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2화
제3장 학교에서(2)
운기조식을 마친 준후가 눈을 뜨고 가부좌를 풀었다.
준후의 평온한 눈이 향한 곳은 바로 벽에 걸린 달력이었다.
오늘은 개학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여름 방학은 무척 짧기만 했다.
의대에 가기 위해 피 터지게 공부하랴.
틈틈이 무공 수련을 하랴.
어머니의 회복을 도우랴.
아버지 택배를 도와드리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전부 준후의 비옥한 미래를 위한 비료가 되었다.
무림을 다녀온 후 준후는 어쩐지 공부가 더 잘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형태 패거리의 괴롭힘으로 모자랐던 진도를 진작 따라잡고 예습까지 하는 중이었다.
내공도 무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양을 축적했다.
한의사 용진이 챙겨준 총명탕 덕분이었다.
자신의 헌신에 행복해하는 부모님을 보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가장 더뎠던 영역은 무공을 수련하고 육체를 단련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현대에서는 무공을 앞세워 칼 들고 설치는 악인들이 없었으니까.
사실 지금의 무력으로도 격투기 챔피언 20명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었고.
“준후야, 아침 먹자.”
“네. 어머니.”
어머니의 부름에 준후는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가 뇌수술을 받은 것도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준후의 기 치료 덕분에 어머니는 금방 병환을 떨쳐냈다.
최근에는 짧게나마 식당 일을 하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준후는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들었다.
“우리 준후, 방학이 끝나서 아쉽겠다?”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제가 개학을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정말? 왜?”
“방학 때 못 봤던 친구들을 볼 수 있으니까요.”
준후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자신을 괴롭혔던 형태 패거리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가.
벌써부터 온몸이 근질거리는 지경이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먼저 출근하고 그 뒤를 어머니가 따랐다.
혼자 남은 준후는 남은 시간 뉴튜브 동영상을 살폈다.
의학 지식을 전달하는 동영상.
일상 속 응급처치를 알려주는 동영상 등등.
대부분 의료에 관한 동영상이었다.
요즘 준후는 틈틈이 뉴튜브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의학지식을 채워가고 있었다.
어머니를 집도했던 신경외과 의사 재현은 말했다.
틈틈이 의료 지식을 쌓아두라고 했다.
그러면 동기 부여가 될 뿐만 아니라 혹시나 주변에 문제가 터졌을 때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재현이 의학서적을 아직도 안 보내주고 있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슬슬 가볼까?’
준후는 모처럼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맨 뒤 집을 나섰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뜨거웠다.
계절은 아직 여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가다 보니 같은 시간대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준후와 같은 반인 친구들도 있었다.
“…….”
“…….”
문득 준후와 눈을 마주친 같은 반 친구 2명.
둘은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표정으로 준후의 시선을 피했다.
황급하게 준후를 앞서나갔다.
마치 전염병을 옮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하지만 두 친구의 반응을 준후는 딱히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다.
준후에게 친근한 척 굴었다간 형태 패거리의 다음 희생양이 될 테니까.
정문을 통과해 도착한 1학년 5반 교실.
준후는 창가 가장 뒤쪽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반 교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수다를 멈추고 준후 쪽을 힐끔거렸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분명 친구들은 준후에게 연민, 동정 따위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오늘부로 그 감정은 형태 패거리의 차지가 되겠지만.
“준후야, 방학, 잘 지냈어?”
얼굴이 통통하고 몸이 둥근 학생 한 명이 준후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강영호.
반에서 유일하게 준후를 투명인간 취급하지 않는 고마운 친구.
영호는 형태 패거리가 없을 때면 종종 말을 걸어주었다.
“나야 잘 지냈지. 영호 너는?”
“나는 그동안 밀렸던 게임 실컷 했다. 역시 방학이 천국이라니까.”
말을 마친 영호가 머뭇거렸다.
할 말을 못 하고 있는 눈치였다.
“무슨 할 말 있어?”
“아니, 딴 게 아니고 네가 앉은 자리, 형태 전용석이잖아. 형태 오기 전에 비켜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영호가 교실 문을 한 번 쳐다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준후는 싱겁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는 오늘부터 내 자리야.”
“마음대로 앉아도 되긴 하는데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야, 말만으로도 고맙다. 빨리 네 자리로 가 봐. 형태 오는 것 같으니까.”
준후는 떠밀 듯이 영호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기감을 넓히니 교실로 다가오는 기척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인원은 5명.
특유의 건들거리는 보폭과 발소리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과연 형태 패거리는 금방 교실로 들어왔다.
드르르륵.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형태 패거리가 직진하듯 준후에게 다가왔다.
“야, 서준후. 오랜만이다?”
형태가 준후 옆에 서서 싱글싱글 웃었다.
형태는 신장이 185센티미터로 컸고 덩치도 좋은 편이었다. 예전에 취미 삼아 권투를 했다고도 들었다.
거기에 일진 패거리까지 몰고 다녔으니…….
예전의 준후가 반항할 엄두조차 못 냈던 게 당연했다.
물론 지금이야 귀여운 똥강아지 정도로 밖에 안 보였지만.
“형아가 부탁한 100만 원은 준비해 왔냐?”
“…….”
“근데 잠깐만? 이 새끼 간도 크게 내 자리에 앉아 있네? 너 쳐 돌았어?”
“응. X까.”
준후는 다짜고짜 중지부터 치켜세웠다.
원래 이렇게 유치하게 나갈 생각은 없었다.
무림에서 삼십 년 동안 정파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육체와 정신을 정갈하게 갈고 닦지 않았던가.
