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19화
제4장 응급처치(4)
형태는 자기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
눈길은 연신 책상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향했고 치아는 손톱을 물어뜯기 바빴다.
수능 전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형태에게는 수능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존재했기에.
지이이잉.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한 번호, 기다리고 있던 번호로 연락이 왔다.
‘드디어 원수를 갚는구나.’
희소식이 들려 올 것을 확신하며 형태는 책상으로 향했다.
계획에 실패했다면 그들은 형태에게 전화를 못 했을 것이다.
“네. 여보세요.”
-어, 형태냐?
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형태가 작년부터 기를 써서 친해진 동네 건달 현진의 목소리였다.
거금 50만 원을 써서 형태는 현진에게 준후를 담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도 특별히 수능 전날에.
얄미운 준후 새끼가 고통에 몸부림치도록.
1년을 통째로 날려 버리게 만들기 위해서.
“네. 형님. 부탁드린 일은 잘 해결됐나요?”
-X밥 찌끄러기 고딩 하나 패주는데 해결 씩이나. 그건 그렇고 지금 빌라촌 근처, 공사장으로 올래?
“괜찮습니다. 형님들이 어련히 잘 해주셨겠죠.”
-그래도 몰골을 확인해야 속이 후련하지 않겠어? 그러려고 의뢰했던 거 아니었나?
현진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좋은 쇼를 기획해놓고 시청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그래서 형태는 곧 가겠다고 대답한 후 패딩을 걸치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뭐랄까.
형태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드디어 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준후에게 쥐어 터진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그때부터 형태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일진 패거리는 공중분해 되었으며 반 친구들은 형태를 경멸했다.
그래서 단 한 명의 친구조차 제대로 사귈 수 없었다.
드높았던 형태의 자존심이 똥통으로 처박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외롭고 괴로웠던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형태는 남몰래 칼을 갈았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준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지금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다.
X새끼.
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어른 불량배를 상대하는 건 역부족이지.
암, 그렇고말고.
모든 건 날 건드린 죄니까 달게 받아라. 크크크.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형태는 공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날이 추워서인지 공사장은 사람이 없고 어두웠다. 안쪽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형님들, 어디 계세요?”
입구를 통과한 형태가 공사장 중심부로 접어들었다.
그곳에 형태가 기다리고 있던 현진 패거리가 서 있었다.
“아…….”
현진 패거리의 몰골을 확인한 순간, 반사적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언가 일이 단단하게 꼬였음을 형태는 직감했다.
현진의 왼쪽 눈두덩이 판다처럼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다른 불량배들도 하나 이상의 하자가 있었는데.
다리를 절거나 입술이 터졌거나 한쪽 팔을 못 쓰는 식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형태는 문득 떠오른 가소로운 생각을 부정했다.
“그놈이 세긴 하죠? 형님들도 진짜 고생이 많으셨네요.”
“…….”
“형님?”
형태가 말을 걸었지만 현진과 불량배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잘 익은 벼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무겁고 불길한 침묵 때문일까.
형태는 팔뚝에 소름 돋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등 뒤에, 공사장 입구에 어느새 준후가 서 있었다.
현진 일행과는 달리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준후가.
꿈인가 싶어서 눈을 비볐지만 준후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부정했던 불안이 치솟아 올랐던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터벅. 터벅.
준후가 형태 쪽으로 다가왔고 형태는 속절없이 뒷걸음질만 쳤다.
그러다가 공사장 벽면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너, 옛날에 하던 못된 버릇, 아직도 못 고쳤더라?”
준후의 목소리는 겨울바람보다 차가웠다.
형태는 한기를 느끼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X발, 너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는데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형태는 용기를 내어 바락 소리를 질렀다.
“형님들, 저랑 같이 이 새끼 손 봐주세요. 같이 싸우면 이길 수 있어요.”
형태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현진 패거리는 망부석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저, X신 새끼들!
온갖 가오는 다 잡더니 고딩 하나 제압 못 해서 얻어터지는 팔푼이 새끼들!
“우리 귀여운 형태 씨. 상황 파악 좀 하세요. 대가리는 장식으로만 쓰지 말고 생각을 좀 하시라고요.”
준후가 빈정거리며 검지로 형태의 검지를 톡톡 쳤다.
딱밤에 트라우마가 있었던 형태는 화들짝 놀라 바닥에 털썩 앉고 말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젠 인정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자신의 계획이 X됐다는 것을.
* * *
준후는 팔짱을 낀 채 형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형태가 개과천선 했을 거라고는 준후 역시 믿지 않았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과오를 인정하고 새 출발을 하는 사람.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
형태는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형태가 갱생이 가능한 인간이었다면 말이다.
준후를 그렇게 악독하게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싸움에서 밀리니까 과도를 휘두르지도 않았을 테고.
녹음기를 이용해 준후를 학폭의 가해자로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준후는 형태가 갱생은 못 하더라도 학창 시절 동안은 얌전하게 지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고.
