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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6화 (26/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26화

제6장 참교육(1)

1박 2일의 오리엔테이션 일정이 끝났다.

준후와 배짱 좋게 술 배틀 벌였던 선배들은 돌아오는 길에 하나같이 거지꼴을 면치 못했다.

누구는 반송장이었고.

누구는 토하기에 바빴고.

누구는 어머니를 찾기도 했다.

자업자득이었기에 준후는 손톱만큼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죄책감이란 스스로 선을 행하지 못했을 때.

또는 스스로 악을 행했을 때 느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악을 처단할 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무림의 많은 정파인들은 애석하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야 할 때 죄책감을 느껴 큰 화를 당하곤 했다.

하지만 준후는 그렇지 않았다.

극악무도한 마귀 적일도에게 아버지를 잃어 악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악은 잡초였다.

잡초는 뽑아야 할 것이지.

이해하고 공감할 대상이 아니었다.

‘이만하면 성과가 괜찮았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 준후는 창밖을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내년에 선배로 OT에 참여하게 된다면 교수님들을 잘 설득해서 장기자랑을 폐지하리라.

꼴사납게 술을 강권하는 문화도 뿌리를 뽑아버리리라.

어제 펼친 활약상을 감안하면.

준후의 입김은 앞으로도 꽤 영향력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준후야, 너 정말 괜찮아?”

문득 곁에 앉은 아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뭐가?”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괜찮냐고? 어제 소주 7병은 마신 것 같던데.”

“내가 안 괜찮아 보여?”

준후는 여유를 부리며 되물었다.

준후가 마신 소주는 2리터에 육박했지만 실은 전부 물이었다.

내공으로 알콜 성분을 다 해독했으니까.

즉 하루 권장 물 섭취량을 소주로 섭취한 것뿐이었다.

문제가 생기고 싶어도 생길 수가 없었다.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혹시라도 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멀쩡해. 그나저나 아영이 너도 술 잘 마시더라?”

준후가 화제를 아영으로 돌렸다.

어제 술자리에서 아영은 소주 2병을 비우고도 멀쩡한 기염을 토했다.

평소 성격과 이미지를 생각하면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술을 잘하시는데 유전인가 봐.”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

“준후, 네가 힘들어하면 내가 흑장미라도 해줄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아영의 말투는 어쩐지 아쉽다는 투였다.

준후를 도와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그런 듯했다.

30여 분간의 대화가 끝나고 아영이 잠에 들었다.

준후는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저 풍경처럼 의대 생활도 빨리 지나갔으면.

내일 눈을 떴을 때 곧바로 의사로 활동할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당돌한 바람을 가져보았다.

* * *

작년 수능의 유일한 만점자.

전교 수석 입학.

OT에서 보여준 화려한 춤 솜씨와 말도 안 되는 주량 등등.

원치 않게 핵 인싸로 얼굴과 이름을 알렸지만 준후의 평소 캠퍼스 생활은 아싸 그 자체였다.

준후는 공강 때마다 도서관을 찾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읽을 법한 의료 서적을 대출해서 읽곤 했다.

올해 초 본과 4년 차의 공부를 끝냈으며.

시험 삼아 풀어 본 작년 의사 면허 시험에서도 만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다만 의학이란 깊고도 깊은 것.

준후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지식을 갈구했다.

무공과 내공을 바탕으로 한 준후의 신체 능력은 이미 초인 수준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채워야 할 나머지 것은 단연 의료지식이었다.

예과 수업을 시작한 지 열흘째.

준후는 여전히 도서관 지박령으로 살았다.

오전 7시까지 도서관에 출근해서 의학서적을 읽었고, 공간 시간에 책을 읽었고, 수업이 없으면 또 밤 10시까지 책을 읽었다.

그러고도 체력과 시간이 남아서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고 의학 드라마까지 챙겨보았다.

준후의 선행학습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 * *

오후 12시 교양 수업이 끝났다.

준후는 OT 때 같은 조였던 아영, 성호, 정한과 교내 식당을 찾았다.

“준후야, 너 인생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 아니냐? 거의 닭가슴살 수준으로 빡빡한데?”

“그래. 성호 형. 말이 백번 맞지. 대학생이 무슨 고3처럼 공부하고 그러냐?”

성호와 정한이 한마디씩 했다.

의대생이 숨을 쉴 수 있는 시기는 2년의 예과 시절뿐이 없었다.

본과가 시작되면 하루에 몇백 페이지의 의학 용어를 외우고 매주 단위로 쪽지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랄까.

그런데 준후는 예과생임에도 본과생처럼 지내고 있었다.

동아리도 들어가지 않고.

소개팅 제의는 전부 거절하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곳이라고는 도서관이 유일했다.

실로 고리타분한 대학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답게 살려면 문화생활도 좀 즐기고 그래라.”

“난 공부하는 게 제일 재밌어.”

“재미없는 농담이네.”

“농담이 아니니까 재미없지.”

성호의 지적에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준후는 그동안 꾸준히 익힌 의학지식으로 몇몇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왔다.

배움과 실천.

이 두 가지야말로 준후가 사는 낙이자 보람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무림을 경험한 준후만이 가진 독특한 가치관을.

“OT 때만 해도 네가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 영 딴판이네.”

“왜? 실망했어?”

“조금.”

“근데 내가 열심히 공부하는 게 왜 형을 실망시키는 거야?”

“몰라. 그런 게 있어.”

“오빠, 준후 후광을 엎고 여학생들 꼬시려고 한 거 아니에요?”

“크흠. 섭섭한 소리하지 마. 의대생이라고 하면 다들 표정부터 달라진다고.”

