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20화
제4장 응급처치(5)
준후는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날이 날이었던 만큼 부모님은 말을 최대한 아끼는 모습이었다.
혹여나 응원이나 격려가 지나쳐 준후에게 부담이 될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너무 노심초사하실 필요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요.”
보다 못한 준후는 미소를 띤 채 분위기 전환에 나섰다.
“잠도 잘 잤고 공부도 충분히 했으니까요. 딱히 긴장한 것도 아니니까 청심환 같은 거 안 챙겨주셔도 되고요.”
준후가 속사포로 말을 쏟아부었다.
부모님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수능을 치는 사람은 준후인데 어째서 부모님이 더 속을 태우고 있을까.
이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인 듯했다.
“아들이 똑 부러지게 말을 하니 아빠가 할 말이 없구나.”
“엄마도 그러네.”
“두 분을 안심시키려고 빈말을 한 게 아니라 느낀 대로 말씀드린 거예요.”
“…….”
“심폐소생술로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봤는데 그까짓 수능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준후는 부모님에게 강철 멘탈을 내비쳤다.
무림에서의 경험이 꼭 무공이나 내공처럼 육체와 관련된 장점들과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생사 결전을 거친 준후는 이미 강심장이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준후의 바위 같은 마음을 건드릴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먼 훗날 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되고 외과의로 거듭나도 마찬가지리라.
만약 준후의 멘탈이 흔들린다면 해당되는 경우는 아마 딱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사고나 병으로 부모님이 위독하실 때 말이다.
“요행은 바라지 말고 딱 노력한 만큼의 결과만 거둔다고 생각하렴. 그럼 마음이 더 편할 거란다. 알았지?”
아버지가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수능 만점 받아야겠네요. 모의평가 때처럼.”
“원 녀석도.”
“여보. 포기해요. 이제 우리는 준후를 감당 못 한다니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종료되었다.
준후는 책가방에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과 간식을 담았다.
비닐봉투에 담긴 간식은 초콜릿과 사탕 종류였다.
당이 떨어질 때 먹으라고 챙겨주신 모양이었다.
‘이런 간식도 나쁘지 않지.’
간식을 챙기며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뇌가 가장 좋아하는 영양분은 포도당이었다.
포도당을 섭취하면 뇌는 즉각적으로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이가 있다면 당뇨나 고혈압 때문에 조심해서 먹어야겠지만 준후의 나이에서는 별문제가 될 게 없었다.
“시험장이 어디니? 아빠가 데려다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멀지도 않고 가면서 이것저것 생각도 하고 싶어서요.”
아버지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준후는 패딩을 걸쳤다.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집 근처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하아…….
입으로 숨을 쉬니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오늘은 여타 다른 수능 날의 전통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날씨가 무척 춥다는 뜻이었다.
준후는 버스를 기다리며 오늘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수능은 무림을 경험한 후.
준후가 가장 기다리던 날 중 하나였다.
수능을 잘 마쳐야 꿈에 그리던 의대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능이야말로 외과의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모의평가에서 벌써 만점을 받았기에 시험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준후에게도 단 한 가지 불안 요소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고였다.
시험장에 도착하기 전에 교통사고 같은 특별한 재앙을 마주치는 일이었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고만큼은 제아무리 준후라도 피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준후는 시험장에 도착할 때까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기로 했다.
그 이후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준후는 2년 넘게 모아온 내공을 하나의 망 형태로 주변에 분산시켰다.
망 형태로 뻗어 나간 내공을 자신의 감각과 연결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각·청각·촉각·미각·후각 등을 예민하게 가다듬었다.
사고가 벌어진다면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사전 조치를 해놓은 상태로 준후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준후처럼 수능 시험장으로 향하는 고3 학생들이 많아 보였다.
동승하는 학생들에게서 준후는 동질감을 느꼈다.
다들 고생하는구나.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게 살아남기 위해서.
아직 학벌과 지연이 만연한 이 나라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서.
“야.”
준후는 버스 안에서 영호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했다.
수능을 앞두고 긴장했는지 영호의 반응이 평소보다 느렸다.
“어. 준후야. 너도 일찍 나왔구나.”
“지각해서 수능을 못 치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잖아. 근데 넌 좀 피곤해 보인다?”
“잠을 많이 못 잤어. 뒤척이다가 한 네 시간 정도 잔 것 같아.”
영호가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준후는 영호의 사연을 접수하고 곧장 점혈에 나섰다.
우선 심중혈과 천중혈을 자극해서 긴장을 풀어주고.
후두부 쪽을 내공으로 자극하기도 했다.
후두부에는 RAS(망상 활성계)가 위치해 있는데 이 부위를 내공으로 적당히 자극하면 뇌를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동안 의대 본과 공부를 하면서 얻은 해부학적 지식을 내공과 접목시킨 것이다.
해당 점혈법은 중독성이 없으며 지속시간이 4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잠을 못 잔 영호에겐 안성맞춤인 점혈법이었다.
“와, 이거 뭔데? 갑자기 머리가 쌩쌩 돌아간다?”
점혈을 받은 영호가 놀란 부엉이 눈을 했다.
“내 손이 약손인 거 잊었어?”
“역시 형님은 진정 화타의 재림이십니다. 감탄했습니다.”
준후의 점혈 덕을 톡톡히 본 영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잠시 후 영호가 버스에서 내렸다.
준후와는 수능을 치는 시험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평소 공부를 잘하고 또 열심히 하는 영호고.
점혈까지 받았으니 제 실력을 발휘하기엔 부족함이 없으리라.
[다음 정거장은 진정 고등학교 정문입니다.]
