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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0화 (30/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0화

제6장 참교육(5)

외래 진료도, 수술도 없는 한가한 날.

달석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서 전자 담배 연기만 줄기차게 뿜어대고 있었다.

요즘 속이 타들어 갈 일만 터지고 있었다.

김태훈 사건도 해결하기 벅차 죽겠는데 또 다른 환자의 의료사고까지 터졌던 것이다.

쓰으으읍.

후우우우.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달석은 검지로 탁자를 두들겼다.

초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얼마 전 합의서를 받아간 변호사는 일주일째 연락이 없었다.

돈을 더 뜯어낼 생각인가.

아니면 또 다른 수작이 있는 건가.

달석은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세상일이란 왜 이리도 내 마음처럼 안 되는 건지.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려 들어오라고 했다.

원무과장 원석이 집무실로 들어와 얼굴을 비쳤다.

“오전부터 담배 너무 태우시는 거 아닙니까?”

“내 속이 타는 것보다는 담배가 타는 게 낫지 않겠어?”

“속도 타고 담배도 타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돼서 하는 소리입니다.”

원석이 달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석은 달석의 오른팔로 이름의 끝 자가 같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라는 점도 같았다.

“그건 그렇고 합의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몰라. 능구렁이 같은 새끼가 연락 한 번 없어.”

“그럼 먼저 연락해서 떠보세요.”

원석의 지적에 달석은 쓰게 웃었다.

놀랍게도 첫 미팅 때 변호사의 명함을 받아두지를 못했다.

변호사에게서 강력한 위압감과 카리스마를 느꼈던 탓이다.

지금 생각하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어디 법인이고, 어디 소속인지 알았다면 좀 더 쉽게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존심 상하게 먼저 연락할 순 없지. 그래도 이번 주 안에는 기별이 오지 않겠어?”

“그렇긴 하겠네요. 근데 저는 원장님이 3억씩이나 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석이 합의금으로 화제를 돌렸다.

의료사고 발생 시 태정병원은 보통 ‘소송거세요’하고 배를 째는 편이었다.

합의는 가뭄에 콩나물 나듯이 했는데.

합의금은 단 한 번도 1억을 넘은 적이 없었다.

이번 케이스는 특이 케이스였다.

“나도 배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별수 없었어. 하필 김태훈 사건하고 시기가 겹쳤으니까.”

“…….”

“또 그 건은 우리 쪽 실수가 차트에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단 말이지. 어쩔 수 없었어.”

달석은 생각했다.

합의금 3억으로 그 사건을 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저렴하게 잘 처리한 것이라고.

김태훈 사건에 이어 이번 사건까지 공론화된다면 태정병원의 추락은 막을 수 없었다.

“국밥이나 한 그릇 때리러 가시죠. 이럴 때일수록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 한번 잘했네. 당장 가자고.”

달석은 원석과 함께 도보 5분 거리의 국밥집을 찾았다.

국밥을 주문하고 TV를 보는데.

뉴스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강남에 위치한 모 소화기 외과 전문 병원에서 홍역이 끊이질 않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병원 측에서 돈으로 의료사고를 묻으려 한다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앵커의 설명이 끝나고 변조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계음이 섞였지만 변조된 음성의 주인공을 달석이 모를 리 없었다.

달석의 두 뺨은 삽시간에 분노로 물들었다.

“새파란 애송이가 감히 날 속였어?”

* * *

같은 시각.

준후는 도서관 앞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앵커는 준후가 건넨 음성 파일의 핵심 부분을 소개하고.

합의서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었다.

특히 합의금을 받으면 이번 사건을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독소 조항을.

쌤통이고 깨소금 맛이다.

사람의 생명으로 장난질을 친 사악한 쓰레기들아.

준후는 모처럼 활짝 웃었다.

전교 수석으로 입학한 후.

오늘처럼 웃어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얼마 전 준후는 가상의 변호사 정태후로 빼낸 자료를 경태에게 건네주었다.

자료는 지인 변호사를 통해 얻었다고 둘러댔다.

-선배, 어떻게 하실래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이 자식들 조져놔야지.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 돈으로 우리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묻어버릴 순 없어.

경태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태정병원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도 전했다.

준후가 바라던 시나리오대로였다.

-어쨌거나 자료 고맙다. 이건 고맙고 소중하게 잘 쓸 게. 이것만 있으면 그 새끼들 박살 내고도 남겠지.

-…….

-생각해 보니 너한테 계속 신세만 졌네. 아버지가 의료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도 네 덕분에 알게 됐고. 결정적인 자료도 너한테 얻었고.

-사는 게 다 그렇죠, 뭐. 도울 때도 있고 도움받을 때도 있고.

-조만간 우리 가족하고 밥 한 끼 하자. 괜찮지?

-물론이죠.

음성 파일과 합의서를 경태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준후는 사건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준후는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는 경태 가족의 몫이었기에.

이따금 준후는 경태에게 사건의 진행 사항을 들었다.

경태 가족은 국내 최고의 로펌인 김앤박의 의료 전문 소송 변호사를 고용했다고 했다.

준후에게 받은 자료로 언론 플레이를 하겠다고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오늘의 뉴스였다.

뉴스를 접한 태정병원 원장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준후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고.

병원이 폭삭 주저앉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워하지 않을까.

준후는 오래간만에 타인의 고통에서 행복을 느꼈다.

태정병원 원장은 그래도 싼 놈이었다.

지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의료계의 썩은 뿌리 중 일부를 잘라냈다는 사실에 준후는 뿌듯함도 느꼈다.

