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6화
제2장 운수 좋은 날(1)
준후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목표는 국내 최고의 공립대학인 신원대 의과 대학에 입학하는 것.
두 번째 목표는 수석으로 입학해서 등록금을 면제받는 것.
두 가지 목표를 이루는 일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거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운기조식으로 남보다 많은 시간 공부할 수 있었다.
의외로 무공까지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마두와 생사결전을 치르면서 날카롭게 벼른 집중력이 큰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서투른 보법 한 번.
잘못 휘두른 검격 한 번으로 목숨을 잃는 세상이 무림 아닌가.
살아남기 위해 키워 온 생존 집중력은 그 진가가 남달랐다.
준후는 체력만 허락한다면 집중력을 항상 최고조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과서의 내용과 문제집의 의도를 파악하는데도 준후는 소질이 있었다.
역시 생사결전과 비무에서 터득한 자질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무공은 물심양면으로 준후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신원대 수석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크게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이뤄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3시간가량의 공부가 끝난 시점.
준후는 평소처럼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펼쳤다.
쓰으읍.
후우우.
평범한 사람들과는 깊이가 다른 들숨과 날숨.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무형의 기운 내공.
기경팔맥과 세맥을 돌고 돌아 단전에 내려앉은 무공.
그러면서 회복되는 체력과 집중력.
준후는 30분 만에 상쾌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잠깐 바람을 쐬고 싶어서 집을 나와 인근 약수터로 향했다.
어제 심폐소생술로 환자를 살렸기 때문일까.
같은 경우로 세상을 떠난 무인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서씨세가의 장로 서문정.
서문정은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급사였다.
누구도 서문정의 허무한 죽음을 예측하지도, 막아내지도 못했다.
‘안타까웠지, 정말.’
현대에서 살아가는 준후는 이제 서문정이 심장마비로 사망했음을 알았다.
현대에서 무림을 기억하는 것처럼.
무림에서 현대를 기억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심폐소생술로 서문정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과거를 회상하는 준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앞으로 잘하면 될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서문정처럼 맥없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만들면 될 것이었다.
각오를 다지며 준후는 약해지는 마음을 담금질했다.
도착한 약수터는 평화롭고 일상적이었다.
인근 주민들이 여유롭게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매미 울음은 여전히 준후를 반겼고 후덥지근한 바람에는 싱그러운 풀 향기가 가득했다.
야산 깊숙한 공터에 준후는 자리를 잡았다.
서씨세가의 검술 대신 권법, 장법, 보법, 각법 등의 초식들을 모처럼 펼쳤다.
일종의 신체 단련이었다.
현대에 마두들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공은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수준에서만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준후는 시간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잠깐 무공의 맛만 보려고 했는데 훌쩍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무아지경에 빠져 무공을 익히고 말았다.
벤치에 앉아 쉬면서 준후는 생각에 잠겼다.
무공과 의술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있지 않을까 고민해 보았다.
당장 떠오르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준후는 눈동자에 내공을 담아 날아가는 새를 쫓았다.
망원경이라도 쓴 것처럼 새가 자세히 보였다.
비둘기 날개 사이에 난 상처까지 보이는 수준이었다.
안법이라고 불리는 무공이었다.
내공으로 시력을 극대화하는 무공 말이다.
외과의가 된다면 수술 시야를 확보할 때 안법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다음은…….’
준후는 추궁과혈과 기 치료를 떠올렸다.
추궁과혈은 현대판 마사지로 부모님께 이미 그 효력을 인정받았다.
기 치료는 준후가 환자에게 내공을 불어넣어 회복력과 면역력을 높이는 치료 방식이었다.
추궁과혈을 일반 환자에게 펼치고.
기 치료는 중환자실 환자에게 펼치면 좋을 것 같았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벤치에서 일어난 준후는 손가락으로 흙바닥에 사람 그림을 그렸다.
실제 사람 크기만 한 그림이었다.
직접 그린 모형에 특정 부위를 준후는 검지로 콕콕 찍었다.
무림에서 점혈법이라고 부르는 수법이었다.
점혈은 한 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이 가능했다.
환자의 통증을 줄여줄 수 있었고(진통제와 함께한다면 효과가 배가 되리라).
내공을 적당히 섞으면 지혈까지 가능했다.
점혈은 응급 상황에서 빛을 발휘할 것으로 보였다.
준후는 무공과 현대 의학의 점접을 찾다가 나무 앞에 섰다.
활짝 펼친 손바닥으로 나무를 가볍게 때렸다.
우우우웅.
나무가 흔들리며 기묘한 공명음이 퍼졌다.
방금 펼친 무공은 통배권이었다.
일종의 내가 기공으로 상대방에게 외상이 아닌 내상을 입히는 무공이었다.
손바닥으로 흘려보낸 내공이 적의 장기를 진탕으로 만드는 무공이었다.
통배권은 아마 제세동기가 없을 때 제세동기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제세동기의 전압 대신 내공으로 심장에 충격을 주는 방식이랄까.
이걸 미리 생각해뒀다면 어제 써먹었을 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목숨을 걸고 배운 무공들인데 최대한 써먹어야지.’
