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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6화 (36/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6화

제7장 본과(6)

이튿날.

준후는 친구들과 학교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학과 사무실 앞에 같은 반 학생들이 단체로 몰려 있었다.

게시판에 공지라도 붙은 걸까.

호기심이 생겨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떼거지로 몰려 있네. 게시판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보여?”

“나는 안 보여.”

“나도.”

성호의 질문에 정한과 아영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게시판 앞을 학생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고 게시된 글은 글자 크기가 너무 작았다.

앞선 학생들이 빠져야만 글을 확인할 수 있을 듯했다.

준후야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준후는 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을 눈으로 흘려보냈다.

흐릿하고 작게 보이던 글자가 곧 현미경을 사용한 것처럼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신체 특정 부위에 내공을 불어넣으면 준후는 해당 신체를 강화할 수 있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오감 중 예외는 없었다.

“승범이 형, 소식인데? 얼마 전에 SNS 건 관련된 내용이고 1주일 근신이래.”

게시글을 읽고서 준후는 불쾌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 승범 패거리는 카데바와 찍은 인증 사진을 SNS로 올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처벌이 고작 1주일 근신이라고?

우리 의대 명예에 똥칠을 했는데?

“1주일 근신? 너무 솜방망이 아닌가?”

“난 최소 유기정학은 먹을 줄 알았는데.”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가봐.”

성호, 아영, 정한의 의견이 그랬고 다른 동기들의 반응도 대체적으로 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 처벌은 수위가 너무 낮았다.

“나 잠깐 학과 사무실 좀 다녀올 게. 다들 먼저 교실에 있어.”

준후는 과 사무실을 찾아가 조교인 하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징계에 필요한 자료를 넘기지 않았느냐.

하나도 강력한 징계를 예상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째서 1주일 근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징계가 나올 수 있느냐고 성토했다.

학과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미안하게 됐다. 준후야. 사실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

“조교님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학과장님이 아시겠지.”

조교가 힘없이 대답했다.

“죄송해요. 조교님께 화를 낼 건 아니었는데.”

준후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에게 잘못은 없었다.

하나에게는 승범 패거리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냐. 그럴 수 있어. 내가 너한테 잔뜩 바람을 집어넣었으니까. 승범이네, 처벌 제대로 받을 거라고.”

“학과장님, 엄격한 분이라면서 이번에는 왜 그런 판단을 하셨대요?”

준후는 학과장에게 화살을 돌렸다.

학과장의 판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평소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내셨을 텐데 이번에는 아니더라고.”

“…….”

“사람이니까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사건이 크게 알려진 것도 아니니 조용하게 넘어가자고 하시더라고.”

하나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나 역시 학과장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쯤에서 준후는 며칠 전 승범이 자신에게 했던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렸다.

-우리 순진한 준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조만간 알게 될 거다. 네가 모르는 세상의 이치를.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승범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건 분명했다.

대화를 마친 준후는 찝찝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로 이동하는데 때마침 승범 패거리를 마주쳤다.

승범의 입가에는 재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는 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준후는 대뜸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알고 싶어? 궁금해? 말해줄까? 말까?”

“말해.”

“어휴, 무서워라. 이러다가 저번처럼 또 한 대 치겠네.”

승범이 빈정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특별한 사이니까 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줄게. 우리 아버지가 신원대 병원 부 병원장이다.”

“…….”

“학과장님하고는 아주~ 친한 사이고.”

승범의 설명에 준후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승범은 학연으로 이번 소동을 무마한 것이다.

죄를 저지르고도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나 싶었는데 설마 학과장과 연줄이 닿았을 줄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학과장의 처사는 지나쳤다.

친구 아들이라고 해서 이렇게 감싸는 건 비도덕적인 행위였다.

학생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준후는 승범만큼이나 학과장이 미워졌다.

죄를 덮어준 인간과 죄를 저지른 인간은 사실상 같은 범주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준후야. 세상은 말이다. 힘이 세고 머리가 좋다고 해서 잘 나가는 게 아니야.”

“…….”

“빽이 든든해야 잘 나가는 거라고. 네가 나처럼 SNS에 글을 올렸으면 이 정도로 끝났을 것 같아?”

승범이 한껏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준후에게 한 방 먹인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쓰레기 같은 놈.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고.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다니.

승범은 용서할 수 없는, 재사용조차 불가능한 놈이라는 사실이 이번 사건으로 재증명 되었다.

“우쭐하지 마. 아버지 후광으로 버티는 것도 이번뿐이니까.”

준후는 지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운 좋게 넘어가는 것도 이번뿐이니까. 너 나중에 내가 죗값을 치르게 만들 거야. 반드시.”

“아휴. 제발 좀 그래 주세요.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비아냥거리는 승범을 지나쳐 준후는 가던 길을 갔다.

승범의 징계가 형편없었던 것은 분명 뼈아팠다.

하지만 준후는 이번 사건으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자신의 행동이 정의로웠다고 해서 꼭 그 결과까지 정의롭지는 않다는 교훈을.

그렇다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분명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실력을 갖춘 외과의가 된다.

