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39화
제8장 응급의학과(1)
준후는 가부좌를 튼 채 운기조식을 펼치고 있었다.
무림에서의 삶을 각성한 후부터.
운기조식은 준후의 든든한 파트너였다.
육체 피로 및 스트레스 해소.
내공이라는 남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힘을 축적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몇 년간 운기조식을 하면서 준후는 꽤 많은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능력을 온전히 펼친다면 다른 사람에게 초능력자 소리를 들을 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사회의 파장이 일어날 것이 뻔했기에.
적당히 힘 조절을 하고 있었다.
준후는 운기조식을 끝내고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 아까 먹은 홍삼 포장이 놓여 있었다.
요즘은 영양제에 홍삼까지 같이 챙겨 먹는 중이었다.
홍삼은 고등학교 때 먹었던 총명탕과 비슷하게 내공을 증진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홍삼 포장을 버리고 준후는 해부학 파일을 빠르게 훑었다.
파일은 강호의 수업을 요약해놓은 것으로 준후의 보물 중 하나였다.
“준후야, 식사하렴.”
“네. 어머니.”
준후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갔다.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임에도 어쩐지 애잔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순간이 소중하기도 했다.
부모님과 오순도순 즐기는 식사는 곧 연례행사로 변할 것이다.
인턴과 레지던트에게는 병원이 집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훌륭한 외과의가 되겠다는 꿈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소중하다고 오로지 부모님을 위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다 자란 새는 둥지를 떠나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였다.
대신 준후는 부모님의 모습을 가슴 깊숙한 곳에 담아두었다.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도록.
“아쉽게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겠구나. 환자들 건강도 중요하지만 네 건강도 잘 챙기고.”
“전화 자주하고 음식도 잘 챙겨 먹고.”
식사를 하는 동안.
부모님은 준후와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또 걱정하기도 했다.
“두 분도요. 제가 없다고 영양제 거르시면 안 되고요. 1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 받으시고. 불편한 곳 있으면 저한테 바로바로 말씀하세요.”
“녀석, 떠나는 날에도 잔소리니?”
“준후를 누가 말리겠어요.”
준후의 잔소리에 부모님이 한 마디 씩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연락은 최대한 자주할게요.”
부모님과 포옹을 나누고 준후는 현관을 벗어났다.
아파트 단지를 떠나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한 여성이 다가왔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
이제는 같은 병원 인턴이 된 아영이었다.
준후는 같이 출근하자는 아영의 연락을 어제저녁에 받았었다.
“여전해서 보기 좋네.”
“응? 뭐가?”
“한결같은 네 빵 사랑.”
준후는 피식 웃으며 아영의 손에 들린 빵을 가리켰다.
아영은 아침 대신 호빵을 먹으며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사랑은 원래 한결 같은 거야.”
“베이커리를 좋아하지 않아? 오늘은 웬일로 호빵?”
“오늘은 갑자기 호빵이 먹고 싶어서. 혹시 준후 너는 무슨 호빵 좋아해?”
“굳이 따지자면 팥 들어간 거?”
준후의 대답에 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팥 호빵이 뭐가 맛있냐는 표정이었다.
“야채 호빵하고 피자 호빵은 사파야. 정도를 벗어난 호빵이란 말이지.”
“지금 나 저격하는 거?”
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영이 먹고 있는 호빵은 야채 호빵이었다.
“저격씩이나. 내 취향을 말한 것뿐인데.”
“준후 너야말로 뭘 모르는구나. 팥 호빵을 먹을 거면 상위 호환인 찐빵을 먹어야지.”
“그럼 야채 호빵을 먹을 거면 만두를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뭐야? 빵으로 나랑 붙어보겠다고?”
준후는 모처럼 아영과 툭탁거리며 역으로 이동했다.
날이 날이었던 만큼 호빵 논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화제는 화려하게 막을 올린 인턴 생활로 옮겨졌다.
첫 출근의 설렘, 기대, 걱정, 불안.
선배들을 통해 들었던 다양한 에피소드.
환자를 상대하는 고충 등등.
준후는 말을 하기보다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준후의 심정은 아영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무림맹 소속으로 병원만큼이나 절박하고 치열한 사건을 경험하고 극복해 왔으니까.
40여 분을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신원대학교 병원이었다.
명실상부 빅 3병원.
