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44화
제8장 응급의학과(6)
시간은 저녁을 지나 다음날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쯤 되자 응급실을 찾는 환자들도 제법 줄어 있었다.
최소한 대기 인원이 몇십 명씩 되지는 않았다.
준후는 치프에게 부탁해 특별히 진료 및 진단에 힘썼다.
준후가 응급의학과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진료 및 진단이었기 때문이다.
내과 병동 또는 외과 병동에서 근무하면 환자를 진료할 기회가 없었다.
보통은 레지던트의 오더.
이를테면 피 검사나 심전도 검사 또는 드레싱 같은 단순 처치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남녀노소를 진료하면서 준후는 환자 보는 눈을 길렀다.
이는 교과서나 교재로는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진료하면서 준후는 환자의 말을 경청했다.
환자가 느끼는 사소한 불편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환자를 향해 쏟는 정성만큼 진단이 정확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무림에서 배워 온 눈썰미와 관찰력.
의대 시절 꾸준히 쌓아온 의학지식 등을 활용해 준후는 진찰을 훌륭하게 해냈다.
응급 환자와 비응급 환자를 가려내고.
환자에게 필요한 과를 연결시켜주는 응급의학과 소속 인턴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고작 응급의학과 근무 1일 차였지만.
준후는 새싹처럼 쑥쑥 자라고 있었다.
“선생님, 5구역에 있는 이재원 환자는 어떻게 할까요?”
차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영지 간호사가 다가와 물었다.
이재원 환자라면 준후가 30분 전에 진료를 본 환자였다.
알콜 환자.
그러니까 술에 취해 119에 실려 온 환자였는데 특이사항이 없어 포도당 수액만 연결해놓은 상태였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자꾸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쳐서요. 아까는 라인(수액 줄)을 뽑으려 하기도 했고.”
“…….”
“차라리 퇴원을 시키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몸도 못 가누는데 퇴원시키면 다시 실려 오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제가 처리할 테니까 일 보세요.”
준후는 경증 환자를 치료하는 응급실 제4구역으로 이동했다.
재원은 술에 절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수액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을 편안하게 움직이지 못해 답답한 모양이었다.
“느아 지브로 보내주어. 느아, 가알래애.”
재원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입을 열 때 역한 술 냄새가 준후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어딜 가신다고 그래요.”
“나아 아안 치했어. 그알 수 이써.”
알콜 환자 특유의 꼬라지가 시작되고 있었다.
곧 죽어도 자기는 안 취했다는 게 알콜 환자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재원을 보면서도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자리 비운 것을 확인하고 준후는 재원에게 다가갔다.
“억지 부리지 말고 똑바로 누워보세요.”
준후는 한 손으로 재원의 목을 받쳤다. 다른 손으로는 베개를 정리하는 척하다가 재원의 뒷목을 가볍게 쳤다.
탁!
귀연수(鬼連手).
손날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 중 하나였는데.
귀연수로 제3후두 후두신경을 가격하면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었다.
스파이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술 깰 때까지 얌전히 주무세요.
재원을 기절시키고 준후는 다시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던 데다가 손속이 워낙 번개 같아서 문제가 생길 여지는 없었다.
“엥? 선생님, 벌써 환자 보고 왔어요?”
영지 간호사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 환자 퇴원시켜달라고 생떼를 부릴 줄 알았는데.”
“갑자기 또 졸린 가봐요. 기절하듯이 자더라고요.”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서 쌤. 되게 특이한 거 알아요?”
“제가요?”
“네. 이상하게 선생님 손만 닿으면 환자들이 얌전해지는 것 같아서요.”
“제가 원래 타고난 약손이거든요.”
준후는 손을 들어 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무공을 사용할 때면 항상 이런 기분이 들었다.
무림을 경험했던 일이 천만다행이라고.
아니,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라고.
무림에서 배운 사회성.
무림에서 배운 무공 등등은 준후의 인생을 180도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호접지몽으로 무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고등학생 때부터 꼬였던 준후의 인생은 지금까지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 게요.”
