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24화
제5장 의대생(4)
입춘이 지났지만 봄이라고 하기에는 날씨가 쌀쌀했다.
바람이 칼날처럼 살갗을 베어냈으며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얀 구름으로 퍼져 나갔다.
준후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곤 지하철역을 찾았다.
출근길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이 시간에 지하철이라…….
다소 생경한 느낌이 들었지만, 앞으로 적응해 나가야 할 스케줄이었다.
준후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법적으로 성년이 되었고 대학생도 되었으니까.
사람들 틈에 끼인 채 준후는 창밖을 응시했다. 마침 지하철이 한강을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의과대학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로 일정은 1박 2일이었다.
낯선 환경과 낯선 친구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설레는 느낌이 들었다.
외과의가 되겠다는 꿈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후 지하철에서 내린 준후는 역 주변을 벗어나 신원대학교 교정으로 이동했다.
앞으로 6년간 생활하게 될 캠퍼스를 눈에 담아두었다.
의과대학 건물 안에는 이미 많은 의대생이 모여 있었다.
서로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므로 로비에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다들 주변을 서성거리거나 휴대폰을 만지기 바빴다.
하지만 준후는 다른 학생들과 사정이 조금 달랐다.
이 중에 지인이 한 명 존재했던 것이다.
눈으로는 지인을 찾을 수 없었기에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조금 늦는다고 했다.
잠시 후 도착한 상대는 다름 아닌 아영이었다.
같은 고등학교에서 전교 2-3등을 다투던 아영 역시 신원대 의대에 입학했던 것이다.
수능 날에 발생한 과호흡 증후군을 이겨내고 당당히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준후가 아영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좋은 아침.”
아영이 빙긋 웃으며 준후를 마주 보고 섰다.
대학생이 된 아영은 고등학생 때보다 분위기가 성숙해졌다.
화장을 하고 복장에 신경을 써서 그런 듯했다.
이제 보니 아영도 지애 못지않은 미인이었다. 아영이 등장하자 몇몇 남학생들이 아영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요즘 말로 하면 아영은 힘숨찐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침 먹었어? 나 빵 사 왔는데 같이 먹을래?”
아영의 여전한 빵 사랑에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가 보면 전생에 빵을 못 먹어서 환생한 사람인 줄 알겠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 난 밥 없이는 살아도 빵 없이는 못 살 거든.”
아영이 준후의 농담을 받아준 후 패딩 주머니에서 빵을 꺼냈다.
빵의 포장을 뜯고서 빵의 반쪽을 준후에게 건넸다.
준후는 아영이 건넨 빵을 받아서 먹었다.
생크림 빵이라서 마실 것이 없었음에도 목 넘김이 불편하지 않았다.
“공포 영화는 볼만했어?”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OT 전 준후는 아영과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그때 아영은 요즘 공포 영화를 즐겨보고 있다고 했다.
“응. 무섭다는 공포 영화는 거의 다 본 것 같아. 처음에는 엄청 무서웠는데 지금은 볼 만해졌어.”
“공포 영화 좋아하나 봐?”
“좋아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수련이랄까?”
“수련?”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공포 영화와 수련이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지?
“내가 수능 때 많이 긴장하고 겁을 먹어서 과호흡 증후군이 왔잖아.”
“그랬지.”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공포 영화로 단련했다. 이 말씀.”
아영이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련 방법이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준후는 아영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두려워하는 것을 반복해서 마주치는 일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림을 경험한 준후마저 그랬다.
그런데 아영은 본인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지 않았던가.
“존경합니다. 누님.”
준후는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서 말했다.
그러자 아영이 쑥스러워하며 손을 내저었다.
“진짜 존경스러운 건 내가 아니라 준후, 너지. 네 덕분에 내가 여기 있을 수 있었는데.”
“갑자기 칭찬 릴레이?”
“네가 먼저 시작했거든?”
아영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OT 시작 시간이 되었다.
준후는 아영과 함께 강당으로 들어갔다.
다른 의대생들까지 의자에 착석하자 곧 오리엔테이션의 막이 올랐다.
강당에서 진행되는 1차 오리엔테이션은 일종의 설명회였다.
의대 생활과 커리큘럼,
교수진과 선배 소개.
동아리 활동 등등.
2시간가량 진행된 1차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학생들은 일제히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어떻게 보면 진짜 OT는 지금부터였다.
학생들끼리 친해지고 선배들을 직접 대면하고 레크레이션 시간까지 갖게 될 테니까.
“멀미해?”
준후의 시선이 곁에 앉은 아영에게 머물렀다.
아영은 언제부터인가 말수가 줄었고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시간, 상황, 장소를 감안했을 때 그 이유는 멀미뿐이었다.
“나 멀미가 심한 편이거든. 빵 가게 들렀다가 약국 간다는 걸 깜빡했네.”
“괜찮아. 나한테 맡겨.”
준후는 4번 뇌신경이 위치한 관자놀이 부근.
3번 뇌신경이 위치한 눈 옆쪽 부근.
운동 신경이 위치한 목 뒤쪽 후두부를 차례대로 점혈했다.
멀미란 뇌와 눈, 시각 신경들 사이에서 불균형이 일어나서 발생했다.
따라서 해당 부위를 이완시켜주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역시 사기란 말이지.’
준후는 속으로 웃었다.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점혈은 준후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진단과 처치가 동시에 가능한 만능열쇠였다.
아마 의사가 되면 그 덕을 더 톡톡하게 볼 수 있으리라.
