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18화 (18/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18화

제4장 응급처치(3)

새벽 4시.

풀고 있던 교재를 덮고 준후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무림을 경험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 넘는 시간이 지나 버렸다.

이틀 뒤에는 무려 수능이 준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참 빨리 가네.’

준후는 달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난 세월이 빠르게 읽는 책의 페이지처럼 펄럭펄럭 넘어갔다.

형태 패거리를 응징한 이후.

준후의 삶은 안정과 평화를 되찾았고 덕분에 준후는 외과의가 되고자 하는 목표에 매진할 수 있었다.

첫째. 수능 만점.

둘째. 외과의 재현이 보내준 의대생 전공 서적 공부.

셋째. 해외 연수를 대비한 영어 말하기 듣기 공부.

평범한 사람이 이룰 수 없는 세 가지 목표를 준후는 기어이 정복해 냈다.

최고의 효자는 두뇌 영양제와 총명탕을 먹고 펼치는 운기조식이었고.

두 번째 효자는 언어중추를 자극하는 추궁과혈법이었다.

무림에서 남다른 힘을 얻었기에 준후는 남다를 성취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드르륵.

준후는 서랍을 열고 성적표를 살폈다.

6월에 치른 모의 수능평가 성적표였는데.

준후는 재학생과 재수생들이 펼치는 시험에서 만점을 획득했다.

예상하고 있던 바라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윽고 준후의 시선이 책장으로 옮겨졌다.

책장에 꽂힌 의학서적을 준후는 이미 3번 넘게 읽었다.

그 덕분일까.

준후의 의학지식은 의대 본과 3학년생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당연하게도 영어 말하기와 듣기에서도 엄청난 성과가 있었다.

준후는 벌써 영어로 프리토킹이 가능했다.

작년부터는 영호에게 따로 수업도 받지 않았다.

수업 마지막 날, 스승 영호는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서준후, 그만 하산 해.

지난 시절을 곱씹던 준후가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가로지르며 인근 약수터를 찾았다.

준후는 걸치고 있던 패딩을 벗고 무공 초식을 소화했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주먹과 발차기가 매섭게 허공을 찢어발겼다.

준후의 몸동작은 굳건하면서 유연했고, 빠르면서도 강력했다.

무림에서 활동하던 당시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준후는 충분히 강해졌다.

일류무사에 가까운 수준까지 도달했다.

준후는 지구에서 가장 강한 사내였으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준후뿐이었다.

속된 말로 힘숨찐이 된 상황.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 준후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충분히 몸을 단련한 후 준후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공부를 하다가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했다.

2년이 지나는 동안, 가정에도 꽤 큰 변화가 있었다.

희소식이라면 아버지의 사업 빚을 완전히 갚아 저축을 할 수 있게 된 점이었다.

저축이라는 꿈이 생겼기 때문일까.

부모님은 일을 줄이지 않고, 준후가 말렸음에도, 예전의 업무량을 고집했다.

준후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건 평소 부모님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부모님을 진맥하고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추궁과혈도 실시했다.

그 덕분일까.

부모님은 지난 2년간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지냈다.

어머니의 뇌동맥류도 재발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모레면 수능이구나. 긴장되지는 않니?”

식사 도중 아버지가 물었다.

“간장은 아는데 긴장은 모르겠네요.”

준후는 자못 너스레를 떨었다.

워낙 공부를 열심히 해놓은 데다가 무림을 경험하고 강심장을 얻은 준후였다.

너스레에는 근거가 있었다.

“원 녀석도.”

“준후야 몸 관리만 잘해도 문제없죠. 감기만 안 걸리게 조심하렴.”

“네, 어머니.”

그렇게 아침 식사는 화목하게 끝났다.

교복과 패딩과 책가방을 챙겨 준후는 학교를 찾았다.

3학년 복도를 지나던 중 슬쩍 3학년 3반 교실을 응시했다.

형태가 구석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1학년 때 준후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형태는 공기 같은 아이가 되었다.

그 존재감이 극도로 희미했다.

한 학년 휘어잡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 자업자득이었기에 준후는 형태가 티끌만큼도 불쌍하지 않았다.

일체의 연민도 느끼지 않았다.

1반 교실에 도착한 준후는 책가방을 풀고 반 친구들과 잡담을 나눴다.

고등학교 학창 시절이 슬슬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새로운 무대가 될 의대가 준후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 * *

학교 수업이 끝났다.

나머지 공부를 같이하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준후는 인근에 있는 공연·예술 고등학교를 찾았다.

때마침 예술고 학생들이 우르르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가수나 배우 또는 방송계통을 생각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준후의 외모는 전혀 꿀리지 않았다.

준후도 퍽 잘생긴 편에 속했으니까.

예술고가 가까워서인지 몰라도.

아이돌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몇 번 받아보았을 정도였다.

물론 준후는 다 거절했다.

춤과 노래를 끝내주게 소화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 길은 준후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었다.

“야, 쟤 엄청 멋있지 않냐? 벌써 데뷔한 남돌 같은데?”

“에이, 설마. 그럼 저렇게 대놓고 다니려고.”

“이름이 안 알려졌을 수도 있지.”

스쳐 간 여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준후는 피식 웃었다.

재수 없을지 몰라도 평소에 자주 듣는 이야기였다. 귀에 굳은살이 박힌 이야기였다.

정문 근처를 서성거리던 도중.

준후는 익숙한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지애였다.

CPR 경연 대회에 함께 출전했던 전우 말이다.

“잘 지냈어?”

“못 지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지.”

준후의 질문에 지애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모레가 수능인데 긴장되지 않아?”

지애는 부모님과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실력대로 보면 되는 거지. 긴장할 필요가 있나.”

