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21화
제5장 의대생(1)
“아영아, 괜찮아?”
준후의 다급한 물음에 아영은 대답이 없었다.
시선은 여전히 땅바닥을 향했으며 호흡은 전력질주를 마친 마라톤 선수처럼 가빴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구름처럼 번져 나갔다.
의식이 있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니 준후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이럴수록 침착해야지.’
무림을 경험한 덕분일까, 준후는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경험이나 버릇과 습관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긴 시간 속에 연마한 무언가는 결코 잊어버리지도, 잃어버리지도 않기에.
“아영아, 괜찮아?”
준후는 한 번 더 물었으나 아영은 역시 대답이 없었다.
준후는 의사소통을 배제하기로 했다.
현재 아영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호흡곤란으로 보였다.
호흡이 너무 불안정하고 거칠었으며 스스로 호흡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폐렴.
급성호흡 증후군.
아나필락시스.
천식.
기흉.
총 다섯 가지의 Rule out(의증, 의심하는 증세)를 떠올린 준후는 하나하나를 빠르게 확인해 나갔다.
우선 아영의 이마에 손을 얹었는데.
아영의 이마는 미지근했다.
고열은커녕 미열의 증후조차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폐렴을 가장 먼저 제거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심각한 호흡곤란을 일으킬 폐렴에 걸렸다면 아영에게는 미열이라도 존재해야 했다.
준후는 다음으로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Acute Respiratory Distress Syndrome, ARDS)를 의심했다.
다만 급성호흡 증후군을 일으키는 원인은 60여 가지로 일일이 세기 벅찰 정도였다.
그래서 아영의 상황에 맞는 원인과 증상만을 추려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세균이나 감염물질이 급성으로 아영의 폐에 진입했다면 말이다.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구토물질이 폐에 막히는 상황이 가장 그럴 듯 하기는 한데…….
‘ARDS도 아닌 것 같다.’
준후는 고개를 저으며 급성호흡 증후군 또한 쳐냈다.
아영과 엄청 친하고 아영을 엄청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아영이 오전에 무언가를 먹는 걸 본 적이 없는 준후였다.
‘배가 부르면 나른해지더라’는 아영의 말도 언젠가 들은 것 같았다.
그런 아영이 수능 직전에 음식을 섭취한다고?
그럴 리 없었다.
“혹시 이 학생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
준후는 먼저 현장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한 5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아, 네, 감사합니다.”
주변인의 대답을 듣고 준후는 미련 없이 급성호흡 증후군을 리스트에서 제거했다.
5분 전에 급성호흡 증후군이 발병했다라…….
그렇다면 아영은 벌써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급성호흡 증후군 치고는 증상이 약한 셈이다.
진찰을 하던 준후는 문득 손목시계를 응시했다.
아영이 호흡곤란을 호소한 지 7분째.
준후가 현장에 도착한 지 1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준후는 1분 만에 본인이 가진 의학 지식으로 야무지게 두 개의 의증을 배제한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진단력이었지만.
지금은 본인의 진단에 만족할 때가 아니었다.
아영의 상태를 정상으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의사의 5분과 응급 환자의 5분은 그 가치와 무게가 다르다.]
올해 초 한 의학 에세이에서 읽은 멋진 문구였다.
준후는 아영을 진료하면서 그 문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폐렴.
급성호흡 증후군.
그다음으로 준후가 의심한 질환은 아나필락시스였다.
아나필락시스 전신 알레르기 반응으로 심하면 호흡곤란과 심정지를 일으켰다.
계절이 겨울인 만큼.
꽃가루 알레르기, 또는 벌에 쏘여서 아영이 아나필락시스를 일으켰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영의 목 주변을 살피고.
상의 소맷자락을 걷어본 결과 두드러기 반응 또한 보이지 않았고.
응급상황에서의 진단과 처치는 시간 싸움이었기에 준후는 신속하게 다음 진단으로 넘어갔다.
아영을 위해 지금까지 쌓아온 의학지식을 남김없이 발휘하기로 했다.
* * *
‘천식은 무조건 아니지.’
준후는 천식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제거했다.
아영의 지인이라서 할 수 있는 과감한 판단이었다.
아영은 천식 환자가 아니었다.
물론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관찰만으로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아영은 평소 체육 시간에 열심이었다.
숨이 차는 운동을 어렵지 않게 소화했다.
천식 환자라면 응당 소지해야 할 천식 휴대용 흡입기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다.
사용하는 것조차 본 적이 없었고.
그렇다면 남은 질환은 기흉인데…….
기흉이야말로 준후가 가장 원치 않았던 질환이었다.
그 때문일까.
과감하게 진료를 하던 준후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기흉이란 흉막에 공기가 차서 폐를 압박하는 질환이었다.
흉부외과에서 초응급을 다투는 질환으로 제때 치료받지 못하면 환자는 폐가 찌그러져 죽고 만다.
기흉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자발성 기흉.
키가 크고 마른 10-20대 남자가 주로 걸리는 기흉인데.
아영은 또래의 여자아이치고 키가 큰 편이긴 했다.
172센티미터 정도 됐으니까.
또 다른 하나는 외상성 기흉으로 흉부 외상으로 인한 갈비뼈 골절 등이 기흉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아영이 어딘가에 가슴을 강하게 부딪쳤다면.
외상성 기흉이 발생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까 모든 정황은 아영이 기흉에 걸렸다는 걸 가리키고 있는 셈이었다.
‘기흉만은 아니길 바랐건만.’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기흉이라면 아영은 당장 큰 병원 응급실로 가야 했다.
부풀어 오른 흉강에 구멍을 뚫는 흉강천자술을 받아야 했다.
구멍을 뚫어 폐를 짓누르는 공기를 빼줘야 했다.
