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27화
제6장 참교육(2)
“선배, 병원 갔다고 오는 길인 가 봐요?”
준후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병원 쪽으로 돌렸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 논란이 되는 태정병원의 서류 봉투를 왜 경태가 들고 있는지.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아, 어디가 아프셨구나. 감기라도 걸리셨나? 아직 날씨가 쌀쌀하긴 하더라고요.”
준후의 화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병원이라는 화제를 놓치지 않으면서 상대가 자연스럽게 자기 정보를 말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이는 제갈세가의 제갈천문 공자에게 배운 화법이었다.
“몸이 아픈 건 아니고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경태가 씁쓸하게 웃었다.
찰나에 스쳐 지나간 표정이지만 준후는 놓치지 않았다.
생사결전이 펼쳐지는 무림에서는.
눈 한 번 잘못 깜빡였다간 저승길 직행 초대장이 날아오곤 했다.
덕분에 준후의 관찰력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예리했다.
그래서일까.
경태가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숨기고 있는 사실이 딱히 좋은 일이 아님을 준후는 금방 눈치챘다.
안타깝긴 하다만……
초면이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지?
“선배, 과외 구한다고 하셨죠. 준후도 마침 과외를 찾고 있다고 해서 소개시켜드리려고요.”
곁에 있던 성호가 본론을 꺼냈다.
“준후라면 저도 환영이죠. 화제의 신입생인데. 괜찮으면 오늘 당장 시작해 볼래?”
“저는 좋아요.”
“집 주소랑 필요한 서류는 문자로 보내줄게. 어머니께도 미리 말씀해놓고.”
준후의 명성(?) 때문일까.
과외 자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구해졌다.
준후는 경태와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용건이 끝난 후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과외 연결만 해주었을 뿐.
성호도 경태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벌써 말을 놓고 편하게 대화를 했을 테니까.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는 이따가 다시 올게요.”
“네. 그러세요.”
경태와의 짧았던 만남을 뒤로하고 준후는 동아리실을 나왔다.
그런데 왜일까.
아까부터 계속 태정병원의 이름과 로고가 박힌 서류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경태가 태정병원을 찾은 이유가 궁금한 것은.
“형, 경태 선배는 잘 모르지?”
“화법이 영 이상하네? 잘 모르지?”
“말 그대로 잘 모르는 것 같아서.”
“그래, 쨔샤. 잘 모른다. 동아리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준후는 성호에게 경태의 정보를 캐물어 보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알아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준후는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저 기우이길 바랐다.
불의와 싸우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성호와 잡담을 나누며 카페로 돌아가는 도중.
휴대폰에 한 통의 메신저가 날아왔다.
경태가 보낸 것이었다.
메신저에는 집 주소와 과외에 필요한 서류가 적혀 있었다.
마음속에 피어오른 의혹은 오늘 저녁이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 * *
그 날 저녁.
준후는 서초구에 위치한 한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는 세련됐고 웅장했으며 고급스러웠다.
오기 전에 알아봤는데 한강 뷰를 담고 있는 이 아파트의 가격은 전세 가격이 무려 40억에 달했다.
40억이란 돈은 평생 어떻게 벌 수 있는 거지?
아파트 단지를 보고 있자니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준후는 가볍게 볼을 두드리고서 단지 내부로 들어섰다.
메신저로 받은 호수 앞에 섰다.
띵동~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현관 앞에는 평상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경태의 어머니 미호였다.
“준후 학생이죠? 잘 왔어요.”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준후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미호를 따라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오기 전부터 짐작했지만 경태의 집은 잘살았다.
거실 인테리어부터 남달랐다.
벽걸이 TV에,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가구들과 세련된 부엌.
꼭 드라마 속 부호의 집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드라마 속 장소인 곳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준후는 미호와 간단하게 잡담을 나눴다.
과외를 받을 학생에 관한 것이었다.
과외생은 올해 고3이 된 강수정.
학교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수학이 유달리 약해 준후에게 수학 수업을 받고 싶다고 했다.
“여기, 제가 준비한 서류입니다.”
준후는 가방에서 꺼낸 서류를 미호에게 내밀었다.
주민등록증 사본.
통장 사본.
고3 수능 시험 성적표.
신원대 의대 재학 증명서였다.
“어머머. 작년 수능은 불수능이라고 악명이 자자하던데. 만점을 받으셨네요?”
미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죠.”
“외모가 출중한데 공부도 잘하고. 주변에서 질투가 많았겠어?”
“하하하. 저는 딱히 못 느끼겠더라고요. 그러는 어머님이야말로 미인이신 걸요. 아까부터 왜 이렇게 눈이 부시나 했더니 어머님 때문이네요.”
“준후 학생도 참.”
준후의 너스레에 미호가 꺄르르 웃었다.
무림을 경험한 준후는 윗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법도 알았다.
대단한 비법은 아니고 사소한 것을 큰 것처럼 칭찬하는 방식이었다.
이어지는 대화.
준후는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두 시간씩 수정을 가르치게 되었다.
과외비는 한 달에 160만 원.
노동 시간 대비 수익을 계산하면 말도 안 되는 고수익 아르바이트였다.
“죄송한데 수정이 좀 불러주시겠어요? 어머님과 같이 보고 싶은데.”
“내 정신 좀 봐.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수정아! 이리 와서 과외 선생님께 인사 좀 드리렴.”
미호의 부름에 수정이 거실로 나왔다.
준후와 고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수정은 퍽 앳되어 보였다.
체구가 작고 외모가 귀여운 편이라서 그런 듯했다.
준후는 미호 앞에서 수정에게 수학 수업 커리큘럼을 알렸다.
학과 선배의 소개도 있었고.
160만 원을 받으면 그에 걸맞은 교육이 필요할 테니까.