그게 최소한의 인성이었기에.
그런데 놀랍게도 형태는 수능 전날 준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악독한 계획을 실행했다.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이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준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현대가 무림이었으면 자신의 손으로 형태를 죽였을지도 몰랐을 테지만 현대는 무림이 아니었다.
자경 활동은 불가능했으며.
살인 행위 역시 법적으로 금지가 되어 있었다.
‘안 돼. 너무 멀리 왔다. 준후야.’
준후는 악(惡)에 사로잡히려는 마음을 간신히 붙들었다.
악을 미워하다가 악이 되어버린 정파인들을 꽤 많이 지켜본 준후였다.
그 어두운 길은 결코 밟아선 안 됐다.
그렇다면 악에 물들지 않고 악을 처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상대가 자신에게 하려고 했던 행위를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너희들, 이리 와.”
준후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현진 패거리가 준후 곁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이 친구, 내일 수능 못 보게 손 봐줘.”
“야, 준후야. 그건 좀 심하잖아!”
잠자코 있던 형태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날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드디어 현실을 자각한 걸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수능은 치르게 해주라. 맞는 건 얼마든지 맞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수능만은…….”
“…….”
“응? 제발.”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형태를 보고도 준후는 손톱만큼의 연민과 동정도 느끼지 못했다.
형태는 자기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만 필사적인 놈이었다.
본인이 불량배를 시켜서 준후의 수능을 망치려고 했던 일은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인간 쓰레기였다.
형태를 용서하려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쯤은 되어야 할 텐데…….
애석하게도 준후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김형태.”
준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형태의 이름을 불렀다.
“네 무덤을 판 건 너야. 이 X랄을 안 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거잖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아직 고3이라고. 바보 같은 실수도 할 수 있고 후회할 짓을 할 수도 있어.”
“하긴 고3이면 아직 미성년자니까 실수할 수도 있겠지.”
준후의 대답이 너그러운 기색을 띠자 형태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응.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나도 오늘 실수 좀 하자.”
준후는 차갑게 웃으며 뒤를 돌아 공사장 입구로 걸어갔다.
그런 준후의 뒤를 둔탁한 타격음과 비명소리가 뒤따랐다.
* * *
그날 저녁.
준후는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마친 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정리해 둔 노트를 빠르게 훑는 중이었다.
전 과목을 다 살피고 나니 벌써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다른 학생들이라면 컨디션 관리를 위해 진작 잠들었겠지만 준후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피로함을 느낄 때쯤.
가부좌를 틀고 30분 정도 운기조식을 했다.
그러자 몇 시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과 마음이 개운했다.
마치 리셋 버튼을 누른 것처럼.
준후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태를 손봐준 일에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형태는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았을 따름이었다.
무림 정파에서 활동했다고 해서 준후가 우유부단하고 쑥맥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었다.
준후는 냉정했으며 때로는 잔인했다.
그래야만 악인들에게 죗값을 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악인들을 용서하고.
악인들을 선(善)으로 갱생시키려고 했던 정파인들의 말로를 준후는 꽤 많이 지켜봤었는데.
그런 정파인들의 말로는 악인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배신을 당해서 죽거나.
배신을 당한지도 모르고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
그러므로 악인이라도 노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선한 인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그런 생각은 그저 순진한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고 준후는 믿고 있었다.
‘앞으로가 문제겠네.’
준후는 형태를 계기로 자신이 미래에 만날 악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들은 전부 악당 의사일 것이다.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의사.
의료사고를 내고도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의사.
자신의 승진을 위해 동료 또는 후배 의사들을 등쳐먹는 의사 등등.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
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준후는 그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형태를 손 봐줬던 것과는 분명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건 무림이나 현대나 무척 고된 일이기에.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
의사 악당을 벌하기 위해서는 준후의 의술이 그들의 의술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의사의 권력은 무릇 의술에서 시작되는 것일 테니까.
준후는 문득 두 눈을 감고 상상에 빠졌다.
파란 수술복과 수술 마스크, 장갑을 착용하고 수술방에서 집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멀게만 느껴졌던 외과의의 꿈은 이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수능이 끝나고 의대까지 들어가면 훨씬 더 실감이 날 것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준후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신경외과 의사 재현에게 받은 의학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준후의 의학 지식은 벌써 의대 본과 3년 차에 달할 만큼 박식했다.
두뇌 영양제와 운기조식.
뇌 신경 자극술이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말도 안 되는 공부 효율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의대에 들어갈 때쯤이면 의사 고시를 쳐도 될 수준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전 5시까지 공부를 한 준후는 운기조식으로 여독을 풀었다.
드디어 찾아온, 손꼽아 기다리던 수능 당일.
형태 문제도 해결했으니 특별한 변수는 없겠지?
준후는 후련한 마음으로 거실에 나왔다.
이제 남은 숙제는 단 하나.
수능에서 만점을 받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