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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38화 (38/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38화

제7장 본과(8)

도서관을 나오자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내렸는지 바닥에는 벌써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머리와 코트에 내려앉는 눈을 느끼며 준후는 걷기 시작했다.

집보다 익숙하게 봐 왔던 교정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건물과 학생들, 벤치, 운동장 등등.

졸업식 당일을 제외하면 이제 준후가 대학을 다시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6년간의 배움이 끝났으니까.

그동안 살인적인 쪽지시험을 이겨내고.

PK 실습을 다녀왔으며.

한 달 전에는 의사 고시에 합격해 번듯한 의사가 되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보성의 연구실로 가던 중.

준후는 본과 2학년 생 의대 후배들을 마주쳤다.

선배들에게 인사하던 게 엊그제 같거늘.

준후는 어느새 인사를 받기만 하는 왕 고참이 되어버렸다.

“도서관 가는 길이니?”

“네. 근데 선배는 여전히 공부를 열심히 하시네요. 졸업이 코앞인데도 공부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정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준후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실제로 동기생 중 아직까지 학교를 찾는 사람은 준후가 유일했다.

준후는 해부학 교수 보성 밑에서 틈틈이 개인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 수업도 오늘이 마지막이긴 했지만.

“배워서 남 주는 게 의사니까.”

“역시 학과 전설은 뭔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아요. 전교 수석 입학에, 전 학기 4.5점에, 의사고시 만점이라니…….”

“당연하지. 오리엔테이션 장기자랑이랑 술 문화를 바꾼 것도 준후 선배인데.”

정아의 말에 선아가 맞장구를 쳤다.

예기치 못하게 훅 들어온 칭찬이 준후는 쑥스러웠다.

이상하게 칭찬만큼은 쉽게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이러다가 졸업 전에 해외여행부터 가겠다.”

준후의 농담에 정아와 선아가 꺄르르 웃었다.

“선배, 카페에서 커피라도 드실래요?”

“미안. 교수님을 뵈어야 해서. 공부 열심히 하고.”

후배들과 대화를 마친 준후는 곧장 보성의 연구실을 찾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준후 왔니?”

“네. 교수님.”

“거기 앉거라.”

준후가 소파에 앉자 보성도 준후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성은 오늘따라 심각한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준후야, 네가 얼마 전에 보낸 논문 어떻게 생각하니?”

역시 마지막 논문이 문제였나.

나름 야심 차게 작성한 논문이었는데 오류나 착오가 있었던 걸까.

준후는 살짝 긴장했다.

“저는……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작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최선이었다고?”

“네.”

보성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쩐지 흠잡을 데가 없더구나.”

보성의 말에 준후는 맥이 탁 풀렸다.

아무래도 보성이 장난치기 위해 일부러 분위기를 잡았던 모양이었다.

“교수님, 놀랐습니다.”

“놀란 건 나야. 네 논문을 보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보성은 자신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었다.

준후에게 특별 수업을 한 지도 대략 4년이 지났다.

놀랍게도 준후는 본과 수업을 들으면서 보성의 수업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

비공식적으로 해부학 석사.

비공식적으로 법의학 석사 수준의 지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준후의 영특함을 생각하면 당장 현장에서 업무를 시작해도 될 정도였다.

교단에 오랫동안 몸담았지만 보성은 맹세코 준후 같은 아이를 목격한 적이 없었다.

천재.

준후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 밑에서 더 배워볼 생각은 없니?”

“죄송하지만 저는 외과의 말고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매정한 녀석.”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 시간까지 내면서 저를 가르쳐주셨는데…….”

“농담이니까 너무 마음 쓸 것 없어.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두거라.”

보성이 준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너는 수많은 사람의 러브콜을 받게 될 거야. 러브콜만큼이나 많은 시기와 질투도 받게 되겠지.”

“네. 교수님.”

“사람은 가려서 잘 사귀고 나쁜 놈들에게 이용당해선 안 돼. 학교 바깥은 정글이나 다름없으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준후는 고마움을 담아 대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준후는 이미 의사로서 세상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후는 현대보다 더 야생 같은 무림에서 몇십 년을 살아봤다.

치가 떨리는 배신도 당해봤고.

피눈물이 흐를 만큼 무력한 감정도 느껴봤고.

상사와 부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도 해봤다.

그리고 그 모든 노하우가 이미 뼛속에 새겨져 있었다.

따라서 병원 생활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준후는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너야 워낙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테니 큰 걱정은 안 든다만 노파심에 한 소리란다.”

“…….”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거라.”

“감사합니다. 교수님.”

“병원에 들어가면 보기 힘들 테니 마지막으로 안아보자꾸나.”

준후는 보성과의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이별이 됐든.

나쁜 이별이 됐든 이별의 끝은 항상 씁쓸했다.

“교수님의 조언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이제 네 꿈을 향해 전진하거라.”

보성과 헤어진 후 준후는 느긋하게 교정을 가로질렀다.

교정의 풍경을 하나하나 눈과 가슴에 담아두며.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운동장 쪽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준후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쪽으로 향했다.

“아아아악!”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하던 남학생 중 한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남학생들은 아파하는 학생을 둘러싼 채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무슨 일이에요?”

“저희도 모르겠어요. 친구가 갑자기 팔이 아프다고 해서.”

“파…… 팔이 너무 아파. 119에 신고 좀 해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을 보고 준후는 직감했다.

학생의 어깨에 탈구가 일어났다는 것을.

탈구란 쉽게 말해서 뼈가 제 위치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어요. 도와줄게요.”

