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29화
제6장 참교육(4)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희 아버님, 정말 의료사고로 돌아가신 것 같다.
“…….”
-방금 차트 봤거든? 태정병원, 이 새끼들 순 악질이네. 의사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렇게 악랄한 짓을!
휴대폰 너머로 화가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태는 방에서 동아리 선배의, 선배의, 선배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준후가 말한 내용들이 사실인지 교차 검증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준후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명백한 인재(人災)로 세상을 떠난 게 명확해 보였다.
통화 중인 선배는 위장관 외과 전문의였다. 전문의인 선배가 차트를 잘못 봤을 리 없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서 차트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와 통화를 끊고서 경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의료사고로 돌아가셨다니…….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경태는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거실로 나갔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의 행보였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해결하고 태정병원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것 말이다.
경태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진실을 전달했다.
큰 충격을 받을 줄 알았건만 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안 놀라셨어요?”
“마음의 준비를 조금 하고 있었단다. 준후가 차트를 보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어머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모든 게 준후 덕분이긴 해요. 준후가 아니었으면 까맣게 덮고 넘어갔을 테니까요.”
“엄마도 같은 생각이구나. 참 똘똘한 친구더구나.”
경태는 어머니와 대책을 논의했다.
대책이라고 해봐야 의료 소송밖에 없기는 했지만.
경태는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좋은 의료 소송 전문 변호사를 알아보겠다고 했으며.
어머니는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답했다.
경태의 집안은 부유해서 의료 소송에 필요한 비용이나 시간 따위는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모아놓은 재산이 많았고.
어머니만 해도 대형 증권 회사의 본부장이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법정에서 제대로 된 진실을 밝힐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아 참. 준후가 부탁을 한 게 있었는데요.”
“무슨 부탁?”
“다음 주에 태정병원 외래 진료 예약 좀 해달라고요.”
“외래 진료는 왜?”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실은 경태도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었다.
의료사고를 깨달은 시점에서.
굳이 외래 진료를 통해 아버지 수술을 집도했던 원장을 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 나중에 법정에서 보면 모를까.
“준후가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 봐요. 신신당부를 하더라고요.”
“그럼 해줘야지. 은인인데.”
어머니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 뒤로도 경태는 어머니와 대략 한 시간 가까이 더 대화를 나눴다.
부디 이번 소송이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면서.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원통함이 조금이나마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 * *
오전 11시, 준후는 집에 있었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처음으로 오전 수업 하나를 듣지 않기로 했다.
모처럼 정장을 입고 준후는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 골격을 손보기 시작했다.
빠드드득.
빠드드득.
준후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무시무시한 뼈 소리가 퍼졌다.
동시에 준후의 얼굴 골격이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광대뼈는 튀어나오고 턱은 앞으로 당겨졌다. 눈매는 매서워졌으며 얼굴에 주름도 생겼다.
이는 무림에서 역용술이라고 불리는 수법이었다.
내공을 이용해 얼굴 골격을 일시적으로 바꿔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현대식으로 해석하자면.
돈 한 푼 안 드는 즉석 성형수술이랄까.
“아. 아. 아.”
준후는 아혈을 자극해 목소리도 변조해놓았다.
다시 거울을 확인하니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훤칠한 사내가 거울에 비쳤다.
‘이만하면 충분해.’
준후는 미리 구입한 서류 가방을 손에 들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태정병원.
준후의 목표는 변호사로 위장해 태정병원의 원장을 만나 원하는 정보를 빼 오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을 썼다간 태정병원과의 싸움이 지지부진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꼼수와 편법도 필요하다고 준후는 믿고 있기도 했고.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던 도중.
준후는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을 마주쳤다.
하지만 동창은 준후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역용술의 효과가 그만큼 대단했던 것이다.
준후는 역용술을 사용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몇 명이고 창조할 수 있었다.
1시간여를 이동해 도착한 태정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준후는 자신이 연기할 인물을 온몸에 새겼다.
32세, 정태후.
정일 변호사 사무소 의료 소송 담당 변호사.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변호사로 변장한 준후가 원장과 어떻게 담판을 짓느냐에 따라서 소송 결과와 속도와 방향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날 것이다.
의사로서의 양심을 판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지 보여줄게.
당신이 가진 것들, 전부 부숴줄게.
의료계에 다시는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묻어줄게.
준후가 가슴에 독기를 충전하는 때 마침.
간호사의 호출이 있었다.
“이미호 환자님. 진료실로 들어가…… 어? 누구세요?”
간호사가 준후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료를 볼 사람은 여성인데 남자인 준후가 진료실에 들어가려고 하자 어리둥절한 것이다.
“혹시 보험회사 직원?”
“아니요. 변호사입니다.”
준후는 차갑게 대답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의자에는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내의 이름 이달석.
태정병원의 원장이자 경태 아버지를 수술한 집도의.
의료사고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 인간쓰레기.
달석은 준후가 싫어하는 얍삽한 쥐 상이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달석이 준후를 위아래로 훑더니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정일 변호사 사무소, 의료 소송 담당 변호사 정태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준후는 의자에 앉으며 몸 바깥으로 내공을 분출했다.
달석에게 위압감을 심어주는 것과 동시에.
명함 전달을 하지 않고도 자신이 변호사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사실 가짜 명함을 만들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위장한 신분을 연기하고 있지 않은가.
증거는 남기지 않는 편이 좋았다.
“변호사 선생님이 대관절 무슨 연유로 찾아왔습니까?”
달석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내공으로 인한 압박감 때문인지.
명함을 주지 않았음에도 달석은 딱히 준후를 의심하지 못했다.
준후의 계획대로였다.
준후는 곧바로 두 번째 계획에 돌입했다.