차트 정리를 마친 준후는 영양제를 꿀꺽 삼키고 화장실로 이동했다.
좌변기에 앉아 짧게 운기조식을 펼쳤다.
피로회복 영양제가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면서 쌓였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출근할 때처럼 온몸이 쌩쌩했다.
운기조식과 영양제 조합은 역시 사기란 말이지.
응급실로 돌아온 준후는 다시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다사다난했던 응급의학과 근무 1일 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빠드드득.
빠드드득.
응급실에 청명한 뼈 소리가 퍼졌다. 하지만 이것은 환자에게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스태프들 몸에서 나는 소리였다.
날이 밝으며 아침이 다가오는 시점.
준후가 피곤해하는 스태프들을 위해 추궁과혈과 마사지를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와, 개운해. 목 돌아가는 거 봐.”
방금 막 준후의 마사지를 받고 난 치프 재욱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빳빳하게 굳었던 목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사지를 받은 허리도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주변에서 하도 준후의 마사지를 칭찬하길래 받아봤는데 그 효과가 경이로웠다.
“준후야, 너 의사 관두고 마사지샵 같은 거 차려야 하는 거 아니냐?”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요.”
“앞으로 내 근무 시간은 너랑 맞춰야겠다. 그건 그렇고 회의록은 다 작성했어?”
“뽑아 놓은 거 있는데 보여드릴게요.”
준후가 기다렸다는 듯 회의록을 내밀었다.
잠시 후 진행될 오전 컨퍼런스에 필요한 회의록이었다.
재욱은 준후가 작성한 회의록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인계할 때 본 당직일지처럼 회의록도 정갈했다. 가독성이 좋았고 중요한 내용만 콕콕 적혀 있었다.
1년 차 성민이 작성하는 회의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진짜 대단하단 말이지.
재욱은 회의록에서 시선을 떼고 준후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준후에 대한 첫 인상은 좋지 않았다.
첫째로 의사가 아니라 의사 역할을 맡은 드라마 배우처럼 곱상한 외모가 거슬렸다.
둘째는 첫 번째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는데.
고생 한 번 안 해본 외모라서 일을 잘 못 할 것 같다는 편견과 선입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이 근무를 서고 나서 재욱의 색안경은 산산이 부서졌다.
준후는 인턴 근무 첫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일을 잘했다.
진료면 진료.
타과 연락이면 타과 연락.
문서 작성이면 문서 작성.
심지어 어제저녁에 응급실에 쳐들어온 불량배를 상대하는 기백도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근무하면서 재욱은 준후 같은 괴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1년 차 성민을 예뻐하던 재욱의 마음은 차차 준후에게 기울고 있었다.
“회의록 마음에 든다. 조폭 쳐들어왔을 때의 상황도 디테일하게 잘 적었네.”
“네. 감사합니다.”
“계속 이대로 해. 초심 잃지 마.”
“당연히 그래야죠. 제가 호기심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초심이거든요.”
“짜식, 농담도 잘하네. 그리고 아마 오늘부터 케이스 스터디 들어갈 거야. 신경 좀 써둬.”
“케이스 스터디요?”
“어. 우리 과는 인턴 케이스 스터디를 빡세게 하는 편이거든. 인턴 평가도 케이스 스터디가 좌우하는 편이고. 평소에 열심히 준비해 놔.”
재욱은 준후에게 특급 정보를 흘렸다.
케이스 스터디.
말 그대로 의사가 환자의 임상 사례를 공부해서 교수와 레지던트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가상으로 신경외과 환자가 응급실에 내원했다고 치자.
이때 응급의학의가 해당 환자를 어떻게 진료하고, 어떤 검사를 진행해야 하는지 등등을 공부해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응급의학과의 경우 이 케이스 스터디가 인턴 평가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뭐, 너라면 별걱정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
“…….”
“환자 잘 보고 처치도 잘했는데 케이스 스터디에서 삐끗하는 바람에 평가가 낮으면 억울하잖아?”
