 빌딩의 4층으로 진입했다.
4층에 무려 절반을 쓰고 있는 새로 한의원이 준후의 목적지였다.
강남에 위치한 빌딩.
그것도 한 층의 절반을 사용하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할까.
준후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죄송한데 지금은 점심시간이에요.”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한의원에 들어선 준후에게 말했다.
“원장님이 이 시간에 보자고 하셔서요.”
“아, 원장님이 말씀하신 손님이구나.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의 안내를 받은 준후가 원장실로 들어갔다.
어제 봤던 환자, 용진이 진료 의자에 앉아 준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흰 가운을 걸친 용진은 언제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이게 바로 장소와 의사 가운이 주는 위엄이리라.
“반가워요, 준후 학생.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강남 구경도 하고 좋았는데요.”
“원래 내가 찾아가는 게 맞는데 보다시피 일이 바빠서…… 준후 학생이 이해해 줘요.”
용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고플 텐데 식사라도 같이하자며 가까운 고급 한우 고깃집을 안내해 주었다.
자리에 앉은 준후는 가격표를 보고 식겁했다.
한우는 1인분에 6-10만 원을 호가했기 때문이다.
한우 1인분을 먹을 돈이면 치킨을 네다섯 마리나 먹을 수 있는데!
준후가 가격에 충격을 받은 사이.
용진이 한우 5인분을 주문했다.
“저 때문에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요?”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야 뭐.”
“그런데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계속 존대하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그럴까요?”
준후의 제안에 용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어제 병원 다녀오셨죠?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초음파도 하고 CT도 찍었는데 놀랍게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구나.”
“저도 살짝 공부를 해봤는데 특별한 원인 없이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무서워지더구나. 문제가 있으면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문제가 없으니까 치료도 못 받고 말이야.”
용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근 집안 문제로 스트레스가 쌓였고 흡연량도 늘어났는데 아마 그게 원인일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사람 사는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같아요.”
“훗, 녀석. 벌써 노인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고요.”
준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림에서 현대인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고 왔기에.
치이이익.
대화가 잠시 끊겼을 때에 마침.
직원이 한우를 가져와서 직접 구워주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에 음식을 먹기도 전에 침샘이 터지는 준후였다.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식사부터 하자꾸나.”
“네. 선생님.”
준후는 정신없이 고기를 먹어치웠다. 후식으로 시원한 물냉면도 먹었다.
단언컨대 준후 인생 최고의 외식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저씨가 뭘 해줬으면 좋겠니?”
식사가 끝날 무렵, 용진이 턱에 얼굴을 괸 채 물었다.
“이미 한우를 사주셨는데 또 뭘 해주시게요?”
“이건 같이 한 끼 식사를 한 거고 응급처치를 해준 보답은 따로 챙겨줘야지.”
“저는 보상을 바라고 선생님을 도운 게 아니에요.”
준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준후에겐 용진이 되살아난 것이 최고의 보상이었다. 또 다른 보상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준후, 널 위해서 보답을 하겠다는 게 아니야. 네게 보답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용진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편하게 현금을 줄까?”
“아니요. 진짜 괜찮아요.”
“으음…… 준후 네가 몇 살이지?”
준후의 대답을 깡그리 무시하고 용진이 또 물었다.
“올해로 고1입니다.”
“고1이라…… 그럼 마침 좋은 선물을 줄 수 있겠어. 잠시만 기다리렴.”
용진이 휴대폰을 들고 식당 바깥으로 나갔다.
용진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준후는 알 길이 없었다.
곧 식당으로 복귀한 용진과 함께 준후는 한의원으로 돌아갔다.
“받으세요.”
대기하던 직원이 준후에게 내민 것은 보약이 담긴 봉투였다.
준후가 무게감을 느낄 만큼 내용물은 묵직했다.
“이게 뭔가요?”
“강남 수험생들이 먹는 총명탕이에요. 아침·저녁으로 두 첩 섭취하시면 되고 한 달 분이고요.”
“선생님. 이렇게까지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사람 성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받아둬.”
준후가 되돌려주려고 했던 봉투를 용진이 슬며시 밀었다.
그리고 준후가 수능을 치를 때까지 앞으로 매달 총명탕을 택배로 보내주겠다고도 했다.
계속 거절했다간 싸움이 날 판국이라서 준후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잘 먹겠습니다.”
“감사하긴 내가 감사하지. 나중에 시간 될 때 부모님도 한 번 모시고 와. 내가 무료로 관리해드릴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용진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준후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험 삼아 총명탕 한 포를 뜯어 단번에 삼켰다.
무림에서도 달인 탕약을 자주 먹었기에 쓴맛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한 30분쯤 지났더니 전신에서 후끈후끈 열이 올라왔다.
‘이…… 이건?’
준후는 총명탕이 기력을 보충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나섰다.
총명탕이 전해주는 기운들을 단전으로 내려보냈다.
총명탕을 먹은 것과 먹지 않은 것.
둘 사이의 차이는 명확했다.
내공 쌓이는 속도가 1.5배가량 향상된 것이다.
한약재의 영양분이 혈맥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리라.
운기조식을 이어나가는 준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생각보다 빨리 강해질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