의사가 되어서도 이 마음은 결코 잊어선 안 되리라.

뉴스 시청을 마친 준후는 교실로 이동해 오후까지 수업을 들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교실로 직접 찾아온 경태와 대화도 나눴다.

화제는 당연히 태정병원 뉴스였다.

“아까 실시간으로 뉴스 보는데 진짜 사이다 몇 캔을 마신 것 기분이었다.”

“제가 선배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근데 앞으로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예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경태의 차후 대책이 궁금했다.

“김앤박에서 알아서 할 거긴 한데…… 김태훈 배우 쪽하고 다른 태정병원 피해자하고 접촉해서 집단 소송을 갈 것 같아.”

“…….”

“뉴스 보도가 크게 나갔으니까 다른 피해자들도 뭔가 낌새를 차렸겠지.”

“잘됐네요. 그런 병원은 이참에 망해 버려야죠.”

준후가 맞장구를 쳤다.

살다 보면 뒤끝이 찜찜한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번에는 그럴 걱정이 없을 듯했다.

어리석은 놈들.

너희들은 스스로 무덤을 팠어.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의료과실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준후의 의견이었다.

무릇 사람 일이란 완벽할 수가 없었다.

의사가 다루는 대상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영역이었다.

실수를 했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그 실수를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한 가정의 가장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서.

거짓말로 가족들을 우롱하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던 태정병원 스태프들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나 다름없었다.

인간이라면 결코 그래서는 안 됐다.

“오늘 저녁 약속 기억하지?”

“네. 시간 비워뒀어요. 근데 선배는 어디 가시게요?”

“아버지 납골당에 다녀오려고.”

“그럼 저도 같이 갈게요.”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경태의 만류에도 준후는 경태와 인천에 위치한 납골당을 찾았다.

경태 아버지의 신주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경태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또 맹세했다.

당신처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고.

내 손으로 의료계를 환골탈태시키겠다고.

환자를 정성껏 치료하는 것만큼이나 의료 환경을 개혁하며 썩어빠진 의사를 뿌리 뽑는 것도 중요하다고 준후는 믿었다.

서울로 돌아오니 밤 7시가 되었다.

하늘은 깜깜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준후는 경태 어머니인 미호가 예약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경태 가족들의 입에서는 준후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왔다.

준후에 대한 칭찬만 나왔고.

준후에 대한 찬사만 나왔고.

준후에 대한 감사 인사만 나왔다.

실제로 준후가 수정의 과외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술술 풀렸으니까.

경태 가족이 방청객처럼 준후를 띄워주었으므로 준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런 대접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 참, 오빠가 말해준 대로 큰 병원 이비인후과 가서 수면 검사받았거든요?”

수정이 준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그래서?”

“저 수면무호흡증 맞대요. 그것도 중증이래요. 어제부터 양압기 쓰고 있는데 조금 불편하긴 해도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더라고요.”

수정이 전해 준 소식이 준후는 반가웠다.

과외 첫날 준후는 수정의 인상과 골격을 보고 수면무호흡증을 의심했는데.

그게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벌써부터 족집게 의사 노릇을 할 수 있어서 준후는 기뻤다.

그동안의 의료 공부가 헛되지 않았음에 뿌듯했다.

무림을 경험한 준후의 천직은 의사임이 분명해 보였다.

“준후야. 잠깐 나 좀 볼래?”

식사 도중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는데 미호가 준후를 창가 쪽으로 불렀다.

미호는 이제 준후를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네, 어머니 무슨 일이신지…….”

“이번에 여러모로 고마운 일이 많았잖니? 말만으로 넘어가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괜찮습니다. 저는 딱히 보상을 바란 게 아니에요.”

“알아. 다 아는데 뭐라도 해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래.”

미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귓속말을 전했다.

주식 중에 제트 코인이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부터 제트 코인을 차곡차곡 구입해 두라는 것이었다.

“코인이면 위험하지 않나요?”

“일반적인 코인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제트 코인은 달라. 내가 아는 정보통에서 관리하는 코인이니까.”

미호는 본인이 국내 3대 증권회사를 다니며 본부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건 수정이와 경태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꼭 너만 알고 있으렴.”

“…….”

“믿기 힘들면 조금만 사도 돼. 하지만 꼭 구입은 해두렴. 나중에 큰 자산이 될 테니까.”

말을 마친 미호가 본인의 입가에 검지를 댔다.

비밀 엄수를 요구하는 제스처였다.

준후는 알겠다는 의미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경태 가족과의 저녁 식사가 끝난 것은 밤 10시였다.

준후는 집에 돌아와 휴대폰에 주식 앱을 깔았다.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주식 광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주식을 하고 있었다.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재테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동기들이 주식 이야기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준후야 주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미국의 스타트업 전기차 업체에서 제작한 코인이구나.

1코인 당 2만 원밖에 안 하네?

준후는 제트 코인을 검색해 보고 턱을 쓸어내렸다.

주식이 아닌 코인을 구매한다는 사실이 꺼림칙하긴 했다.

코인의 신용도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했으니까.

하지만 증권회사 관리자인 미호가 준후에게 비밀 엄수를 부탁하며 제공한 정보가 아니던가.

마냥 무시하거나 모른 척하기에는 아까운 정보였다.

설마 똥값으로 떨어지기야 하겠어?

평소에 적당한 금액만 넣어두자.

돈 쓸 일도 별로 없으니까 과외비에 절반 정도면 되겠지.

생각을 정리한 준후는 제트 코인을 40코인 구입했다.

먼 훗날 벌어질 일은 상상도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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