버스 안내 방송을 듣고 준후는 내릴 준비를 했다.
교통카드를 찍고 문 앞에 서서 버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무슨 사고가 터질까 걱정했지만 전부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지이이잉.
버스 문이 열리고 하차하려던 준후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직 거두지 않은 기감이 위험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점차 선명해지는 불길한 배기음이 들렸던 것이다.
“뭐해요? 안 내려요?”
“길 막지 말고 빨리 내려요.”
주변에서 아우성을 치기 무섭게 오토바이 한 대가 버스 후문을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오토바이가 남기고 간 찬바람이 버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
“…….”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흐르는 버스.
준후가 곧바로 내렸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다들 뒤늦게 음미를 하고 있었다.
‘역시 세상은 요지경이라니까.’
준후는 안전을 확보한 후에야 버스에서 내렸다.
저만치 달아나 버린 오토바이를 응시했다.
방심을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고.
방심을 하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준후가 제아무리 무림을 경험했더라도 대비를 하지 않고서 오토바이를 피할 순 없었으니까.
거친 오토바이 운전자가 못내 미웠지만 준후는 그 사실을 마음에서 지웠다.
저런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라면 언제든 스스로 화를 재촉해서 벌을 받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5분가량 걸어 도착한 진정 고등학교 정문.
각 학교의 학생들이 응원을 하고 있어 정문 앞이 떠들썩했다.
“준후 선배, 파이팅입니다!”
“모의평가처럼 수능도 만점 가즈아!”
준후는 아는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응원을 받은 후 정문을 통과했다.
기감은 그제야 거두어들였다.
* * *
교실에 도착한 준후는 자리를 찾아 책가방을 걸었다.
수능 당일답게 교실은 고요했다.
떠드는 사람은 없었으며 각자 자기만의 요약 노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다들 분위기가 사뭇 비장했는데 여유가 넘치는 건 준후 뿐인 듯했다.
준후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교실로 돌아가는데 때마침 복도에 아영이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이자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치르는 동료 말이다.
아영과는 어제 잠깐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영아, 춥지 않아?”
준후가 아영에게 다가가 물었다.
“안에는 너무 덥더라고. 뭔가 집중력이 느슨해지는 기분이라.”
“내가 마사지 같은 거라도 해줄까? 자신 있는데.”
“미안하지만 성의만 받을게.”
영호와 달리 아영은 준후의 점혈을 거절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준후와 아영은 크게 친하지 않았던 데다가 남녀 간의 스킨십은 남자 간의 스킨십과는 결이 또 달랐으니까.
그래서 준후도 억지로 점혈할 생각은 없었다.
“어때? 긴장되지는 않고?”
“긴장이 아예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참을 만해. 다른 사람들도 다 견디고 있을 텐데 뭐.”
아영의 대답이 퍽 의젓했다.
준후가 아는 아영은 어른스럽고 사려 깊은 아이였는데 방금 그 대답에서 아영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근데 준후, 넌 긴장이라고는 1도 없는 표정이다?”
아영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만점은 따 놓은 거나 다름없다는 표정이랄까?”
“들켰네. 모르는 사이에 텔레파시라도 익혔나?”
“그냥 그런 분위기가 느껴져서. 준후 넌 평소부터 특별하기도 했고.”
“내가?”
“응.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주변 친구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아영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묘한 준후였다.
그러고 보니 준후는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다면 남들 앞에서 꿇릴 것이 없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너랑 같은 반에서 시험을 치르게 돼서 엄청 든든한 거 알아?”
“아침부터 영광이네. 아, 참, 아영이 너도 의대가 목표라며?”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아영은 반에서는 2등, 전교에서는 3등 안에 들 만큼 공부를 잘했다.
똑 부러진 외모만큼이나 공부도 잘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똑순이겠는가.
“응. 맞아.”
“수능 잘 쳐서 같은 의대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파이팅하고 여기 너무 오래 있지 마.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고마워.”
해맑게 웃는 아영과 헤어진 후 준후는 자리로 돌아왔다.
챙겨온 두뇌 영양제를 먹고 운기조식을 펼쳤다.
머리가 쌩쌩 돌아가는 게 수능 만점을 못 받으면 그게 더 괴상한 일이 될 것 같았다.
* * *
짧게 운기조식을 하고 준후는 눈을 떴다.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시간은 오전 8시 10분이었다.
마지막 입실시간이자 1교시 국어영역이 고작 30분 남은 시점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교실을 훑다가 준후는 아영이 자리에 없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화장실에 갔나 싶었는데 몇 분이 지나도 아영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저기요. 감독관님 좀 불러주세요. 여기, 학생이 힘들어하는데요?”
“무슨 일 있어요?”
복도 쪽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분위기에 이끌린 준후는 자리를 박차고 복도로 나왔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을까.
아영은 차가운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으며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렸다.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아영 주변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하필이면 수능이 곧 시작되는 시점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너랑 같은 반에서 시험을 치르게 돼서 엄청 든든한 거 알아?
-고마워.
아영과 나눴던 대화.
아영이 지었던 미소를 떠올린 준후는 황급히 아영에게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아영의 상태를 살폈다.
아영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는 몰랐다.
하지만 준후는 아영이 정상적으로 수능을 치르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건강하게 수능을 보게 해주고 싶었다.
이대로 허망하게 1년을 날려버린다면 아영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내겐 의대 본과 3년 차의 의학 지식이 있어.
의학 지식을 총동원한다면
무공의 도움을 받는다면 아영이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각오를 다진 준후는 아영의 어깨부터 가볍게 흔들었다.
“아영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