“조언 감사합니다, 미리미리 준비해둬야겠네요.”
“오냐. 그런 의미에서 마사지 한 번 더 해줄래?”
재욱은 준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관절과 근육이 풀리면서 퍼져나가는 시원한 황홀감.
그것을 한 번 더 느끼고 싶은 재욱이었다.
* * *
응급의학과의 오전 컨퍼런스는 평소보다 길었다.
저녁에 조폭들이 난입했던 사건으로 이래저래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준후가 혼자 조폭들을 상대하고 진정시켰다는 소식에 교수들과 레지던트들은 크게 놀랐다.
준후의 기백을 높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준후의 행동이 너무 위험했다며 꾸짖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가 워낙 좋았기 때문일까.
여론은 대부분 준후에게 우호적이었다.
소화기 외과에서 조폭 두목의 비장 수술을 무사히 끝냈다는 소식도 들려왔고.
잠시 후 오전 회의에 이어서 오전 회진까지 무사히 끝났다.
그런데 인턴 지도 교수가 준후와 명훈을 따로 불렀다.
“인턴들은 이번 주말까지 케이스 스터디 준비해 와. 준후는 기흉 환자, 명훈이는 T.A(Traffic accident, 교통사고) 환자.”
“네. 교수님.”
“네. 교수님.”
재욱에게 들은 정보 그대로였다.
막 근무 첫날이 지났을 뿐이거늘.
인턴 지도 교수는 케이스 스터디를 숙제로 내주었다.
대망의 인턴 근무를 첫째 날을 마치고 준후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빗살무늬를 띤 아침햇살이 창가로 쏟아지고 있었다.
햇살이 이렇게 눈부신 거였나?
준후는 유난히 감성적인 기분이 들었다.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고 워낙 다양한 일들을 겪었던 탓일까.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이 지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치프는 게임하실 거죠?”
퇴근 준비를 하는 재욱에게 준후가 물었다.
“당연하지. 너도 같이 할래?”
“같이 하고 싶지만 케이스 스터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첫날 정도는 쉬어도 괜찮아.”
“저는 쉬면 오히려 좀이 쑤시더라고요.”
재욱이 퇴근한 후 준후는 명훈과 대화를 나눴다.
케이스 스터디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명훈의 인성이 개차반이었다면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겠지만 명훈은 인성이 된 친구였다.
“고맙다, 준후야. 사실 케이스 스터디 적당히 하고 말 생각이었는데.”
“…….”
“인턴은 케이스 스터디를 잘 못 해도 좀 봐주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근데 나 오늘은 진짜 쉬고 싶다. 근처 사우나 갈 생각인데 콜?”
“난 숙직실에 있으려고. 나머지 공부해야지.”
“하루를 꼴딱 세우고도 안 피곤해?”
명훈이 혀를 차며 물었다.
준후와 달리 명훈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하루 만에 다크서클이 코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명훈의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고 준후의 상태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럼 이따 저녁때 보자.”
“오케이. 이따 봐.”
준후는 혼자 당직실에 남아 케이스 스터디를 준비했다.
응급의학과의 특성상 근무가 끝나면 다들 퇴근을 했기에 숙직실은 온전히 준후의 차지였다.
준후는 네 시간 동안 기흉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제야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운기조식을 1시간 운용하자 몸이 가뿐하고 머리는 맑아졌다.
준후는 곧바로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많고 많은 상점 중에 홍삼을 파는 매장으로 들어가 홍삼을 120포 구입했다.
매장에서 나오자마자 준후는 홍삼 3포를 쪽쪽 빨아먹었다.
인턴 근무를 시작하면서 내공 소모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홍삼이 진짜 효과가 있느냐.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적어도 준후는 홍삼을 잘 받았다.
30여 분이 지나자 아랫배가 뜨끈뜨끈해졌다.
그렇게 당직실로 돌아온 준후는 침대 등받이에 기댄 채 벽을 쳐다보았다.
모처럼 주어진, 황금 같은 자유 시간.
지금부터 뭘 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