아영의 지적에 성호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멋쩍어하는 걸 보면 아영의 지적이 맞는 듯했다.

하긴 공부만 하다가 갓 대학에 입학했으면 이성에 대한 관심이 없으래야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준후는 성호를 충분히 이해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네 사람은 가까운 카페를 찾았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다들 어제 뉴스 봤어? 김태훈 의료 사고 난 거”

아영이 화제를 돌렸다.

의료사고라는 말에 준후의 귀가 쫑긋 열렸다.

외과의를 꿈꾸는 준후는 의료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없던 호기심도 생겼다.

“난 처음 듣는데?”

“봐봐. 책만 보니까 세상 돌아가는 일을 하나도 모르잖아. 쯧쯧쯧.”

“그래서 무슨 사건인데?”

준후는 성호의 힐난을 무시하고 아영에게 물었다.

아영의 설명이 이어졌다.

김태훈이라는 중년 남자 배우가 있는데 한 종합 병원에서 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유족 측의 주장에 따르면 김태훈은 의료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환자가 복통을 호소하며 이틀 사이에 두 번이나 응급실을 찾았는데 진통제만 처방했다.

그러다가 세 번째 방문했을 때.

환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며 그 후 이뤄진 응급 수술에서 환자 사망했다는 것이 그 근거라고 했다.

“구린내가 나긴 하네. 수군거리는 것도 이해가 가.”

준후가 미간을 좁혔다.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양쪽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준후는 병원 쪽에 과실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내막을 살펴보면.

병원의 처치 및 진단 지연으로 인한 환자 사망이라는 의료 사고의 패턴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거 김태훈이 문제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김태훈이 왜?”

정한의 말에 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급실 진료받고 나서 몸 상태가 좋아졌다고 SNS에 사진 올렸대. 그럼 뭔가 수상하지 않아?”

“그건 근거가 안 돼.”

잠자코 있던 준후가 정한의 말을 반박했다.

“진통제 처방을 했으면 일시적으로 호전됐을 수도 있으니까.”

“뭐야, 준후 너는 김태훈 편?”

“지금 시점에서는.”

준후는 대답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오늘따라 유독 커피가 썼다.

김태훈 사건에 관해서는 준후가 딱히 손을 쓸 거리가 없었다.

배우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족 측에서 알아서 소송을 진행할 테니까.

그런데도 사건의 진상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병원이 정말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걸까.

아니면 유족 측에서 애먼 병원에 책임을 전가하는 걸까.

외과의가 될 준후는 얼마든지 전자의 상황을 경험할 수 있었고.

얼마든지 후자의 상황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대화가 잠시 끊어졌을 때.

준후는 김태훈 사건을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준후만 몰랐을 뿐 매스컴은 김태훈 사건으로 이미 떠들썩한 상태였다.

한편 분쟁에 휘말린 병원의 이름은 태정병원인데, 강남에 위치한 유명한 소화기 외과 전문 병원이었다.

“꿀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러다가 체할라.”

성호가 준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 과외 한번 안 해볼래?”

“갑자기 웬 과외?”

“동아리 선배가 과외 해볼 생각이 없냐고 하던데 난 정말 생각이 없어서.”

“과외라…….”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돈이 궁한 상태는 아니었다.

일단 전액 장학금을 약속받고 입학했던 데다가.

과거 응급처치했던 선행이 알려지면서 한 장학재단이 천만 원의 장학금까지 지원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많이 가져도 부족한 게 돈이긴 했다.

가정에 무슨 흉사가 닥칠지 모르고.

2년의 월세 계약이 끝나면 새집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할 게. 형.”

“우리 준후 공부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돈은 밝히네?”

“그냥 용돈 좀 벌려는 거지.”

“나랑 준후는 동아리방에 다녀올 테니까 너희 둘이 재밌게 놀고 있어.”

성호를 따라 준후는 구내 카페를 벗어났다.

지하 2층에 위치한 동아리방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스쳐 간 몇몇 선배들이 준후에게 아는 척을 하고 말을 걸기도 했는데 대부분 OT 때 봤던 얼굴이었다.

OT 때 준후가 보여준 임팩트가 워낙 컸던 탓이었다.

봉사 동아리.

축구 동아리.

연극 동아리.

락 밴드 동아리 등등.

복도를 따라 다양한 종류의 동아리 방이 늘어서 있었다.

사실 준후도 동아리에 들어갈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의료계는 바닥이 좁았다.

한 다리만 건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즉 인맥을 탄탄하게 다져놓으면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후는 이를 포기했다.

일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인맥이 형성되는 것이면 모를까.

인맥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의료계를 좀 먹는 인맥이란 분명 후자일 테니까.

“와, 진짜 형이랑 안 어울리는 동아리네? 잘못 온 건 아니지?”

성호가 멈춰선 동아리실 앞에서 준후는 실소를 터뜨렸다.

성호가 가입한 동아리는 독서 동아리였는데 이름이 책킷아웃이었다.

“내가 책 좀 읽겠다는데. 왜? 불만이냐?”

“그래서 최근에 읽은 책은?”

“속수무책.”

성호가 썰렁한 말장난을 하고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동아리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온 선배가 락커에 옷을 집어넣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막 동아리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성호의 인사에 동아리 선배도 존댓말을 해가며 인사를 받았다.

성호가 3수생이라서 그런 것이리라.

성호를 통해 준후는 동아리 선배가 예과 2학년생이고 이름이 경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건…….

그런데 경태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가 준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류 봉투에 태정병원이라는 글자와 로고가 박혀 있었던 것이다.

잠깐, 태정병원이라면…….

김태훈 사건이 터졌던 그 병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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