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22화
제5장 의대생(2)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영은 준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곁에 있어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왜 뜬금없이 비닐봉투를 내민단 말인가.
비닐봉투에 구토라도 하라는 소리인가.
아영이 당장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히고.
요동치는 심장을 느끼고.
운동장을 전력 질주한 것처럼 가쁜 호흡을 했던 건 35분 전쯤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어왔는데 그것은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아영을 속박했다.
그 때문에 아영은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서는 당장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 걱정해 주는 소리는 들렸지만 대답할 겨를은 없었다.
죽는 것도 무섭고.
수능을 못 치는 것도 무서워서 아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실로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 준후가 아영을 찾아왔다.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제자리에서 점프를 뛰게도 시켰다.
그러더니 내민 것이 고작 비닐봉투였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으나 아영은 비닐봉투를 받았다.
비닐봉투를 내미는 준후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아영이 모르는 무언가를 준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준후가 시키는 대로 했다.
비닐봉투를 입에 대고 주변부를 단단하게 밀봉한 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후우우우.
하아아아.
아이들 장난 같아 보이는 처치는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아영은 자신의 호흡이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의 공포가 가라앉고 있음을 느꼈다.
신기한 일이었다.
비닐봉투에 대고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좋아진다고?
아영이 차분함을 되찾는 사이.
준후는 검지로 아영의 경동맥 부근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경동맥 부근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한결 나른해졌다.
추운 겨울 외출을 했다가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누운 것처럼.
놀랍게도 아영은 준후의 처치를 따른 후 단 5분 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뭍에 올라온 생선처럼 헐떡거리던 숨은 이제 평온하기만 했다.
“많이 괜찮아졌지? 그럼 비닐봉투 떼도 돼.”
“응.”
아영은 비닐봉투를 제거한 후 준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준후는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던 걸까.
그것이 궁금했다.
* * *
감독관 호석은 아까부터 똥줄이 탔다.
하필이면 자신이 맡은 교실에서 환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환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10분 동안 숨을 헐떡거렸다.
언제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주변 학생들이 119를 불러주었다고는 했지만 호석의 걱정은 멈출 줄을 몰랐다.
골칫거리는 하나 더 있었다.
환자의 친구로 보이는 학생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정이 필요한 환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꼬치꼬치 묻지를 않나.
제자리 점프를 뛰게 하지를 않나.
비닐봉투를 건네주지를 않나.
호석은 남학생을 제지하고 싶었으나 그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학생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뿜어지고 있었다.
학생을 건드렸다간 더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영문 모를 불길함이 들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환자가 비닐봉투에 대고 숨을 쉰 다음부터 기적과 같은 일이 펼쳐졌다.
환자가 금방 호흡을 되찾은 것이다.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저 비닐봉투는 무슨 요술 비닐봉투라도 된단 말인가.
호석은 넋을 잃은 채로 환자와 남학생을 지켜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호석과 같은 반응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 *
‘역시 내 진단이 맞았어.’
아영의 회복을 확인하고 준후는 뿌듯함을 느꼈다.
폐렴.
급성호흡 증후군.
아나필락시스.
천식.
기흉.
의심했던 질환을 제거하고 준후가 내린 진단은 과호흡 증후군이었다.
과호흡 증후군.
이 질환의 원인은 신체적 원인과 정신적 원인 두 가지로 나뉘는데.
아영의 경우 후자일 확률이 높았다.
수능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아영의 불안, 흥분, 긴장이 증폭됐다.
이로 인해 자율 신경계가 교란되면서 과호흡, 흉통, 부정맥 등이 찾아온다.
이것이 준후가 이학적 검진(시진, 청진, 촉진, 타진, 문진 등으로 검사 전에 진행하는 검진)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정신적 원인으로 인한 과호흡 증후군은 환자를 안정시키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준후는 점혈법으로 아영의 경동맥을 자극했다.
경동맥에는 미주신경이 위치했는데.
미주신경은 부교감 신경으로 몸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아영의 경우 교감 신경이 항진된 상태였기에(쉽게 말하면 흥분된 상태), 그 반대인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교감 신경을 억제한 것이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호흡 관리였다.
과한 호흡으로 과하게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환자가 들이마시게 하는 응급처치법이 유용했다.
그래서 준후는 아영에게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본인이 내뱉은 이산화탄소를 다시 흡입하도록.
준후의 진단과 처치는 모두 성공적이었다.
아영은 이제 스스로 몸을 일으켜 준후와 안정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준후도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준후야,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괜찮아. 그리고 나야말로 고맙지. 네가 이렇게 무사하니까.”
준후는 울먹이는 아영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아영은 죄가 없었다.
진짜 죄를 짊어져야 할 것은 학생들에게 수능이라는 굴레를 씌운 사회였기에.
“그런데 나는 왜 숨을 제대로 못 쉬었던 거야? 비닐봉투는 왜 줬고?”
아영이 화제를 돌렸다.
“말하자면 좀 길기는 한데.”
준후는 대답 전에 손목시계부터 살폈다.