하지만 형태에게 당한 앙금은 너무 깊었다.
그래서 평범한 방식으로 복수해서는 속이 안 풀릴 것 같았다.
적어도 형태를 다룰 때만큼은 고등학생답게 가자.
준후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 이 X새끼가 방학 때 대체 뭘 처먹은 거야? 주제 파악이 안 되니?”
“응. X까라고.”
“와! 개학 첫날부터 기분 잡치게 만드네.”
후우우웅.
형태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형태의 주먹은 느리고 느렸다. 하품을 열 번쯤은 해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턱!
준후는 형태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아니?”
두 눈을 부릅뜨고 경악하는 형태.
설마 자기 주먹이 이렇게 쉽게 간파될 줄은 몰랐겠지.
준후는 왼손으로 받아낸 형태의 주먹을 종잇장처럼 구겨나갔다.
그러자 형태가 으악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꺼져.”
준후가 형태를 밀어내자 형태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
“…….”
준후의 반격에 교실은 충격에 휩싸였다.
형태 패거리는 물론이요 반 친구들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라면 나동그라졌어야 하는 건 준후였으니까.
준후는 책상에서 일어나 형태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섰다.
형태가 막 몸을 일으키는 참이었다.
어떻게 복수해야 복수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준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차갑게 웃었다.
정파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복수를 하지 않고 또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파인의 미덕은 권선징악이었다.
선을 행하되 악은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형태를 손봐주는 건 신념에 어긋나지 않았다.
“김형태. 안 덤비고 뭐 해? 설마 네가 만만하게 보던 찐따한테 쫄았어?”
“X랄. 넌 오늘 뒈졌다.”
준후의 도발에 넘어간 형태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어설프게나마 복싱 자세를 취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쎄에에엑.
쎄에에엑.
또래들을 괴롭히기엔 충분한 주먹이었지만 준후를 타격하기엔 솜방망이만도 못한 주먹이었다.
준후는 뒷짐을 진 채 형태의 주먹을 전부 흘려냈다.
이거 원 신생아의 주먹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시시해도 너무 시시했다.
사실 무공과 내공을 쓸 수 있는 시점에서 준후는 지구상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한 인간이 되었다.
형태 따위는 당연히 한 트럭이 와도 상대가 안 됐다.
빠아아악!
회피만 하던 준후가 발차기로 형태의 발목을 걷어찼다.
쿵!
“아으으윽!”
형태가 꼴사납게 자빠졌다.
가격당한 발목을 부여잡으며 낑낑거렸다.
“허접한 새끼. 엄살떨지 마.”
준후는 쓰러진 형태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형태 패거리가 형태를 감싸려고 전진했다가 준후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하고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준후의 싸움 솜씨를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은 것이다.
“그래도 난 양심적인 인간이야. 딱 내가 당한 만큼만 돌려줄게. 나약한 네가 그걸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너…… 대체 방학 때 무슨 짓을…….”
“뭐야? 드디어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는 거야?”
준후가 빈정거리며 형태를 손봐주려는 순간.
담임선생이 교실로 들어섰다.
교실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김형태, 서준후! 너희 뒤에서 뭐해?”
“형태가 넘어져서 일으켜주고 있습니다.”
준후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형태를 부축했다.
“수업 끝나고 옥상으로 올라와. 진짜 지옥이 뭔지 알려줄게.”
준후의 속삭임에 형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형태도 이제야 감이 온 모양이었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위치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 * *
쓰으으읍. 하아아아.
교실 앞 화장실 형태는 몰래 챙겨온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 대를 다 피우고도 분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아서 연거푸 한 대를 더 물었다.
“망 잘 보고 있지?”
“걱정 마. 우리가 언제 담배 피우다 걸린 적 있냐?”
형태의 말에 승호가 대답했다.
승호는 형태의 옆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발목은 좀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잠깐 방심해서 맞았을 뿐이야.”
형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사실 발목이 퉁퉁 부어서 살짝만 움직여도 시큰거렸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준후 따위에게 완패를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X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형태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굴만 반반한 찐따가 어떻게 자신을 압도할 수 있었는지를.
설령 방학 때 격투 학원을 다녔다고 해도 말이다.
싸움 솜씨라는 것이 그렇게 빨리 늘 수는 없는 법이었다.
준후와 형태 사이에 엄연히 체격 차이도 존재했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형태는 자신이 아까부터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했다.
“솔직히 형태, 네가 그렇게 당할 줄은 몰랐다.”
“X발. 당하긴 누가 당해! 말했잖아. 잠깐 방심했다고.”
승호의 말에 형태가 발끈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준후, 그 새끼 이유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던데?”
“그래 봤자 찐따는 찐따야. 다시 싸우면 발라버릴 수 있어.”
“확실해?”
“너 이 새끼 아까부터 은근히 준후 새끼 편든다?”
형태는 승호를 사납게 꼬나보았다.
이게 지금 불 난 집에 기름을 붓고 있네?
“그런 게 아니라 좀 불안해서 그래. 우리가 다 덤벼도 준후를 못 이길 것 같아서.”
“어휴, X신 새끼. 넌 X알 떼라. X알이 아깝다.”
“아아아악!”
형태는 승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제야 좀 분이 풀렸다.
준후 새끼가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단단히 짓밟는다.
형태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형태는 패거리와 교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의 전용석을 차지하고 있는 준후와 눈을 마주쳤다.
준후의 눈빛이 맹수와도 같아서 형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아, X발!
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쫄보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