“지금은 좀 어때?”
“어…… 갑자기 멀쩡해졌는데? 무슨 요술이라도 부렸나?”
“내 손이 원래 좀 약손이거든.”
준후가 넉살을 부렸다.
“준후, 넌 진짜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수능 볼 때도 네가 마사지해 주고 나면 몸도 편해지고 마음도 편해졌는데.”
아영이 준후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준후는 알면 알수록 신기한 친구였다.
또래답지 않게 대범하고.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인 데다가 각종 의학지식까지 풍부했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준후가 동갑내기가 아닌 연륜이 풍부한 어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영이 너도 보통은 아니거든? 너만큼 빵을 좋아하고 약점을 극복하겠다고 공포 영화를 본 아이는 본 적이 없으니까.”
“그건 인정.”
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영과 대화를 나누던 준후는 이윽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멀미 앓고 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와. 내가 도와줄게.”
나서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치료하는 영역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준후는 아영처럼 멀미로 고생하는 친구들을 챙겨주기로 했다.
잠시 후 멀미를 호소하는 친구 대여섯 명이 준후에게 다가왔고 준후는 아영에게 했던 것처럼 점혈했다.
고객 만족도는 훌륭했다.
다들 준후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바빴다.
덕분에 OT 시작부터 준후는 원치 않은 인싸가 되고 말았다.
* * *
가평에 위치한 펜션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쯤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준후는 짐을 풀고 바깥으로 나왔다.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펜션을 둘러쌓고 있는 산자락은 푸릇푸릇했으며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소음 없이 고즈넉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부모님을 모시고 찾아오면 좋을 듯했다.
“아까는 고마웠다.”
경치를 만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이름은 몰랐지만 아까 멀미 때문에 고생하던 사람이었다.
“내 이름은 최성호야. 삼수해서 들어왔다.”
“형이시네요.”
“말 편하게 해.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닌데.”
준후는 성호와 금방 친한 형·동생 사이가 되었다.
성호는 준후가 가지 못한 친화력과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잠깐 대화를 나눴지만 성격이 뾰족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너 엄청 눈에 띄는 스타일이더라?”
“내가?”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외모부터 눈에 띄잖아. 아이돌 해도 되겠는데? 거기다가 전교 수석으로 입학했지. 버스에서 애들 멀미를 치료해 주질 않나.”
“형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너만 네 존재감을 모르는 건 아니고?”
성호가 준후의 말을 맞받아쳤다.
성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준후는 문득 생각했다.
무림을 경험하고 특별한 힘을 얻은 준후야 자신의 행동과 판단이 자연스러웠지만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이런 게 바로 입장 차이일 것이다.
“그나저나 너나 앞으로 피곤하겠다.”
“왜?”
“신원대 의대 오리엔테이션은 완전 별로거든. 구식이랄까.”
성호가 오리엔테이션 과정을 콩가루가 되도록 까기 시작했다.
만약 성호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진행될 OT는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게 분명해 보였다.
“형, 나만 믿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왜? 선배들을 들이받기라도 할 생각이야? 관둬라. 찍히면 괴로운 건 너야.”
성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의대의 특성상 선·후배 사이는 특히 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병원 바닥이 워낙 좁다 보니 마주칠 일도 많았고 소문이 도는 것도 빨랐다.
잘못하다가 힘이 있는 선배에게 찍힌다?
그러면 앞으로의 의사 생활은 가시밭길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런 짓은 안 해. 좋게 좋게 넘어가는 방법도 있으니까.”
“그게 뭔데?”
“지켜보면 알아.”
준후의 대답이 의미심장했다.
* * *
짐 풀기와 저녁 식사가 끝난 후 학생들은 일제히 강당에 모였다.
진행자의 진행에 따라 6인 1조로 조 편성이 이루어졌다.
준후는 운 좋게도 아영, 성호와 같은 조가 되었다.
조 편성이 이루어진 후에는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조마다 한 명씩 붙은 선배가 대학 생활에 대한 썰을 풀기도 했다.
준후가 속한 조를 맡은 선배의 이름은 김윤기.
예과 2학년 생으로 성격은 까불까불한 스타일로 보였다.
놀 수 있는 건 예과 때뿐이다.
예과 때 미팅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취미 생활도 가지라고 말했다.
놀 생각이 없었던 준후는 윤기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준후에게 의사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의사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환자를 치료하고 환자가 완치된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즉 준후의 성향은 윤기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이야기는 이쯤 하고 장기자랑 준비하자. 노래나 춤 잘하는 사람 있어?”
윤기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조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거나 윤기의 시선을 피했다.
다들 공부만 하다가 의대에 들어왔는데 장기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준후는 생각했다.
성호가 말한 신원대 OT의 적폐 중 하나인 신입생 장기자랑.
왜 갓 입학한 신입생이 없는 장기를 자랑해야 한단 말인가.
장기자랑을 한다면 오히려 선배들이 해서 갓 들어온 후배들을 기쁘게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준후는 참았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배.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래. 말해 봐.”
“장기자랑. 저 혼자 해도 되나요? 다른 조원들은 옆에서 저를 거들고요.”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 그러려면 네 장기가 특출나야 돼. 감당할 수 있겠어?”
“네.”
“뭔지 한번 보여줘 봐.”
윤기가 준후를 쳐다보았고 다른 조원들의 시선도 일제히 준후에게 쏠렸다.
다들 준후의 장기가 미치도록 궁금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장기자랑을 하겠다는 건지 말이다.
“시작할게요.”
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