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41화
제8장 응급의학과(3)
‘인간도 아니란 말이지. 준후는.’
구내식당으로 향하던 도중.
명훈은 곁에서 걷는 준후를 힐끔 훔쳐보았다.
오늘은 인턴 근무 첫 날이었다.
배워야 할 것이 많았으며.
환자를 관리하고 상대하는 일은 벅찼고.
장시간 근무로 피곤에 찌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병원을 탈주하고 싶은 충동을 한 시간에 한 번씩 느꼈을까.
그런 명훈과 달리 준후는 맹활약을 펼쳤다.
선배들에게 단 한 번도 혼나지 않았다.
인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술기 중 하나인 ABGA 채혈을 뚝딱 해내는가 하면.
환자 관리, 환자 응대, 환자 진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준후가 워낙 척척박사였기 때문일까.
명훈은 준후가 도무지 인턴 같지가 않았다.
인턴의 탈을 쓴 레지던트 같았다.
“준후야.”
“응? 왜?”
“그렇게 뛰어다니고도 피곤하지 않아? 넌 아까 CPR도 했잖아.”
“난 심장이 두 개라 지치지를 않아.”
웃으며 대답하는 준후.
딴에는 농담을 한 것 같은데 준후의 실력이 워낙 비범해서 그마저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명훈이었다.
“힘 빼고 가만히 있어 봐.”
구내식당에서 줄을 섰을 때.
준후가 명훈의 몸을 마사지해 주기 시작했다.
마사지는 목과 어깨, 허리로 내려갔는데 마사지를 받을 때마다 명훈은 아아 하고 신음을 흘렸다.
“야, 사람들 듣잖아. 볼륨 조절 좀 해.”
“그렇지만 진짜 너무 기분 좋단 말이지. 아…… 아…….”
명훈은 신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도 멈출 수 없었다.
준후에게 마사지를 받아봤는가?
안 받아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했다.
이 기분은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미안한데 이따 밤에도 해줄 수 있지?”
“야릇한 신음 소리만 안 내면.”
준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식판에 음식을 그득하게 담고서 두 사람은 함께 식사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밥은 병원 밥이라고 하지만 이는 정확하게 반만 맞는 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밥은 입원 환자가 병실에서 먹는 밥이었다.
직원 식당의 음식은 꽤 맛있었다.
‘많이 힘들었나 보네.’
준후는 저녁을 와구와구 먹는 명훈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준후에게 응급의학과 근무란 누워서 떡 먹기였다.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무림에서는 이보다 열 배는 더 강도 높은 훈련과 실전을 경험한 준후 아니던가.
무림맹 근무 시절에는 매 임무마다 목숨이 위태로웠다.
산세가 험악하기로 악명 높은 화산을 이틀 만에 오르내렸으며.
사파인들과 밤낮으로 검을 주고받았으며.
추격을 하기도 하고 추격을 받기도 했다.
무림에서 워낙 고생을 했던 탓에 준후는 현대의 고생은 고생 같지가 않았다.
준후에게 응급의학과 근무란 선녀일 따름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감이 오네. 이 페이스만 유지해도 되겠어.’
준후는 가만히 지난 근무 시간을 되짚었다.
응급의학과에서 준후가 이루고 싶은 목표.
그것은 환자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었다.
진단이란 치료의 첫 단추를 꿰는 일로 진단을 잘못하면 치료가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무림에서 갈고 닦은 관찰력으로 준후는 지금까지 순조롭게 환자를 진단하고 있었다.
환자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고.
꼼꼼하게 질문을 던졌으며.
혈액 검사와 흉부 엑스레이, 심전도.
이 세 가지의 기본 루틴 검사도 비교적 빼먹지 않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응급 환자를 비응급 환자로 분류하는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여기서 경험치가 더 쌓인다면.
외과의가 되어서도 진단 미스를 하는 일은 없을 듯했다.
응급의학과 근무 시간은 고작 한 달.
그 안에 자신 만의 진단법.
오차율 제로에 수렴하는 진단법을 발견한다.
준후는 목표를 뼛속에 새겨두었다.
“소진 선배, 어떻게 생각해?”
명훈이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응. 갑자기 궁금해서.”
