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40화
제8장 응급의학과(2)
속 터져 죽겠네. 진짜.
성민은 진료 중인 준후의 뒤통수를 쥐어박고 싶은 것을 참았다.
환자와 보호자 앞이라서 참았다.
환자는 누가 봐도 감기였다.
과거 병력이 없었으며 증상이 경미했고 증상의 형태는 전형적인 감기였다.
쉽게 분류하자면 대학병원 응급실을 동네 의원처럼 방문하는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준후를 보자.
단순 감기 환자를 무려 5분 넘게 진료하고 있지 않은가.
감기 환자를 이렇게 오래 보면 중증 환자는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지…….
역시 인생은 실전이야.
전교 수석 입학에 올 A+를 받고 졸업해도 실무에선 이런 식이라니까?
성민은 준후가 전형적인 선비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책상이나 서류 앞에서만 강하고 실무에서는 무능한 사람 말이다.
그래서 성민은 준후를 막 굴려 먹기 좋은 인물이라 판단했다.
자신의 잡일을 준후에게 떠넘겨도 좋겠다 싶었다.
“환자분 최근, 산에 다녀오신 적 있나요?”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왠지 그러셨을 것 같더라고요.”
“일주일 전에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어요.”
준후와 환자의 대화가 가관이었다.
얼씨구!
이젠 환자랑 일상 따먹기나 하시겠다?
아주 대단하고 친절한 인턴 납셨네.
“일단 간단하게 혈액 검사와 엑스레이 촬영하고 다시 뵙겠습니다.”
“꼭 검사가 필요한가요? 제 생각에는 그냥 감기 같은데…….”
성민이 하고 싶은 말을 환자가 대신했다.
그런데도 준후는 꿋꿋하게 검사 오더를 내리고 환자와 보호자를 대기실로 보냈다.
“와, 이제 말 좀 하겠네. 서준후, 너 미쳤어? 감기 환자로 5분을 까먹어? 거기에 검사까지?”
“…….”
“혹시 시간 때우려고 이러냐?”
“저 환자분 감기 아니에요.”
준후의 대꾸에 성민이 혀를 찼다.
첫 진료라 부담이 돼서 꼼꼼하게 진료를 봤다고 하면 그나마 참아주겠는데…….
뭐? 감기가 아니라고?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럼 환자가 폐렴이라도 돼?”
“폐렴은 아니고 쯔쯔가무시입니다.”
준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쯔쯔가무시.
진드기 유충에 물려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
잠복기가 끝나면 환자는 발열, 두통, 오심 등의 증상을 호소하게 된다.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으며 증상이 빠르게 호전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2주 이상 증상이 이어진다.
심할 경우 뇌수막염이나 전신 감염증으로 환자는 사망할 수도 있었다.
“야, 2월에 쯔쯔가무시 환자가 있다고?”
성민이 코웃음 치며 물었다.
“가을만큼은 아니지만 겨울에도 쯔쯔가무시 환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환자 손목에서 검은 딱지도 확인했고요.”
“딱지를 봤다고? 확실해? 잘못 본 건 아니고?”
“네.”
준후의 말에 성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성민은 보지 못했지만 환자의 손목에 딱지가 있었다면 환자는 쯔쯔가무시일 확률이 높았다.
쯔쯔가무시 환자의 경우.
진드기에 물린 자리가 아물면서 괴사성 딱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환자분 최근에 산에 다녀오신 적 있나요?
성민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까 전 준후가 했던 질문의 의미를.
준후는 단순히 환자와 일상 잡담을 나눈 게 아니라 쯔쯔가무시를 예상하고 문진한 것이었다.
인턴 근무 첫날.
게다가 응급의학과 근무 첫날이라면 긴장하기도 바쁠 텐데.
이런 눈썰미를 발휘한다고?
잠시 후 성민은 준후와 함께 환자의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흉부 엑스레이 소견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에서 특이점이 발견되었다. 백혈구와 혈소판 감소증이 나타난 것이다.
놀랍게도 환자는 쯔쯔가무시가 맞았다.
“항생제는 테트라사이클린으로 쓰겠습니다.”
“어? 어.”
준후의 야무진 대답에 성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국 준후의 진단이 맞고 자신의 진단이 틀렸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하…… X발.
이거 자존심 상하네?
* * *
환자와 다시 마주한 준후는 환자에게 쯔쯔가무시를 설명하고 원내 처방전을 건넸다.
“선생님, 그러니까 제가 그냥 감기가 아니라는 거죠?”