“저희는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준후는 수정과 함께 수정의 방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수업은 없어. 대신 다른 걸 해보자?”
“다른 거라면…….”
“수정이, 너 일단 공부 자세부터 교정해야겠다.”
준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수정은 벌써부터 거북목의 기미가 보였다.
목이 앞으로 구부정했으며 어깨도 살짝 앞으로 말려 있었다.
상태가 악화된다면 목 디스크, 팔 저림 등의 증상으로 발전할 확률이 높았다.
“책상에 앉아볼래?”
“네. 선생님.”
수정의 앉은 자세를 확인하고 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수정의 공부 자세는 안 좋은 것들만 모아놓은 총집합이었다.
그래서 수정이 고개를 들고 목받이에 목을 대도록 만들었다.
허리도 쭉 펴고 엉덩이가 의자 뒤에 닿도록 만들기도 했다.
“선생님. 이 자세, 너무 불편한데요? 공부 못할 것 같아요.”
수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원래 살찌는 음식이 맛있는 거 알지? 비슷한 이치야. 나쁜 자세를 유지하는 건 쉽지만 좋은 자세를 유지하는 건 힘들어.”
“…….”
“그리고 시간 내서 병원에도 한 번 가볼래?”
“병원이요? 저 아픈 데 없는데요?”
수정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상하게 자도 자도 피곤하지 않니?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고 말이야.”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아세요?”
“선생님은 척 보면 알아. 이번 주에 시간 내서 꼭 이비인후과에 가 봐. 수면무호흡증 상담하러 왔다고 하면 알아서 해주실 거야.”
준후는 수정이 수면무호흡증을 앓고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수면무호흡증.
이는 말 그대로 자는 도중 호흡이 줄거나 호흡을 하지 못해 수면에 장애를 겪는 질환이었다.
호흡의 장애로 인해 환자는 심근경색, 뇌졸중 등의 후유증을 얻을 수 있으며.
심한 경우 돌연사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런데 수면무호흡증은 관상으로도 어느 정도 진단이 가능했다.
인중이 길고 무턱인 사람.
목이 짧고 굵은 사람.
비중격 만곡증이 있는 사람 등등.
이러한 신체 구조를 가진 사람은 기도가 좁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 가볼게요.”
수정은 대답을 하고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준후를 응시했다.
뭐랄까.
같은 의대생이지만 준후는 친오빠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벌써 의사가 다 된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자세를 교정해 준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얼굴만 보고 수면무호흡증이라는 들어본 적 없는 병을 진단하다니…….
수능 만점자는 뭔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볼래. 선생님이 몸도 풀어줄게. 숨 크게 내쉬면서 힘 빼고.”
수정은 준후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준후가 수정의 목을 좌측으로 90도, 우측으로 90도 꺾었다.
꼭 영화 속 주인공이 악당을 암살하는 것처럼.
뚜두두둑.
뚜두두둑.
목에서 퍼져나가는 뼛 소리가 섬뜩할 지경이었다.
이러다가 죽을 것만 같았는데 스트레칭을 받고 나니 오히려 목이 개운했다.
효과 좋은 파스를 붙인 것처럼.
목을 살짝 움직여봤더니 목이 움직이는 각도도 넓어졌고 움직이기도 편했다.
“선생님. 어디서 마사지 배우셨어요? 엄청 시원한데요?”
수정이 놀란 부엉이 눈을 하고 물었다.
“아주 대단한 사람한테 배웠지. 이번엔 누워볼래?”
준후는 겸사겸사 수정의 허리도 손을 봤다.
내공을 담은 검지로 수정의 척추 양쪽 근육을 풀어주었다.
“어으으으.”
국밥을 한 그릇을 뚝딱한 중년 아저씨의 신음이 수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준후도 이번만큼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수정의 몸을 풀어주고서 준후는 수정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수정이 목표하고 있는 대학과 과는 어디인지.
학교생활을 하면서 가장 불편한 것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수학을 가르치기 전에 인간적으로 수정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스승과의 교감이 배움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준후는 무림에서 배웠다.
“너희 오빠 어디 아프니? 병원에 다녀온 것 같던데?”
첫 수업이 끝나갈 무렵, 준후가 물었다.
경태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수정에게 물었다.
수정과는 충분히 친밀도를 쌓았기 때문이다.
“아……. 그거요?”
수정의 얼굴에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웠다.
“한 달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보험 서류 떼러 간 걸 거예요.”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구나.”
“아니에요. 선생님이 저희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요.”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준후는 생각에 잠겼다.
경태가 태정병원에서 보험 서류를 뗐다는 건.
경태의 아버지가 태정병원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 아닌가.
김태훈의 의료과실 사건 때문인지 몰라도 준후는 태정병원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속이 거북했다.
께름칙한 기분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경태 아버지 또한 태정병원의 희생양일지도?
수업을 끝낸 후 준후는 수정의 방을 나왔다.
미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경태 손에 들려있던 서류 봉투가 미호의 곁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미호는 차트를 일일이 훑어보고 있었고.
이미 의사 면허를 딴 것이나 다름없는 준후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말이다.
저 차트만 볼 수 있다면 경태 아버지가 정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니면 피치 못하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있으리라.
진실은 밝혀져야 해.
세상을 떠난 환자를 위해서라도.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각오를 굳힌 준후는 조심스럽게 미호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오늘은 첫날이라 수업을 조금 일찍 끝냈습니다. 첫날부터 수업하면 원망을 들을지도 몰라서요.”
“아, 그래요? 고생했어요. 준후 학생.”
“고생이야 제가 아니라 수정이가 했죠.”
준후는 미호가 들고 있는 차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그런데…… 정말 죄송한 부탁입니다만……. 지금 보고 계신 차트, 제가 잠깐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