“으음…… 좋은 선배 같아. 우리를 챙겨주려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
준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뭐야? 너한테도 잘해줬어? 괜히 김빠지네.”
명훈은 실망한 눈치였다.
소진의 배려를 이성적인 호감으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소진 선배가 좋으면 적극적으로 어필해 보든가.”
“절세미남 서준후가 옆에 있는데 나 같은 게 눈에 들어오겠어?”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야.”
“칫. 맞는 말인데 네가 하니까 왠지 재수 없어.”
명훈의 농담 섞인 대답에 준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명훈이 소진에게 호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준후는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영양제를 삼켰다.
비타민 B.
비타민 C.
타우린 조합으로 피로회복과 자양강장에 도움이 되는 조합이었다.
영양제 섭취 후 화장실에 들러 운기조식을 10분 정도 펼치고 응급실로 복귀하는 준후.
준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출근할 때와 다름이 없었다.
* * *
“당직일지 다 썼어?”
성민이 준후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금 작성 중인데 거의 다 끝나갑니다.”
타다다닥.
준후는 스테이션에 앉아서 당직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당직일지란 현 근무자가 다음번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할 때 건네는 자료였다.
일지에는 이런 것들이 적혀 있었다.
응급실 입원 중인 환자들의 입원 경로, 진단명, 차후 처치에 대한 내용 등등.
이는 본래 인턴이 아닌 레지던트의 업무였지만 성민이 일을 떠넘기는 바람에 준후가 작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준후는 이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았다.
당직일지를 작성하며 입원 환자들의 상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준후가 보기에 현재 입원 중인 환자 중에 큰 문제가 터질 환자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좀 조용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디 솜씨 좀 볼까?”
성민이 모니터로 얼굴을 내밀었다.
준후가 적은 내용을 살피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와, 깔끔하면서도 디테일하네. 너 문서 작업도 잘하냐?”
“잘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본과 시절 해부학 교수 강호의 논문 작업을 간간이 도왔던 준후였다.
덕택에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도 도가 텄다.
“나랑 근무할 때 당직일지는 준후, 네가 적는 걸로 하자. 오케이?”
“네. 제가 적을 게요.”
성민의 얍삽한 태도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당직 일지를 작성하는 일 자체는 도움이 됐기에.
준후는 흔쾌히 수락했다.
잠시 후 저녁 근무를 책임질 5명의 레지던트가 도착했다.
준후와 명훈은 5명에게 자기소개를 했고 금방 인수인계가 시작되었다.
인수인계자는 당연하게도 짬이 가장 낮은 성민이었다.
성민은 말을 조리 있게 잘했다.
인수인계를 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만 쏙쏙 골라서 말했다.
중간에 재치를 섞어 농담도 건넸다.
성민의 화법으로 인수인계 자리는 내내 유쾌하고 화기애애했다.
성민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바로 저 혀였던 것이다.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고 분위기를 돋우는 저 혀.
저러니까 치프가 성민에게 홀딱 반하고 소진은 성민을 쉽게 건드리지 못했겠지.
“그건 그렇고 오늘 당직일지 끝내준다? 이렇게 정리 잘 된 건 처음 봤는데?”
“그런가요? 그게 사실은…….”
성민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순간 준후는 감지했다.
성민이 자신의 공을 가로채려고 한다는 사실을.
일을 시키는 건 참을 수 있는데 그 공로를 훔쳐가는 건 참을 수 없지.
“제가 작성했습니다.”
성민이 말을 마치기 전에 준후가 껴들었다. 그러자 성민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준후, 네가 적었다고?”
“네. 성민 선배가 평소 적던 당직일지와는 조금 다르지 않나요?”
“맞아. 달라서 물어본 거였어.”
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성민이 일지는 대충 적고 말로 때우는 스타일인데…… 오늘은 어쩐지 꼼꼼하게 썼다 싶었지.”
“…….”
“준후, 너는 A턴 소질이 있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라.”
“감사합니다.”
준후는 도둑맞을 뻔한 칭찬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A턴이란 인턴에게 등급을 매겨서 부르는 호칭이었다.
A턴, B턴, C턴 D턴.
학점이 그러하듯 D에서 A로 갈수록 일을 잘하는 인턴이었다.