주머니에 슬쩍 손을 넣어 휴대폰의 녹음기 앱을 작동시킨 것이다.
지금부터 하는 대화는 고스란히 녹음될 것이다.
그리고 저장된 녹음 파일은 조만간 달석의 숨통을 조이겠지.
“피차 피곤한데 긴말은 하지 맙시다.”
준후는 서류 가방에서 차트를 꺼내 책상에 던졌다.
경태 아버지의 차트였는데 차트에는 준후가 분석한 의료사고의 내용이 고스란히 정리되어 있었다.
1차 수술에서 발생한 식도와 소장의 봉합 미흡.
그로 인해 발생한 천공.
1차 수술 후 환자의 복통과 혈변에 대한 진단 및 처치 지연.
환자 사후에 원장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지어낸 질병인 혈관이형성증 등등.
“이…… 이건?”
“편하게 읽어보세요. 읽고 나면 불편해지겠지만.”
“일단 보기는 하죠.”
차트를 살피는 달석의 표정이 차차 딱딱해졌다.
준후가 파악한 내용을 달석이 모를 리는 없을 터.
준후는 달석이 머리 굴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리는 듯했다.
“저희 의뢰인의 남편분께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저지르셨더군요. 의뢰인의 남편을 돌아가시게 만든 건 위암이 아니라 당신, 아닙니까?”
준후는 거칠게 달석을 꾸짖고 몰아붙였다.
“나는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했을 뿐이에요.”
달석이 차트에서 눈을 떼고 변명하듯 말했다.
“도리요? 제가 도리라는 단어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
“실수하고 변명하고 은폐하고 거짓말을 하는 게 의사의 도리입니까?”
“흠흠. 나는 더 할 말 없으니까 나가세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법정에서 합시다.”
달석이 당장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본인이 실수가 이렇게 까발려질 줄 몰랐으니까 당황했겠지.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겠지.
하지만 준후는 달석을 놔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무림에 있을 때.
준후는 사파인들에게서 광견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한 번 목표로 삼은 사파인은 반드시 죽이거나 뇌옥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 성질이 현대라고 해서 사라졌을 리 없었다.
“이봐요, 원장님. 법정에 가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차트에 증거가 이렇게 명확한데?”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준후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슬슬 압박의 수위를 높일 예정이었다.
“입원 차트 한번 보시죠.”
“입원 차트는 왜…….”
“저희 의뢰인은 입원하는 내내 1인실을 사용했습니다. 경제력이 충분하다는 말이죠.”
“…….”
“소송으로 질질 시간을 끌다가 의뢰인을 지치게 만들 생각인 모양인데 어림도 없습니다.”
준후는 달석의 계략을 사전에 박살 냈다.
의료사고를 저지른 병원이 소송을 들먹이며 시간을 끄는 일은 이제는 비밀도 아니었다.
“으으…….”
입원 차트를 확인한 달석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간 끌기가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요새 김태훈 배우 사건도 있고 해서 병원이 뒤숭숭한 걸로 알고 있는데.”
“…….”
“저희 의뢰인 사건까지 언론에 알려지면 아주 행복하시겠네요. 그렇죠?”
준후는 환하게 웃으면서 달석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그쯤 되자 침착하던 달석도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책상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준후는 느낄 수 있었다.
달석이 다리를 심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법.
달석을 궁지에 몰았지만 준후는 아직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했다.
“하…… 미치겠네. 진짜.”
달석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전자 담배였다.
전자 담배를 물고 달석은 간호사에게 점심을 먹으라는 전갈을 전했다.
어차피 변호사가 오전 마지막 진료였기에 뒤를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쓰으으읍.
후우우우.
“좋아요. 톡 까놓고 이야기합시다. 그쪽이 원하는 건 뭡니까?”
궁지에 몰린 달석이 똥구멍을 까 보였다.
달석이 내뱉은 자욱한 담배 연기가 진료실을 떠돌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준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지폐를 새는 시늉을 했다.
녹음 중이었기에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 합의금을 넉넉하게 드릴 테니 합의서 씁시다. 오늘 일은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제일 중요한 걸 빼 먹으셨군요. 사과는 안 하실 겁니까?”
준후가 최후의 미끼를 던졌다.
이 질문 다음에 나오는 대답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요. 내가 의뢰인께 직접 사과하리다. 병원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걸 깨끗하게 인정하겠어요. 그럼 되겠어요?”
달석이 원무과에 전화를 했다.
잠시 후 원무과 직원이 진료실에 들어와 책상에 합의서를 올려놓았다.
빠른 업무 처리 속도를 보니 이 짓을 몇 번이고 해본 모양이었다.
이 악독한 놈들…….
준후는 합의서를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인께 서류를 전달드리고 조만간 연락드리죠.”
“그래요. 잘 좀 처리해 주세요.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진료실을 나온 준후는 병원을 벗어난 후 보물 같은 증거들을 다시 살폈다.
-그래요. 내가 의뢰인께 직접 사과하리다. 병원에서 사고가 있었다는 걸 깨끗하게 인정하겠어요. 그럼 되겠어요?
휴대폰 녹음 파일에는 원장이 본인의 죄를 인정하는 발언이 담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준후의 손에 들린 합의서에는 병원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독소 조항들이 담겨 있었다.
녹음 파일과 합의서가 언론에 보도된다면 어떻게 될까.
원장과 태정병원은 민심에 지탄을 받고 의료계에서 매장될 게 분명했다.
너희들이 저지른 죄.
달게 받아라.
뒤돌아서 건물을 응시한 준후가 지하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빠드드득.
빠드드득.
역용술을 거꾸로 펼치자 본래대로 돌아온 준후의 얼굴.
의료 소송 담당 변호사 정태후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