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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28화 (28/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28화

제6장 참교육(3)

집으로 돌아가는 준후의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경태 아버지의 차트가 담긴 봉투였다.

30분 전 경태의 집.

요즘 매스컴에서 의료사고 소식으로 떠들썩하지 않느냐.

만에 하나라도 그런 불상사가 벌어졌다면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논리로 준후는 미호를 설득했다.

이는 차트를 보고 싶다는 주장에 근거를 더했다.

김태훈 사건 덕분에 미호도 병원에 의심이 생겼는지 준후에게 선뜻 차트 복사본을 넘겼다.

추가로 경태 아버지가 사망하게 된 자세한 경위도 설명해 주었다.

-우리 남편은 위암 2기였어요. 첫 번째 수술은 무사히 잘 마치고 병실에서 회복 중이었는데…….

-…….

-사나흘쯤 되던 날부터 복통을 호소하다가 2차 수술에 들어갔죠.

-…….

-담당 교수님은 남편이 혈관이형성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앓고 있어서 살릴 수 없었다고 했어요.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도 했죠.

설명을 듣고 나서 준후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어떤 부분에서는 의심이 더 증폭되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납득할 만한 상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의심 가는 부분이라면 경태 아버지의 질환이었다.

위암 2기의 5년 생존율은 무려 70퍼센트였다. 수술을 받은 환자는 죽을 확률보다 살아날 확률이 높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첫 번째 수술이 끝난 후.

사나흘 만에 재수술에 들어갔다는 점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납득할 만한 정황도 충분히 존재했다.

바로 혈관이형성증이었다.

혈관이형성증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혈관 기형을 일컫는 말인데.

모세혈관 출혈.

점막 하 출혈 등등.

해당 장기의 급성 출혈을 일으키기 때문에 의사가 대처하기 무척 까다로웠다.

그러니까 경태의 아버지에게 혈관이형성증이 있었다면 말이다.

응급상황이 발생했던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차트를 보면 알겠지.’

준후는 손에 쥐고 있는 차트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의사가 차트를 수정하면 수정 전 기록과 수정 후 기록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차트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많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준후는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고 짧게 대화도 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차트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망자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을까.

아니면 불운한 운명으로 세상을 떠났을까.

밝혀지지 않은 진실은 이제 준후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준후는 차트 복사본을 훑기 시작했다.

중점적으로 살펴볼 차트는 총 6가지였다.

간호 기록지 및 경과 기록지.

1차 수술 기록지 및 2차 수술 기록지.

검사 기록지.

사망 진단서와 입·퇴원 기록지.

펄럭. 펄럭.

준후는 매의 눈으로 차트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의대 예과 1학년생이 차트를 읽는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준후는 할 수 있었다.

운기조식과 두뇌 영양제, 그리고 신경 자극술의 도움을 받아 의사 면허를 딴 것이나 진배없는 의학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차트를 보는 동안.

준후의 눈은 때때로 커졌다.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으며 무거운 탄식도 흘렀다.

준후는 차트를 총 3번 읽은 후에야 차트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을 봤나?”

사나운 준후의 독백.

골백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경태 아버지는 의료과실로 사망한 게 분명했다.

* * *

경태의 아버지가 의료과실로 사망했다는 근거는 총 3가지가 존재했다.

첫 번째는 혈관이형성증의 유무였다.

준후는 경태 아버지에게서 혈관이형성증의 증후를 찾을 수 없었다.

위암을 발견한 위장관 내시경과 조영제를 사용한 위장관 조영술.

두 검사에서 혈관이형성증 진단이 나오지 않았다.

1·2차 수술 기록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어디에서도 혈관이형성증이라는 진단명은 나오지 않았다.

혈관이형성증이 등장했던 기록지는 퇴원 기록지와 사망 진단서뿐이었다.

검사와 수술에서 나오지 않았던 진단명이 다른 서류에서 등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환자가 수술 도중 사망하자 뒤늦게 갖다 붙인 질환이라는 것이었다.

왜?

본인들이 수술에 실패한 핑계를 대기 위해서.

의료과실이 분명한 두 번째 이유.

그것은 처치 지연이었다.

간호 기록지를 보면 1차 수술 후 경태 아버지는 심한 복통과 혈변을 호소했다.

그런데 병원이 내린 처방이라고는 진통제 처방이 다였다.

환자의 병세가 심각해지고 있었거늘, 안일한 대처로 문제를 키운 것이다.

‘이때라도 제대로 손을 썼으면 살아계셨을 텐데.’

준후는 간호 기록지를 보면서 가장 큰 분통을 터뜨렸다.

경태 아버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의료진의 무관심이었기에.

의료과실이 분명한 세 번째 이유.

그것은 2차 수술 기록지에 언급된 천공이었다.

-병기: T3N0M0.

-수술명: 대부분위절제술(Subtotal gastrectomy).

1차 수술에서 의료진은 경태 아버지의 위를 절제하고 식도와 소장을 문합했다.

그런데 2차 수술에서 확인하니 식도와 소장 부위에 천공(구멍 뚫림)이 발견되었다.

쉽게 말하면 수술 부위를 제대로 꿰매지 못하고 천공을 남겼다는 뜻이었다.

이는 명백한 집도의의 실수였다.

준후는 차트를 통해 얻은 정보로 경태 아버지가 사망한 과정을 요약해 보았다.

1) 병원 측은 1차 수술에서 식도와 소장을 제대로 문합하지 못했다.

