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5화
제7장 본과(5)
“……그랬던 거지.”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준후는 안타까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교의 설명을 듣고 나니.
환자의 죽음이 자살로 치부되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번개탄을 피웠던 차량에서 유서가 발견되었고.
고인은 회사 업무로 주변 사람에게 자주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정황이나 증거가 워낙 명확했기에 경찰은 사건을 자살로 판단한 듯했다.
유가족 또한 부검을 원치 않았던 사실이 한몫했고.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준후는 고인의 죽음을 애석해하면서도 범인에게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범인은 고인을 두 번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요.
두 번째 죽음은 사회적인 죽음이었다.
현장을 이렇게 꾸밀 정도면 악독하면서도 치밀한 인간인 게 분명했다.
반드시 처단해야 해.
준후는 범인을 잡아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고인을 위해서라도.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도.
“근데 조교님은 사건을 자세하게 알고 계시네요?”
“기증하러 온 유가족에게 들은 것도 있고. 기사 검색도 해봤거든. 크게 이슈는 안 됐지만.”
“기사로 나오긴 나왔군요.”
준후는 중얼거리면서 고인의 죽음을 머릿속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범인은 고인의 차 안에서 고인과 마주했다.
고인이 방심했을 때 밧줄이나 끈으로 고인의 목을 졸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후 번개탄을 구입했다.
그리고 고인이 번개탄으로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라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준후가 고인을 해부한 결과.
가장 그럴듯한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유서였다.
범인이 고인에게 유서를 쓰게 만들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고인을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제압했던 걸까.
아니면 심리적으로 완벽하게 우위에 있었을까.
떠오르는 몇 가지 질문과 의문들.
그 속에서 준후는 괜찮은 해답을 찾아냈다.
무림맹 소속으로 활동할 때.
비슷한 사건을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였다.
“계속 질문하는 게 수상한데? 너 혹시 이상한 음모론 같은 거 생각하는 거 아니지?”
조교가 가느다란 눈매로 준후를 응시했다.
팔짱을 끼며 방어적인 태도도 보였다.
“혹시 고인이 살해당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야.”
“…….”
“제발 그런 얼토당토 않는 생각은 버려. 그런 생각은 유가족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준후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조교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고인을 해부하지 않았으니 조교는 고인의 죽음에 의문을 품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승범이 형 건만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 학과장님한테 말씀드리기 전에 나도 혼쭐을 낼 거니까.”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준후는 학과 사무실을 나와서 복도를 걸었다.
조교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고인의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몇몇 매스컴이 고인의 죽음을 짤막하게 다뤘는데 신선한 정보는 없었다.
고인의 죽음은 그저 자살률 세계 1위 국가의 흔하디흔한 자살사건으로 다뤄졌을 뿐이었다.
고인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줄 사람은 이제 나뿐이구나.
모든 것이 내 어깨에 달렸구나.
준후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 * *
해부학 실습 교수 보성은 연구실에서 논문을 정리하고 있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보성은 자신의 학문을 갈고닦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똑. 똑. 똑.
불청객처럼 찾아온 노크 소리.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보성은 의문을 느끼면서 들어오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준후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래. 준후구나. 연구실에는 무슨 일이니?”
“오늘 해부한 카데바에 대해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제 말을 꼭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준후가 속사포로 대답했다.
별일이 다 있군.
카데바 때문에 학생이 교수를 찾는 경우가 있다니…….
보성은 준후를 책상 앞 소파에 앉히고 본인은 그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문득 바라본 준후의 표정이 비장했다.
허튼소리를 하려고 방문한 건 아닌 듯했다.
“진지하게 들어줄 테니 할 말을 해보렴.”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어지는 준후의 설명을 들으며 보성은 혀를 찼다.
카데바로 해부 중인 고인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를 당했다.
해부하던 도중 그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보성이 해부학을 가르친 지도 어언 10년째.
이런 어처구니없는 케이스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준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고인이 번개탄으로 질식했다면 폐에 그을림이 있는 게 마땅했다.
폐에 그을림이 없다면, 고인 목에 존재하는 삭흔으로 인한 경부 압박 질식사가 사망 원인이 될 테고.
“해부학 공부를 따로 한 적이 있니?”
보성이 감탄하며 물었다.
선행 지식이 있어야만 준후와 같은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준후와 같이 해부를 한 조원들은 카데바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네. 그리고 평소에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도 있습니다.”
“…….”
“죄송하지만 혹시 교수님도 제가 못 미더우신가요?”
준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본인의 주장이 묵살될까봐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듣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는.
준후의 주장이 황당무계하게 드 여지가 컸으니까.
“그럴 리가. 나는 질문하고, 의심하고, 해답을 찾는 학생을 좋아한다. 너처럼.”
보성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확인해 보러 가자꾸나.”
“감사합니다. 교수님.”
보성은 준후와 함께 곧바로 해부학 실습실을 찾았다.
가운을 걸치고 1조가 실습을 진행했던 테이블 앞에 섰다.
드르르륵.
준후는 해부에 필요한 도구가 놓여 있는 드레싱 카트를 끌고 한 박자 늦게 합류했다.