공립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찾는 병원.
리모델링한 병원 건물은 외관부터 화려하고 세련됐다.
각기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정문을 향해 개미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문제없어. 너랑 내 실력이면.”
준후는 아영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CSR(중앙공급실)로 이동했다.
의사 가운과 콜폰 등을 지급 받고 아영과 헤어졌다.
인턴은 각종 과를 돌며 전공을 탐색하는데 준후의 첫 번째 진료과는 응급의학과였다.
* * *
지이이잉.
다가서자 응급실 출입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응급실의 분위기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진료 대기 중인 환자는 많지 않아 보였으며 스태프들은 급박하기 보다는 나른해 보였다.
밤샘 근무에 지쳤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응급의학과의 특성상 언제 어떤 변수가 생겨 분위기가 돌변할지는 알 수 없었다.
응급의학과는 휴화산 같은 곳이었다.
언제 용암이 터질지 모르는.
‘드디어 의사 데뷔구나.’
준후는 응급실을 훑어보며 감회에 젖었다.
의사 면허를 취득하고.
의사 가운을 걸치고.
마침내 의사로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리라.
환자를 정성껏 치료한다.
지금까지 갈고닦은 의료지식과 무림에서 쌓은 경험과 능력들을 십분 발휘한다 등등.
준후는 이성과 감성을 예리하게 가다듬었다.
외과의를 꿈꾸었던 초심도 되새김질했다.
비록 무림에서는 고통스럽게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었지만 현대에서는 그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살려내겠다고.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응급의학과에서 근무하게 된 인턴입니다.”
준후는 가장 가까운 스테이션 (의사와 간호사들이 업무를 보는 데스크)으로 이동해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와, 쌤 엄청 미남이네요?”
한 간호사는 직설적으로 준후의 외모를 칭찬했다.
서민정 간호사였다.
“하하하. 그런 이야기 자주 듣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청년이 준후에게 다가왔다.
안경을 낀 호리호리한 청년.
청년의 가운에는 응급의학과 윤성민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야, 술고래가 우리 과 첫 턴(첫 번째 달에 근무하는 인턴)이었어?”
“안녕하세요. 선배.”
성민은 의대 한 학년 선배로 오리엔테이션 당시, 준후와 술을 대작하다가 쓰러진 선배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출근이 조금 늦지 않아? 같이 일할 친구는 벌써 도착했는데.”
성민이 한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의대 동기인 명훈은 벌써 도착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친구 좀 본받아라. 응? 일찍 와서 공부도 하고 얼마나 보기 좋니?”
성민의 말을 듣고 준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속이 너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빨리 출근해서 잡일을 거들어라.
너희가 빨리 출근해야 이전 근무자가 빨리 퇴근한다 등등.
성민은 일종의 열정 페이를 준후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준후는 일단 건성으로 대답했다.
인턴 근무 첫날이었다.
근무 환경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부조리를 깨부수는 건 그다음에 할 일이었다.
준후는 명훈과 인사를 나눈 후 명훈 옆자리에 앉았다.
“두 번은 말 안 하니까 귓구멍 열고 잘 들어. 응급의학과 근무는 말이다.”
성민의 업무 설명이 이어졌다.
인턴의 근무 시간은 24시간 근무, 24시간 휴식.
환자 진료 및 환자 분류.
당직 일지 및 인수인계지 작성.
응급실 입원환자의 처치 등등이 있다고 말했다.
“응급의학과에서 제일 중요한 업무가 뭔지 알아? 준후가 말해 봐.”
성민이 준후를 콕 찍어서 물었다.
근무 시간보다 고작 10분 일찍 온 것이 괘씸하다는 말투였다.
“교통정리입니다.”
“교통정리가 뭔데?”
“진료를 보고 환자의 질병에 맞춰서 당직 중인 과에 연락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봐.”
“환자가 가슴이 아프다고 해서 무조건 흉부외과에 콜을 하면 안 됩니다. 역류성 식도염이나 위염으로도 흉통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
“한 마디로 감별 진단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준후의 대답은 똑 부러졌다.
트집 잡을 것이 없었으므로 성민은 머쓱하게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하, 요 녀석 만만치 않네?
“그래. 준후 네 말이 맞아. 당직 콜을 제대로 못 하면 욕을 처먹는 게 응급의학과지.”
“…….”