“오올~ 서준후는 좀 멋있는데?”

“근데 왜 보자고 했어?”

“딱히 해줄 건 없고. 수능 전에 누나가 맛있는 것 좀 사주려고.”

“영광입니다. 누님.”

준후가 지애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두 사람은 가까운 돈가스집으로 이동했다. 지애가 한사코 돈가스를 사주고 싶다고 해서 준후는 그러라고 했다.

성의와 배려를 밀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지애, 넌 수능 안 친다고 했지?”

“응. 딱히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배역도 나름 잘 들어오고 있고.”

“하긴 할 일이 명확하면 대학에 목매달 필요는 없지.”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그 건은 어떻게 됐어?”

“히히. 확정됐어. 다음날 초에 촬영 들어갈 거야.”

“이야, 잘됐네. 이러다가 진짜 대 배우 되겠는데?”

기쁜 소식을 듣고 준후는 지애를 축하해 주었다.

지애가 공중파 드라마의 여주인공 아역에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다.

이 역할은 지애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 중 비중이 가장 컸다.

“이번에 빵 떠서 여기저기서 캐스팅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거야. 넌 재능도 있고 성실하니까.”

“칭찬해도 돈가스는 더 못 준다?”

지애가 포크와 나이프로 자신의 그릇을 방어했다.

준후가 일찌감치 돈가스를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들켰나…… 는 농담이고. 지애, 넌 잘 될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준후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동갑내기를 만났지만 지애는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아이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끈기가 있었다.

의외로 성숙한 구석도 있었고.

“땡큐. 너도 좋은 의사 될 거야. 내가 보장할게.”

“보장이 맨입으로 되나.”

준후는 지애의 방어를 뚫고 돈가스 하나를 날름 빼앗아 먹었다.

입술을 뾰족하게 내민 지애가 귀여웠다.

지애가 배우생활에 전념하고 준후가 의대에 들어가면 이런 좋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그래서일까.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면서도 벌써부터 그리운 준후였다.

“자, 받아. 원하는 의대에 철석같이 붙으라고 주는 거야.”

헤어지는 길에 준후는 지애에게 엿을 선물로 받았다.

입에 넣은 엿은 달콤했지만 금방 녹아버렸다.

* * *

다음 날 오전.

준후는 지하철을 타고 가까운 고등학교로 이동 중이었다.

예비 소집일이라서 수능을 치를 장소에 미리 가보는 길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친구들이 함께 가자고 제안했으나 준후는 거절했다.

수능이 가까울수록 이상하게 감성적이 된 준후였다.

시험을 치를 반과 자리를 확인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아영.

현재 같은 반 생활을 하는 여학생이었다.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가끔 대화도 나누는 사이였다.

“우리, 같은 반에서 시험 치네?”

“응. 그러네.”

준후가 말을 걸자 아영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너도 혼자 왔어?”

“그냥…… 혼자 걸으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거든. 어쨌거나 준후 네가 같은 시험장에 있으니까 든든할 것 같긴 해.”

“이하동문.”

아영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서 준후는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이 같다는 건 알았지만 아영과 동행하지는 않았다.

앞서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했으니까.

그런데 인적이 드문 신축 빌라 공사 현장을 통과할 때였다.

껄렁껄렁해 보이는 20대 서너 명이 준후의 앞길을 막았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너희들, 그냥 비킬 생각은 없어 보이네.”

“미친 새끼. 졸라 태연한 척하네. 따라와.”

불량배들이 공사 현장으로 이동했고 준후는 불량배들의 뒤를 따랐다.

CCTV가 없는 장소는 오히려 준후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장소였다.

“형들이 오늘 유독 기분이 안 좋다. 돈은 필요 없고 몇 대 맞고 가자.”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가.”

준후는 거만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준후의 건방진 태도에 불량배들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 자식은 이 지경이 되도록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

한 대 맞고 끝낼 걸 열 대를 맞고서 끝내고 싶다는 건가.

불량배 한 명이 성큼성큼 다가와 주먹을 휘둘렀다.

턱!

준후는 손바닥으로 청년의 주먹을 붙잡았다.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 청년의 주먹이 준후의 손바닥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으드드득.

“아아아악! 내 손!”

준후가 주먹을 움켜쥐자 청년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준후는 망설임 없이 청년의 턱을 올려 찼다.

퍼어어억!

청년이 나동그라지자 뒤에 있던 불량배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파바바밧.

준후는 보법을 밟으며 불량배들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진 거리.

불량배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놀란 눈을 깜빡거리는 것뿐이었다.

퍽! 퍽! 퍽! 퍽!

호권, 정권으로 명치 후려치기.

귀신각, 돌려차기로 옆구리 가격하기.

후신퇴, 로우킥으로 발목 부숴 버리기.

준후는 정확히 한 번의 가격으로 한 명의 불량배를 때려눕혔다.

격투기 세계 챔피언 100명을 데리고 와도 준후 한 명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인데.

동네 불량배 네 명을 상대하는 일쯤이야 우스웠다.

“으으으윽.”

불량배들은 어느새 공사장 흙을 뒤집어쓴 채 신음을 흘리기 바빴다.

준후를 괴물 보듯이 쳐다보기 바빴다.

“입만 털 줄 알고 실속은 하나도 없네. 너희 같은 부류들이 다 그렇지, 뭐.”

준후는 대장으로 보이는 화살코에게 다가갔다.

화살코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표정으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수능 예비 소집 일에 평소 본 적도 없는 불량배가 자신을 습격한다?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짧은 고민 끝에 금방 대답이 나왔다. 이 모든 게 결코 우연일 리 없다고.

준후는 화살코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몸을 일으켰다.

“너희 형태가 시켰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