준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약수터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때마침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당연히 어머니의 전화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후는 통화를 연결했다.
-서준후 학생, 휴대폰 맞죠?
“맞는데 누구시죠?”
-산천일보 기자 이태환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만나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의 소속을 알고 난 후에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CPR 현장에 있었던 기자가 연락처를 물어봤었지?
* * *
그 날 저녁.
준후는 집에서 떨어진 동네 번화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준후의 맞은편에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30대 초반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남성이 바로 산천일보 기자 이태환이었다.
태환과 만나 준후는 대략 30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태환은 어제 준후가 펼친 CPR을 감명 깊게 봤는데.
이를 기사로 내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전했다.
-심폐소생술을 따로 배운 적이 있어요?
-심폐소생술을 할 때 무섭지는 않았어요?
-환자를 본 순간 망설임 없이 돕고 싶었어요?
…….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준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CPR은 학교 보건 수업 때 한 번 배웠고 CPR이 두렵지는 않았다.
의과의를 목표로 삼고 있어서 오히려 의욕적으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다고 답변했다.
“준후 학생, 용기가 대단하네요. 나는 어른인데도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못 했는데.”
태환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군대나 예비군에서 그렇게 CPR을 배웠어도 막상 상황이 닥치니까 못 하겠더라고요.”
“기자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준후는 태환의 편을 들어주었다.
만약 무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준후 역시 대담하게 CPR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목숨이 자신의 처치에 달려 있다는 것.
그것만큼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더군다나 요즘은 시대가 흉흉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
-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에 따르면.
-생명이 위급한 응급 환자에게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를 제공해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死傷)에 대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傷害)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준후가 나중에 알아본 법률인데.
이 법률이 있다고 해서 CPR을 실시한 사람이 항상 보호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환자가 CPR 도중 사망했다고 치자.
이 경우 응급처치자는 형사책임을 감면받을 뿐.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선의로 처치를 하고도 오히려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환자의 갈비뼈가 부러져 폭행죄로 고소를 당한다거나.
여성에게 CPR을 한 경우 아주 드물게 성추행으로 고소당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심폐소생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도 준후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성격도 좋네, 준후 학생은. 덕분에 위로가 좀 됐어요.”
“아닙니다. 느낀 대로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기사랑 뉴스는 모레쯤 나갈 거예요. 기사 나갈 때 연락 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아 참, 해주고 싶은 말이 또 있는데.”
태환이 화제를 돌렸다.
태환이 언급한 것은 다음 주에 진행되는 서울 주민 CPR 경연 대회였다.
준후의 CPR 실력이면 입상을 노려볼 만하니 도전을 권했다.
“상금도 꽤 좋고 의사가 꿈이라면 나름 괜찮은 스펙도 될 거예요. 한 번 생각해 봐요.”
“아, 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태환과 헤어진 준후는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서울 주민 CPR 경연 대회를 검색해 보았다.
‘와, 정말 이런 대회도 있었구나.’
모집 요강을 살피던 준후의 눈동자가 커졌다.
금상의 상금이 무려 500만 원이었다.
다음 달에 아버지와 어머니 생일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상금으로 좋은 선물을 사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의 생일 선물로 편지나 감사 인사 따위를 전하는 건 이제 졸업해야 하지 않겠는가.
구미가 당기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기회에 자신의 CPR이 다른 사람의 CPR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봐도 좋을 듯싶었다.
준후는 빠르게 다른 부분도 훑었다.
자격 요건에 결격 사항은 없었으나 한 가지 걸림돌이 존재했다.
참가 조건이 2인 1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준후 혼자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대회에 나갈 수 없었다.
한 명을 더 끌어들여야 한다는 소리인데…….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형태 패거리 때문에 고등학교에서는 친구를 거의 만들지 못했다.
당장 파트너로 삼을 사람은 그나마 영호 정도만 생각이 났다.
하지만 여기에도 또 문제가 있었으니, CPR 경연 대회는 단순히 CPR 실력만을 보지 않았다.
-경연내용 : 심정지 발생상황 및 대처 행동 등 스토리 구성이 있는 심폐소생술.
즉 응급 상황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소화하느냐도 채점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딱 적합한 사람이 있었지?’
준후는 연락처를 뒤지다가 적임자를 떠올리고 곧바로 통화를 연결했다.
다행히 통화가 금방 연결됐다.
-네가 웬일이래? 나 완전히 쌩까기로 마음먹은 거 아니었어?
상대방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날카롭기도 했다.
“오해하지 마. 절대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내 연락은 왜 다 씹었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 다 설명할 수 있고.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시간 언제 괜찮아?”
-지금 아니면 안 돼. 나도 꽤 바쁜 몸이거든.
“잘됐네. 지금 보자. 우리 자주 가던 분식집 있지? 거기서 보자.”
준후는 통화를 끊고 부모님께 외출 사실을 알린 후 집을 나섰다.
15분 거리에 있는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주변을 서성거렸다.
때마침 트레이닝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은 익숙한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준후는 상대방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유지애,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