“그쪽이 무슨 수로요?”

“의사니까요.”

준후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전이야 면허가 없어서 당당하게 처치를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의사가 아니라 의대생 아니에요?”

환자의 친구 중 한 명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준후를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의대생이었는데 의사가 됐죠. 잠깐 볼 일이 있어서 학교에 들렀어요.”

준후는 한쪽 무릎을 꿇고 환자와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질 거니까 진정해요.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환자를 달래며 준후는 견인법을 준비했다.

한 손으로는 환자의 탈구된 어깨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환자의 손목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금나수(擒拿手).

무림의 수법(手法) 중 하나로 환자의 팔을 단단하게 고정하기 좋았다.

환자는 농구를 하다가 좌측 어깨뼈가 빠졌다.

정황상 전방 외상성 탈구일 확률이 높았다.

이 경우 응급으로 도수 견인법이 필요했다.

그동안 익힌 해부학 지식을 바탕으로 준후는 환자의 상완골과 관절와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지금 상태에서 팔을 45도 각도로 쭉 잡아당기면 되겠어.

“저기요? 혹시 정형외과 의사예요? 이런 거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하던데.”

“맞아.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어.”

환자의 친구들이 준후의 처치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도 충분히 처치를 꺼릴 만한 이유가 있긴 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의사랍시고 도수 치료를 하겠다니까.

하지만 준후는 자신의 처치에 자신이 있었다.

도수 견인법에 필요한 해부학적 지식.

도수 견인법을 실시할 요령까지 이미 터득해 놓았으니까.

“도수 치료가 늦으면 근육에 경련이 와서 나중에 치료가 더 힘들어져요.”

“…….”

“친구분은 오히려 저를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준후는 환자의 팔을 단번에 잡아당겼다.

빠드드득.

섬뜩할 정도로 선명한 뼈 소리가 코트에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도수법.

이윽고 환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잉?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빠진 어깨 관절을 도수 견인법으로 원래 위치에 맞췄어요.”

“와, 신기하네. 이제 거의 안 아픈데요?”

“그래도 병원은 꼭 가 봐요. 습관성으로 재발할 확률이 높으니까.”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까는 의심해서 죄송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환자와 환자 친구들의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역시 해부학을 파고든 보람이 있단 말이지.

지금 가진 해부학 지식이라면 그 어떤 과를 가도 사랑받을 거야.

준후는 지난 4년간의 해부학 공부가 헛되지 않았음에 뿌듯함을 느꼈다.

학생들의 인사를 뒤로한 채 준후는 교정을 빠져나갔다.

비록 준후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준후의 발자국만큼은 교정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 *

준후가 집 근처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쯤이었다.

본래라면 20분은 더 일찍 올 수 있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다가 예전에 살던 동네를 들렀던 것이다.

준후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서서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어색한 느낌도 들었다.

역세권에 위치한 신축 아파트.

이 아파트가 준후 가족의 새 보금자리였기 때문이다.

낡은 연립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온 것은 올해 초의 일이었다.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짜리 집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그 이유는 바로 제트 코인이었다.

의료사고 건으로 인연을 맺게 된 증권회사 본부장 미호의 권유로 준후는 꾸준하게 제트코인에 투자했다.

그런데 그 제트코인이 올 초에 일을 냈다.

작년부터 징조가 심상치 않다가 올해 초에 로켓처럼 수직상승했던 것이다.

준후가 제트코인을 팔아서 얻은 수익은 자그마치 12억.

의사 생활을 몇십 년은 해야 간신히 만져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사놓는 건데…….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욕심이었다.

준후의 꿈은 부동산 재벌이 아니었다.

따라서 부모님과 함께 살아갈 번듯한 집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준후 왔니?”

“잘 왔다. 우리 아들.”

현관에 들어서자 부모님이 준후를 맞아주었다.

두 분 다 일을 많이 줄여서 요즘은 퇴근 시간이 빨랐다.

부모님이 고생을 덜하게 됐다는 사실 또한 준후의 요즘 행복이기도 했다.

“뭐 하고 계셨어요?”

준후가 거실로 들어서며 물었다.

“엄마는 저녁 준비하고 있었지. 아빠는 방금 막 들어왔고.”

“배고플 텐데 식사부터 하자꾸나.”

준후는 간단하게 씻고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했다.

아파트로 이사 온 후 부모님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다.

하긴 내 집이 주는 안정감이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것이긴 했다.

하지만 준후에게는 아쉬움도 존재했다.

이 좋은 집에서 부모님과 추억을 쌓을 일이 별로 없을 테니까.

의사가 되면.

더군다나 외과의가 되면 가정과는 담을 쌓고 지내야 했다.

그것이 외과의의 숙명이었다.

식사를 마친 준후는 방으로 돌아갔다.

책상 앞에 앉아 신원대학교 병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오늘은 신원대학교 병원 정기 인턴 채용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타다다닥.

필요한 정보를 입력하자 결과창이 떠올랐다.

[서준후님은 신원대학교 병원 정기 인턴 채용에 합격하셨습니다.]

결과를 확인한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합격해서 기뻤다기보다는.

이제야말로 기다리던 의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는 설렘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을 거쳤다면.

앞으로 펼쳐질 것은 진짜 의사로서의 삶이었다.

다음 주에 오리엔테이션 진행하고 그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이란 말이지?

준후는 달력을 확인하고 미소를 머금었다.

무림에서 익힌 무공과 내공과 피지컬.

고등학교 때부터 쌓아온 의학지식.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붓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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