“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항생제만 꾸준히 드시면 이틀 안에 좋아지실 거니까.”
“고맙습니다. 1시간 넘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네.”
“선생님, 이거라도 한 잔 드세요.”
보호자가 준후에게 불쑥 내민 것은 에너지 드링크였다.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준후는 음료를 받았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선생님을 너무 무시해서…….”
“그럴 수도 있죠. 저라도 보호자님 같았을 텐데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환자와 보호자가 떠나는 모습을 준후는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준후가 환자의 쯔쯔가무시를 포착했던 결정적인 이유.
그것은 무림에서 갈고 닦은 관찰력 덕분이었다.
진검 승부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적을 아는 것이었다.
적이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
눈동자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보폭과 발목의 방향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적을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준후는 마치 악인들과 비무를 하듯 환자를 관찰했는데.
환자의 손목에서 검은 딱지를 발견했다.
환자의 헐렁헐렁한 옷소매 틈으로 검은 딱지가 보였던 것이다.
딱지를 보는 순간.
준후는 환자가 쯔쯔가무시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등산에 대한 것을 물어보고 검사 오더까지 내렸다.
그 결과 첫 진료를 무탈하게 소화할 수 있었고.
[응급의학과에서 진료 및 진단 솜씨를 키운다.]
준후는 그렇게 목표를 잡았다.
응급의학과 만큼 광범위한 증상의 환자를 광범위하게 다루는 과목은 없었다.
보통 전공이 생기면 전공과목만 파고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후는 환자를 전 방위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야 전공이 있더라도 타과 컨설턴트(협진)를 착오 없이 요청할 수 있고.
입·퇴원 환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후유증을 관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첫 턴이 응급의학과라는 점은 행운이었다.
의사의 기본인 진료와 진단을 배울 수 있으니까.
목표를 굳힌 준후는 손에 들고 있던 에너지 트링크부터 시원하게 마셨다.
보호자에게 받은 것이라 더 맛있었다.
* * *
첫 진료를 시작으로 준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침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에게 심전도 검사를 하거나 드레싱(소독) 등의 처치를 했고.
대기 중인 환자들을 진료도 했다.
근무를 시작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지만 준후는 응급실이 지옥 같다고 생각했다.
환자는 아팠고 긴 대기시간으로 한 번 더 고통받았다.
그래서 그 짜증은 고스란히 스태프가 받아넘겨야 했다.
스태프들은 스태프대로 괴로웠다.
쉴 틈 없이 환자를 분류하고 처리하고 진료하며 환자의 불평·불만까지 감당해야 했으니까.
이따금 T.A(교통사고) 환자나 응급 환자가 오면 응급실은 발칵 뒤집혔다.
환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에 팽팽한 긴장감이 응급실을 사로잡았다.
응급실은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준후는 그 와중에도 본분을 잊지 않았다.
응급의학과 근무를 하면서 이뤄야 하는 성취(진료 및 진단 실력 성장)를 생각했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 애썼으며.
항상 환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무림에서 소중한 사람을 허망하게 잃었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너, 일 야무지게 잘한다?”
막 환자 진료를 마친 준후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가운을 걸친 여성이 서 있었다.
서소진.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3년 차.
소진이 신원대 출신이 아니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준후는 소진을 잘 알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할 것까지야.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일은 힘들지 않고?”
“할 만합니다.”
손톱만큼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참은 준후였다.
운기조식을 하지 않더라도 준후의 체력 회복력은 이미 괴물과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운용 중인 심법에도 피로회복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운기조식을 하면 피로회복 속도가 더 빨라질 뿐이었다.
“그래 보이긴 하더라. 근무하는 내내 힘든 기색 한 번 안 비추고.”
“저를 관찰하고 계셨나요?”
“맞아. 좀 걱정이 돼서.”
“근무 첫날이라 선생님 입장에서는 제가 조마조마해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지.”
소진이 주변을 훑더니 말을 이었다.
소진은 준후에게 성민을 경계하라고 알려주었다.
성민이 똥 군기를 잡고 후배들을 막 부려 먹는 성격이라고 전했던 것이다.
이는 준후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점이었다.
준후는 성민에게서 종종 무림맹 청룡 부단주 소청운을 겹쳐 보았다.
성민이 딱 소청운 같은 부류였다.
아랫사람 기를 팍 죽여 놓고서 자기 수족처럼 부려먹는 간사한 타입 말이다.
물론 소청운은 나중에 준후에게 호되게 당했다.
“내가 타 대학 출신이기도 하고, 치프가 성민이를 좋게 봐서 터치를 못 하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처신 잘해.”