인수인계는 10분 만에 끝났다.
오전 근무를 섰던 레지던트는 퇴근 준비를 했지만 준후와 명훈은 그러지 못했다.
인턴의 응급실 근무 시간은 24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야, 서준후. 잠깐 나 좀 보자.”
인수인계가 끝나기 무섭게 성민이 준후를 호출했다.
이유야 안 봐도 뻔했다.
휴게실에서 마주한 성민의 표정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오늘 당직일지 누가 적게 되어 있었냐?”
“선배님입니다.”
“그럼 네가 그냥 잠자코 있었으면 되는 거잖아. 나는 치프한테 칭찬받아서 좋고 너는 나한테 칭찬받아서 좋은 거 아니야?”
성민은 개 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당직일지를 적은 건 나인데 왜 네가 치프한테 칭찬을 받아?
준후는 따져 물으려다가 말았다.
아직은 성민과 대놓고 충돌할 시기가 아니었다.
“치프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대답했습니다만……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말 한번 잘했다. 일은 그렇게 잘하면서 눈치는 왜 그렇게 없는 건데?”
“…….”
“앞으로 눈치 좀 챙기자. 응?”
“네. 선배.”
성난 얼굴로 돌아서는 성민을 지켜보며 준후는 씨익 웃었다.
준후는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교묘한 계략을 펼친 것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적은 당직일지를 성민이 생색내지 못하도록.
그 뿐만이 아니었다.
준후는 앞으로도 눈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할 포석도 깔아두었다.
오늘처럼 성민을 엿 먹인다.
그리고 성민이 잔뜩 열 받으면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하고 둘러댄다.
이 패턴은 성민처럼 말만 번지르르한 인간을 공략하기에 딱 좋았다.
무림맹 하급 무사일 때 준후가 종종 써먹던 수법이기도 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단 말이지.
응급실로 돌아온 준후는 다시 근무에 열중했다.
밤 8시가 넘어가면서 응급실은 다시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외래 진료가 불가능하니 환자들이 전부 응급실로 쏠린 것이다.
대기 환자가 산더미 같았으므로.
준후는 환자들을 진료할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었다.
진료를 하는 동안.
준후는 자신만의 진단법을 더욱 개발시켜나갔다.
여기서 자신만의 진단법이란 무림에서 터득한 관찰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
환자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
내공을 이용한 진맥과 내공을 이용한 검사로 환자의 응급질환을 미리 파악하는 것이었다.
환자를 한 명 한 명 진료할 때마다.
준후는 경험치가 쌓이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영양제를 챙겨 먹은 덕분일까.
체력이 쌩쌩하고 집중력도 날카로워 환자 한 명도 허투루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밤 11시.
그 많던 환자들은 떠나가고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도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준후는 알콜 환자에게 수액을 놓고 있는 중이었다.
알콜 환자는 쉽게 말해서 술에 취한 환자였다.
알콜 환자는 응급실 환자의 2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그 수가 많았는데.
취한 채 난동을 부려 스태프들이 싫어하고 꺼렸다.
하지만 준후에게 알콜 환자는 껌에 불과했다.
목 뒤쪽에 있는 풍부혈을 자극하면 환자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리니까.
당연하게도 의식을 잃은 환자는 꼬라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저기요.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대기 중인 환자분들 안 보이세요? 차례를 기다리세요.”
“X발. 우리 형님이 아파 뒈지는 꼴 보고 싶어? 너희가 책임질 수 있어?”
“접수도 안 하셨잖아요.”
“사람 치료하는 곳이 병원 아니야? 뭘 그렇게 절차를 따져?”
소란스러운 대화가 들리는 쪽으로 준후가 고개를 돌렸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 5명이 막무가내로 응급실에 침입 중이었다.
간호사 두 명이 사내들을 만류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준후는 불길한 예감을 감지하고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무림에서 단련한 후각에 비릿한 냄새가 포착되었다.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냄새.
그것은 피 냄새였다.
그리고 피 냄새의 근원지는 5명의 사내 중 가운데에 있는 남자.
목에 문신을 한 남자에게서 풍겼다.
오늘 밤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글렸구나.
준후는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