수능이 15분밖에 안 남은 시점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던지라 과호흡 증후군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심리적인 부담감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처치법은 응급처치 동영상을 보고 배웠다고 전했다.
준후의 대답이 괜찮았을까.
아영은 물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현장에 119대원들이 들이닥쳤다.
“환자가 어떤 분입니까?”
119대원들은 아영의 몸 상태를 꼼꼼하게 묻기 시작했다.
비닐봉투 처치와 점혈로 원 상태를 회복한 아영은 조리 있게 상황을 설명했다.
준후도 가끔 아영의 대답을 거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일단 병원에 가보죠.”
“네?”
아영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시험 도중에 큰 문제가 생기면 돌이킬 수 없어요. 정말 과호흡 증후군인지 확신할 수도 없고요.”
“저 수능 쳐야 하는데…….”
“수능보다 학생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119대원은 이미 아영을 후송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태도와 말투가 강경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상황을 관망하던 준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다.
준후의 과호흡 증후군 진단은 정확했다.
아영이 순식간에 회복된 것이 그 증거였다.
문제는 준후가 내린 진단의 공신력이었다.
준후는 의대 본과 3년 차의 의학지식을 가졌지만 그 지식을 다른 사람이 믿어줄 리 만무했다.
수능 공부도 벅찬 게 고등학생 아니던가.
준후가 의대 공부를 미리 했다고 하면 그 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까.
“학생도 불안에 떨면서 수능을 치는 것보다 그편이 낫지 않겠어요?”
“저…… 저는…….”
119대원의 설득에 아영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본인의 상태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니.
119대원이 만약의 사태를 지적하니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이다.
물론 119대원도 아영도 상식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준후에겐 둘 사이의 실랑이가 답답하게만 보였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준후는 일부러 아영과 119대원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영이가 시험을 치르는 게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도 학생들 사정은 이해해요. 하지만 건강을 우선시해야죠.”
“아영이는 지금 멀쩡한데요?”
“지금 멀쩡하다고 앞으로도 멀쩡하다는 보장은 없어요.”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 나빠진다는 보장도 없는 거 아닐까요?”
준후는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만약 상태가 나빠진다고 해도 아까 했던 것처럼 비닐봉투로 호흡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허, 참. 학생이 의사예요?”
119대원이 혀를 차며 되물었다.
이거 서러워서라도 빨리 의사 면호를 따야지, 원.
의사 면허만 있으면 이렇게 말싸움할 필요도 없는 상황인데.
“제 말은 수능을 포기하고 병원에 갈 정도로 아영이가 응급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
“아영아, 넌 어때? 네 상태를 솔직히 말해 봐.”
“나는…….”
아영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대원님.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저는 수능을 치고 싶어요. 상태가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아영의 대답에도 119대원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시험 도중에 학생이 또 쓰러지면 다른 학생들까지 피해를 볼 수도 있어요. 그 점은 알고 있어요?”
“제가 알기로는 예비 시험장을 남겨두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감독관님. 제 말 맞죠?”
준후가 잽싸게 껴들어 화제를 돌렸다.
“마…… 맞아요. 교실이 3개 정도 비어 있어요.”
“제 생각에는 아영이를 빈 교실에서 시험 보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럼 만약에라도 다른 학생에게 피해가 없지 않을까요?”
준후는 제3의 길을 제시하고 119대원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수능을 포기한다는 것.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 수험생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어필했다.
“뭐, 일단 멀쩡해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안 준다면야…….”
119대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준후의 방법을 받아들였다.
감독관도 아영이 딱했는지 아영이 예비 시험장에 시험을 볼 수 있게 조치를 해주겠다고 했다.
간신히 상황이 일단락된 것이다.
119는 돌아갔고 감독관은 상황실로 뛰어갔다.
“아영아, 이리 와봐.”
준후는 아영의 심중혈과 청운혈을 자극해 긴장을 좀 더 풀어주었다.
상황이 급변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아영이었다.
아영이 본 실력을 발휘하려면 평정심을 유지하게 만들어야 했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있어. 내가 멘탈 관리해 줄게.”
“응. 고마워.”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너 스스로를 믿어. 그것도 힘들면 너를 믿는 나를 믿고.”
아영이 책가방을 챙겨 복귀한 감독관과 다른 교실로 황급하게 이동했고 준후는 교실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아영과 엮인 시간은 고작 20분 남짓이었건만 준후가 체감한 시간은 2시간처럼 같았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란 그만큼 감정과 생각 소모가 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보람차고 뿌듯한 일이기도 했다.
준후는 아영을 위기에서 구한 스스로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의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일도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을 살리면서 얻는 만족감이란 그 어떤 만족감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소란이 가라앉은 뒤 찾아온 첫 번째 국어시험 시간.
준후는 40분 만에 문제 풀이와 답안지 마킹, 심지어 재검토까지 마치는 기염을 토했다.
벌써 의대 본과 공부까지 손대고 있는 준후가 아니던가.
준후에게 수능은 너무 쉬운 시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