“…….”
“성민이는 학교 후배라고 감싸주고 그러는 스타일 아니니까.”
“조언은 감사한데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자신 있니?”
“네. 저 정도면 제가 잡아먹을 수 있어요.”
준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소진에게는 그래도 되겠다 싶었다.
같은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속내를 밝히는 편이 좋기도 했고.
“쯔쯔가무시를 감기로 넘기려고 하더라고요. 업무 실력이 그 정도면 저한테 먹히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직장에서의 권력은 업무 성과에서 비롯되는 법.
일 못 하는 선배.
일 잘하는 후배.
둘이 충돌할 경우 윗사람은 후자의 손을 들어줄 확률이 높았다.
업무가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준후는 성민을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후 너, 좀 무서울 지경인데?”
“성격 더러운 사람한테는 그런 편이죠. 어쨌거나 조언은 잊지 않을게요.”
“그래. 너야 워낙 야무져 보여서 내 걱정이 기우겠지만. 동기하고 저녁 먹고 와. 환자는 내가 봐줄게.”
“감사합니다.”
준후는 멀리 떨어진 동기 명훈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명훈은 한 환자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환자가 명훈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는데도 명훈은 한마디 대꾸도 못 했다.
‘이런.’
침상에 다가간 순간 전모가 파악되었다.
명훈은 ABGA(동맥혈 채혈) 중이었는데 몇 번 채혈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이에 화가 난 환자가 명훈을 쥐 잡듯이 잡고 있었고.
“명훈아. 내가 할게.”
“주…… 준후야.”
준후는 명훈 대신 새 주사기를 꺼내 손에 쥐었다.
“내가 혈관을 많이 깨 먹어서 바늘 넣을 곳이 한 군데밖에 없어.”
명훈이 환자 눈치를 보며 준후에게 속삭였다.
“차라리 성민 선배 불러오는 게 낫지 않을까? 너까지 실패하면 환자가 길길이 날뛸 텐데…….”
“한 번에 성공하면 돼. 그리고 성민 선배 불러오는 건 최악의 판단이야.”
준후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성민을 호출해서 성민이 ABGA를 성공한다고 치자.
그럼 성민이 얼마나 거들먹거리겠는가.
또 성민을 호출해서 성민이 ABGA에 실패했다고 치자.
그러면 성민은 ‘너희들이 좋은 혈관을 망쳐서 이렇게 됐잖아’라며 두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어느 쪽도 배드 엔딩이었다.
즉 준후가 ABGA에 성공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피엔딩이었다.
“이 봐요. 그쪽은 주사 잘 놔요?”
환자가 준후를 올려다보며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환자를 탓할 건 아니었다.
실험실의 쥐처럼 주삿바늘에 몇 번이고 찔렸는데.
환자가 친절하기를 바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네. 안 아프게 한 번에 끝내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실패하면요?”
“제가 환자분께 이 자리에서 100만 원을 입금해드리겠습니다.”
“진짜죠? 약속 꼭 지켜요. 안 그러면 나 다 뒤집어 버릴 테니까.”
40대 남자 환자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본격적인 ABGA 채혈에 앞서.
준후는 환자의 팔 상완부와 하완부를 점혈했다.
파바바밧!
팔의 통증 신경을 마비시키는 강호 점혈법이었다.
해부학 교수 강호에게 배운 지식을 이용해서 준후가 개발한 점혈법이었기에 이름을 강호 점혈법으로 붙였다.
강호 점혈법을 받았으니 환자의 주사 통증은 이제 싹 가시리라.
점혈을 마친 준후는 환자의 하나 남은, 온전한 혈관을 소독하고 주사기를 찔렀다.
푹!
손속에 망설임은 없었다.
준후의 손은 이미 사람의 목과 허리와 팔다리를 베어봤다.
주삿바늘을 찌르는 일 따위에는 긴장을 하고 싶어도 긴장을 할 수가 없었다.
스으으윽.
주사기 몸통을 당기자 붉은 혈액이 딸려 나왔다.
바늘이 정확히 동맥혈을 찌른 것이다.
이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채혈을 단숨에 끝낸 준후는 주사기의 뚜껑을 닫았다.
“팔은 좀 어떠세요?”
“아프지도 않고…… 좋네요.”
“괜한 고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오늘 막 근무를 시작한 인턴들이라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디 환자분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그래요. 나도 딱히 악감정이 있었던 아니니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환자를 지켜보며 준후는 속으로 웃었다.
환자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내 백만 원 날아갔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