수능은 당연히 볼 수 없었고.
“무슨 일이에요?”
뒤늦게 소식을 아영의 소식을 들은 감독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 학생이 갑자기 쓰러져서요. 한참 동안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어요.”
“혹시 119에 신고했나요?”
“네. 제가 했습니다.”
아영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감독관에게 보고를 했는데.
그동안 준후는 응급처치를 고심하고 있었다.
일단 아영이 기흉이라고 가정했을 때.
아영은 기흉을 앓은 지 10분이 지났다.
119가 도착했다고 해서 흉강천자술을 할 수는 없으니 이송을 가고 흉강천자술을 받는 데까지 족히 30분은 더 소요될 것이다.
과연 아영이 앞으로 30분을 더 버틸 수 있을까.
준후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렇다면 의학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볼펜을 사용한 흉강천자술을 해야 하는 걸까.
볼펜을 사용한 흉강천자술.
이것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지만 흉부외과의의 자문을 통해 만들어진 처치법이라고 했다.
해부학에 빠삭한 준후라면 소화 가능한 처치법이기도 했고.
그런데도 준후가 쉽게 나설 수 없었던 두 가지 이유.
하나는 준후가 아직 의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흉강천자는 면허를 가진 의사만이 펼칠 수 있었다.
둘째는 볼펜으로 천자를 한다고 해도 아영은 결국 수능을 보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준후가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가운데.
아영은 여전히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가쁜 숨을 내쉬느라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구경하지 말고 자리로들 돌아가세요!”
감독관이 몰려드는 수험생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일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119대원뿐인 것만 같았다.
‘잠깐만. 어쩌면 기흉이 아닐지도 몰라.’
갈등하던 준후의 머릿속을 한 줄기 통찰이 관통했다.
아영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질환이 기흉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기흉으로 반드시 단정해야만 할까.
A, B, C가 아니라고 해서 꼭 D가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영에게는 청색증이 보이지 않았다.
호흡을 통해 산소 공급이 제대로 안 된다면 얼굴이 파랗게 질려야 하거늘.
아영의 얼굴은 창백하기만 했다.
창백한 것과 퍼런 것은 엄연히 달랐다.
의학서적을 통해 준후가 본 청색증 환자는 피부가 보랏빛을 띠었으니까.
잘하면 아영이를 살릴 수 있어.
수능도 치게 만들 수 있어.
준후의 어두운 가슴에 희망이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학생, 뭐하는 거예요? 환자한테 손대지 말아요.”
감독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준후는 아영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아영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말 들어.”
“…….”
“수능 치고 싶잖아. 수능 쳐야 하잖아. 내 말이 안 들리는 건 아니지?”
준후가 큰 목소리로 말하자 아영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괴로운 건 알겠지만 시키는 대로 해 봐. 앞으로 하나, 둘, 셋 하면 제 자리에서 점프를 뛸 거야.”
“…….”
“힘들겠지만 같이 해보자. 알았지? 하나, 둘, 셋!”
준후의 신호에 맞춰 아영이 제자리에서 폴짝 점프를 뛰었다.
“누가 저 친구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친 새끼, 환자한테 점프를 시키고 앉았네.”
점프 소동이 끝나자 주변에서는 뭐 저런 인간이 있냐는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준후는 개의치 않았다.
이 우스운 동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들은 모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아영아. 방금 뛸 때 가슴이 어땠어?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준후의 질문에 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준후는 아영이 기흉이 아님을 확신했다.
기흉 환자가 제자리에서 점프를 뛰었다가 착지하면.
흉막에 고인 공기도 같이 이동한다.
이로 인해 발생한 압력으로 환자는 크게 기침을 하거나, 공기의 이동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아영은 기침을 하지도 않았으며 공기의 이동도 느끼지 못했다.
즉 아영은 준후가 가장 우려했던 기흉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폐렴.
급성호흡 증후군.
아나필락시스.
천식.
기흉.
총 다섯 개의 질환이 모두 제거되었지만 준후는 오히려 기뻤다.
아영을 괴롭히고 있는 질환이 무엇인지 단박에 꿰뚫어 볼 수 있었으니까.
아영은 금방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며 수능도 무사히 치르게 될 것이다.
준후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계획이었다.
“저기요, 학생. 환자 괴롭히지 말고 빨리 나와요. 도무지 못 봐주겠네.”
감독관이 준후에게 다가와 완력을 사용할 분위기를 풍겼다.
물론 준후는 손톱만큼도 겁을 먹지 않았지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아영아, 잘 참았어. 이제 괜찮아질 거야. 안심해.”
준후는 아영을 다독이고 교실로 돌아갔다.
책가방에서 간식을 담고 있던 비닐봉투를 챙겨 현장으로 돌아갔다.
“환자한테 가지 마. 친구인 것 같기는 한데……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이 봐요. 적당히 합시다. 적당히.”
별안간 건장한 남학생 두 명이 준후의 앞을 막아섰다.
준후가 방금 했던 행동이 괴이했으므로 그들이 준후를 막는 것도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그래서 준후는 학생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대신 내공을 몸 바깥으로 배출하여 두 사람에게 압박감을 심어주었다.
두 사람은 어어 하다가 준후에게 길을 터주고 말았다.
일반인이 실체화된 내공을 견디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으니까.
“아니, 학생은 제발 좀 빠지라니까!”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으으…….”
감독관마저 내공으로 찍어 누른 준후는 아영에게 다가갔다.
아영은 다시 복도에 주저앉은 채 고통스럽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영의 괴로움은 곧 사라지리라.
“여기에 입 대고 천천히 심호흡해 봐. 금방 괜찮아질 거야.”
준후가 아영에게 내민 것은 비닐봉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