2) 문합하지 못한 부위에 천공이 생기면서 환자가 복통과 혈변을 호소했으나 진통제만 처방했다.

3) 2차 수술에서 환자가 사망하자 의료진은 환자의 사망을 혈관이형성증이라는 희귀 질환 탓으로 돌렸다.

하나만 해도 용서받지 못할 짓을.

태정병원의 의료진은 무려 세 개나 저지르고 말았다.

양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뻔뻔한 놈들이 아닌가.

이런 인간 말종들이 소화기 외과 전문 병원 간판을 달고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준후는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이 자식들, 한두 번 벌인 솜씨가 아니야.’

준후는 태정병원의 비리가 뿌리 깊을 거라고 확신했다.

김태훈 사건으로 태정병원의 문제가 이제 막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

경태 아버지처럼 원통하게 세상을 떠난 환자들은 더 많지 않을까.

그렇다면 준후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

권선징악.

간악한 태정병원 의료진들에게 냉혹한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었다.

준후는 비록 예과 1년생에 불과했지만 태정병원을 쓰러뜨릴 힘과 지략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머릿속을 스치는 계획만 세 가지가 넘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

너희들이 저질렀던 범죄가 없었던 것으로 지나갈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내가 너희들의 죄를 묻겠다.

깊어지는 밤.

준후의 각오와 생각도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오전.

학교에 도착한 준후는 독서 동아리부터 찾았다.

경태와 이번 사건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오는 길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태정병원 놈들은 언론 플레이에 능한 악질이었다.

[위암 수술 3,000건 달성]

[대장암 수술 2,000건 달성]

[보건복지부에서 뽑은 소화기 외과 질환 인증 병원]

포털 사이트에서 태정병원을 검색하면 이런 식의 과대 포장 뉴스 기사가 눈에 띄었다.

분명 환자와 보호자도 저런 기사를 보고 태정병원을 찾았으리라.

그래서 병원에서 의료사고를 저질러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평판과 이미지를 악용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그 악랄한 짓거리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준후가 직접 태정병원을 벌할 생각이었으니까.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만이 의사의 도리는 아니라고 준후는 생각했다.

환자를 이용하는 간악한 의사 무리를 처단하는 일도 의사에게 중요한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일찍 보자고 하고?”

동아리실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경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선배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서요.”

“왜? 과외 못하겠어? 듣기로는 어제 분위기 엄청 좋았다고 하던데.”

“과외가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어서요.”

준후는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선배 아버님에 관한 문제예요.”

“우리 아버지가 왜?”

준후가 꺼낸 화제에 경태는 크게 당황했다. 화제가 시간과 장소,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혹시 어머님한테 들으셨어요? 제가 선배 아버님 차트의 복사본을 받았다는 거?”

“듣기야 들었지. 근데 그게 왜?”

“태정병원이 요새 시끄러운 병원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아는 분께 차트를 봐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준후는 즉석에서 가상의 인물을 창조해 냈다.

준후가 직접 차트를 해석했다고 하면 믿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준후는 이번 사건에서 외견상 방관자의 역할을 담당할 계획이었다.

“그분이 차트를 보더니 의료과실이 명백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의…… 의료과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버지 수술은 원장님이 직접 했어.”

경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고개를 저었다.

“원장이라고 해서 수술에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죠.”

“준후 너, 지금 네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지?”

“…….”

“그건 태정병원하고 싸우자는 이야기밖에 안 돼.”

“선배 아버님이 원통하게 돌아가셨다면 싸워야죠. 그리고 태정병원 놈들을 혼쭐내줘야죠.”

준후의 화법은 살벌했다.

그만큼 태정병원의 의료진에게 단단히 화가 났던 것이다.

인륜을 저버린 자에게는 자비가 필요치 않았다.

“말로만 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근거를 보여드릴게요.”

준후는 가방에서 차트를 꺼내 경태에게 내밀었다.

차트의 중요한 부분에 형광펜이 그어져 있었는데 준후가 어제 직접 정리한 것이었다.

의학에 지식이 없어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경태에게 건넨 차트를 바탕으로 준후는 태정병원의 세 가지 실책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경태의 표정도 갈수록 심각해졌다.

사건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 이 새끼들. 진짜 쓰레기들이네.”

설명을 다 듣고 경태는 울분을 토했다.

유명한 소화기 외과 전문 병원이라고 해서 철석같이 믿었건만 이렇게 뒤통수를 쳐?

정수리까지 치솟은 분노는 좀처럼 꺼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찾아온 현실적인 생각들.

태정병원 놈들을 대체 어떻게 혼내줄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경태가 알기로 의료 소송은 돈이 많이 들고 소송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다.

의료 소송의 특성상 병원의 잘못을 입증하는 일도 쉽지 않았고.

김태훈이라는 중년 배우가 태정병원에서 사망했음에도.

태정병원 측은 본인들이 아무런 죄가 없다며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말이다.

아버지가 당한 의료과실을 입증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우리라.

현실적인 문제들이 떠올라 경태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선배. 너무 고민할 필요 없어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는 지인의 도움을 받는 거지만.”

경태의 고민을 다 이해한다는 듯 준후가 말했다.

“무슨 수로?”

“일단 다음 주에 태정병원 진료 예약부터 잡아주세요. 계획은 차차 말씀드릴게요.”

경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준후의 표정과 목소리가 저토록 자신만만한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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