시키기도 전에 할 일을 알아서 한다라…….
준후는 역시 영민한 학생이었다.
펄럭.
보성은 카데바를 덮고 있던 하얀 방포가 걷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카데바의 폐부터 살폈다.
과연 준후의 말이 옳았다.
카데바의 폐는 깨끗했는데 번개탄으로 질식했다면 표면이 이렇게 말끔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고인이 살해를 당했단 말인가.
보성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팔뚝에는 어느새 소름이 돋았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장갑을 낀 손으로 보성은 카데바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순간 좁아지는 미간.
앙다물어지는 입술.
카데바의 눈동자에서 빨간 점들이 보였다.
일혈점이었다.
경부압박으로 사망한 환자에게서 주로 드러나는 징후인데.
순환되지 못한 핏줄들이 터지면서 이런 증상이 발현됐다.
물론 아닌 경우도 더러 존재했지만.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고인은 경부 압박 질식사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
“…….”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80퍼센트 정도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지금부터 나머지 20퍼센트를 찾아보자.”
“목을 절개하실 거죠? 교수님?”
“그래야지.”
“그럼 제가 절개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해도 될까요?”
“무슨 생각이니?”
보성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절개만 해도 환자의 타살을 입증할 수 있거늘.
굳이 동영상을 촬영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중에 경찰이나 범인이 딴 소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저희가 실습을 하다가 고인을 훼손한 게 아니냐고요.”
“…….”
“그런 소리가 안 나오게 사전에 차단해야죠.”
준후가 기다렸다는 듯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았다.
허허. 이 녀석 좀 보게?
놀랍게도 준후는 보성보다 한 걸음 더 멀리 보고 있었다.
절개 후에 벌어질 수 있는 논란들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성은 어쩐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구나. 그럼 시작하마.”
보성은 10번 메스를 손에 쥐었고 준후는 휴대폰을 손에 든 채 보성을 촬영했다.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스으으윽.
메스가 카데바의 살결 위로 미끄러졌다.
미끄러진 자리가 말끔하게 베어 나갔다.
보성은 오른손에 쥔 켈리로 절개창을 좌우로 벌렸다.
피하층과 근막층이 벌어지면서 목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보성의 입에서 흐르는 짧은 탄식.
카데바의 설골과 후두 연골에 골절이 발견되었다.
이는 환자가 경부 압박 질식으로 사망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자살 사건이 타살 사건으로 변하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경부 압박으로 사망한 고인이 번개탄을 피울 수는 없으니 누군가가 고인을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게 분명하구나.”
“…….”
“준후, 네가 아주 잘 봤다. 고인께서도 한을 풀 수 있겠어.”
보성은 준후를 치켜세웠다.
고작 본과 1학년생이 이리도 풍부한 해부학적 지식과 깊은 통찰력을 선보일 줄이야.
실로 말도 안 되는 활약이었다.
준후의 번뜩이는 사고가 없었다면 이번 사건은 영영 자살 사건으로 묻혔으리라.
망자의 원한은 억울해서 구천을 떠돌아다녔을 테고.
보성은 준후가 아직 본과 1학년생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제가 경찰에 신고하고 유가족에게 연락할까요?”
동영상 촬영을 마친 준후가 보성에게 물었다.
보성은 고개를 저었다.
“넌 이미 충분히 고생했어. 마무리는 내가 하마.”
* * *
준후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교정을 걷고 있었다.
보성의 도움으로 고인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 지어졌다.
보성은 조교에게 연락해 유가족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유가족과 직접 통화해 진실을 알렸고.
경찰과도 직접 연락을 취했다.
타살 증거가 명확했으므로 재수사가 이뤄질 게 분명했다.
자신의 관찰력으로 고인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준후는 뿌듯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죽은 자가 두 번 죽지 않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몰라도.
준후는 법의학이라는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보성은 해부학 교수이자 법의학 교수이기도 했다.
그래서 보성에게 해부학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법의학까지 따로 배워보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보성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만약 허락이 없다면 스스로라도 공부해 볼 생각이었고.
“서준후.”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리자 승범 패거리가 서 있었다.
표정이 험악한 게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SNS건으로 조교에게 불려가 따끔하게 한 소리 들었겠지.
준후는 깨소금 맛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승범 패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할 말이라도 있어?”
“시치미 떼지 마, 자식아. 네가 조교한테 일러바쳤잖아.”
승범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일러바친 게 아니라 신고한 거지. 너희들의 경솔한 행동을.”
“…….”
“그렇게 떳떳했으면 SNS 게시글은 왜 2시간 만에 지웠을까? 설명해 볼래?”
준후의 지적에 승범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준후에게 다가와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 지금 나한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고 있지? 안 봐도 뻔하다.”
“한 방이 아니라 두 방은 먹인 것 같은데?”
준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놀랍게도 승범 역시 준후를 비웃고 있었다.
방금까지 분통이 터질 것 같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지?
“우리 순진한 준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조만간 알게 될 거다. 네가 모르는 세상의 이치를.”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벗어나는 승범.
그런 승범의 뒷모습을 준후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