거기에 하나 더.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갖춘 외과의가 된다.

실력만큼이나 권력도 중요했다.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 * *

오늘따라 유독 수업에 집중이 되지 않는 준후였다.

승범 사건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확실히 현대가 더 불편한 점도 있긴 해.’

준후는 무림과 현대를 비교해 보았다. 무림에서는 어느 정도 자력갱생이 가능했다.

무림을 무협(武俠)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협(俠)을 이루기 위해서 무(武)를 사용하는 일을 사회가 용인하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적일도에게 목숨을 잃은 후.

준후는 무공을 키워 자력심판을 이루어냈다.

자신의 손으로 적일도를 처단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한 개인의 처벌은 국가의 공권력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니까 현대의 준후는 승범을 개인적으로 손봐주는 일이 불가능했다.

무림을 경험했던 준후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인 것이다.

수업이 끝난 후 준후는 곧바로 도서관을 찾았다.

자신에게 부족한 처세를 보충하기 위해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었다.

[현명한 군주는 사자와 여우, 양쪽 모두가 될 줄 알아야 한다.]

준후가 감명 깊게 읽은 문구 중 하나였다.

사자는 실력과 결단력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우는 꾀와 지략을 상징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무림에서의 삶과 현대의 삶을 돌이켜보고.

준후는 스스로에게 여우 같은 부분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준후는 예전부터 노력과 끈기, 성실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왔으니까.

하지만 의사 생활을 하게 되면 이런 성품들은 자칫 악한 의사들에게 이용을 당할 수도 있었다.

군주론을 음미하던 준후는 문득 무릎을 탁- 쳤다.

마침내 여우의 지략에 눈을 떴다.

군주론의 여론전과 관련된 부분을 읽던 중 묘안이 떠오른 것이다.

학연으로 SNS 사건을 무마한 승범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근사한 계략 말이다.

도서관을 나온 준후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었다.

산천일보 기자 이태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거 준후의 CPR을 기사로 냈던 그 기자 말이다.

-여보세요.

“네, 기자님. 안녕하세요. 저 서준후라고 하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기억하다마다요. 연락처도 아직 저장해놨는데.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제가 기막힌 특종 하나 물어드릴까 해서요.”

준후는 승범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고 이를 태환이 기사로 낼 수 있겠냐고도 물었다.

승범 사건을 공론화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준후는 승범에게도 한 방 먹이고 싶었고.

승범을 감싼 학과장에게도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여우의 지략으로 두 사람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코털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으면 큰 오산이지.

-혹시 증거 자료 있어요? 말만으로는 기사를 낼 수가 없는데.

“자료요? SNS 게시글 캡쳐본 있는데 통화 끝나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좋아요. 그럼 나도 자료 검토한 다음에 금방 연락 줄게요.

“…….”

-승범이라고 했나? 이 학생 아주 악질인 것 같은데. 제대로 혼쭐 나봐야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준후는 통화를 끊은 후 저장해 둔 이미지 파일을 태환에게 전송했다.

기사가 나가면 학과장과 승범이 준후를 의심하겠지만 준후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 작정이었다.

그들에겐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으니까.

SNS 게시글 캡쳐본이라면 SNS를 확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장할 수 있지 않던가.

준후가 태환에게 캡쳐본만 넘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음성 녹음 파일과 동영상을 태환에게 보냈다간 제보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들킬 수 있었기에.

승범아, 아주 고맙다.

덕분에 난 이 기회에 여우가 될 수 있었어.

내게 모자랐던 마지막 조각을 채웠다고.

이쯤 되니 준후는 승범에게 오히려 감사의 절을 올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오늘처럼 지략을 키워나간다면.

외과의가 되어서도 의국 내 정치 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지이이잉.

5분 만에 울리는 휴대폰.

발신자는 당연하게도 태환이었다.

“네. 기자님. 벌써 보셨어요?”

-의학 파트 전문 기자인데 의학 특종을 놓칠 순 없잖아요.

태환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만하면 이슈로 만들기에는 부족함이 없네요. 당장 내일 기사로 올릴게요.

“감사합니다. 기자님.”

-감사 인사야 내가 준후 학생한테 해야죠.

준후는 그 후로도 태환과 10분 정도 더 대화를 나눴다.

서로의 근황을 물었고,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로 발전했으며, 앞으로 악어와 악어새 관계로 지내자는 말도 했다.

준후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셈이었다.

통화를 끊은 뒤 준후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켰다.

승범을 혼내주지 못해 하루 종일 찜찜했는데 이제야 그 찜찜함이 가셨다.

무엇보다 큰 수확이라면 학과장까지 묶어서 엿을 먹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학생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점.

승범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점 등등 때문에 학과장 역시 이번 사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준후에게 꼴좋게 당한 것이다.

자업자득이니까 날 원망하지 말라고.

아니지.

내가 제보자인지 확신을 못 할 테니까 원망도 못 하려나?

준후가 피식 웃으며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덩치 좋은 사내 두 명이 준후에게 직진해 왔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준후의 앞길을 막아섰다.

“학생,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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