“무 지성으로 콜하지 말고 계속 생각해. 전화기를 들기 전에 생각하고. 전화기를 들고 나서 생각하고. 번호를 누르면서 생각하란 말이지. 알았어?”
“네. 선배.”
“네. 선배.”
업무 소개가 끝난 후 성민은 준후와 명훈을 데리고 응급실을 한 바퀴 돌았다.
응급실 스태프에게 두 사람을 정식으로 소개해 준 것이다.
소개가 끝난 후 준후는 가볍게 자신의 볼을 두드렸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빳빳한 가운도 매만졌다.
이제 좀 의사가 됐다는 실감이 났다.
“서준후, 옆에서 봐줄 테니까 마수걸이 한번 해봐. 환자 번호 981024, 김순희 환자다.”
“네.”
본격적인 진료에 앞서 준후는 환자의 차트부터 확인했다.
환자는 입원 및 외래 진료 내역.
응급실 방문 내역이 없었다.
환자에게 지병이 있는지, 가족력은 어떤지 등등은 문진을 통해 알아내야 할 듯싶었다.
준후는 비응급 환자가 모여 있는 제3구역으로 이동했다.
한 베드(bed, 침상)에 60대 여성이 걸터앉아 있었고 딸로 보이는 여성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첫 진료에 첫 환자구나.
깔끔하게 해결해 주겠어.
“안녕하세요. 김순희 환자님 맞으시죠?”
“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몸이 피곤하고요. 으슬으슬 춥고 구역질도 나요.”
“언제부터 아프셨죠?”
“한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아요.”
준후는 문진을 통해 환자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해나갔다.
적당히 걸러 들을 필요도 있지만 환자의 입에서 나오는 정보가 결정적인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저기요. 근데 선생님.”
곁에 있던 보호자가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말고 뒤에 계신 선생님이 봐주시면 안 될까요?”
보호자가의 시선이 잠시 성민에게 머물렀다.
“선생님은 인턴이시잖아요. 기왕이면 레지던트 선생님한테 진료받고 싶은데.”
보호자는 병원 사정을 좀 아는 듯했다.
3월에는 응급실에 가지 말라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새내기 인턴들이 응급실 진료를 보다가 종종 실수하는 경우가 있었던 탓이었다.
보호자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고.
하지만 준후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서 한발 물러나면 계속 물러나야 할지도 몰랐다.
“보호자분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인턴이라 못 미더우시겠죠.”
“…….”
“하지만 인턴을 겪지 않고 레지던트로 넘어가는 의사는 없습니다.”
“…….”
“보호자분 말씀대로라면 대한민국 의사들은 전부 인턴에 머물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는데…… 그래도 불안해서.”
“뒤에 레지던트 선생님이 지켜보고 계시잖아요.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지적해 주실 겁니다.”
준후는 특유의 화법으로 보호자를 타일렀다.
그동안 크게 두드러질 일이 없었지만 준후는 화술에도 능통했다.
무림 정파에서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가 무엇인가.
바로 명분 아닌가.
명분이란 논리와 근거와 주장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말을 잘해야 했다.
정파 출신인 준후는 당연히 말을 잘했다.
“이제 불안한 마음이 조금 해소되셨을까요?”
“아, 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네요.”
보호자는 금방 고개를 숙이며 미안함을 표현했다.
준후의 화술에 설득당한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일인데…….
준후가 일차적으로 봤을 때.
환자는 단순 감기 환자로 보였다.
37.4도의 미열과 몸살 기운.
오한과 구역 같은 증상은 대표적인 감기 증상이었다.
감기, 단순 복통, 상처 부위 소독 등으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환자가 감기라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준후는 쉽게 진단을 내리지 않았다.
[최악 중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라.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생명을 다루는 일에 대충은 없다.]
언젠가 읽은 의료 에세이의 한 문장이 떠오른 것이다.
증상은 감기와 비슷하지만 감기보다 위험한 질병은 뭐가 있을까.
“서준후, 이 환자가 그렇게 오래 끌 환자야? 작작해라?”
준후를 지켜보고 있던 성민이 귓속말로 핀잔을 주었다.
감기 환자니까 대충 약을 처방해서 보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환자의 증상을 꼼꼼하게 한 번 더 체크하고 환자의 얼굴과 피부, 몸을 살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준후는 환자가 단순 감기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