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47화
제8장 응급의학과(9)
준후는 환자에게 다가가 C.C(Chief Complaint, 주된 증상)을 자세하게 들었다.
환자는 건강검진을 통해 폐암 2기 A 진단을 받고.
이틀 전 폐 절제술을 받은 후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점심부터 유독 흉통이 심해졌다고 한다.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에 차도가 없다고 전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별거 없다고 했지?
문득 승범과 시선이 마주치자 승범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승범의 의견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환자는 내시경 수술이 아닌 일반 절개 수술을 받았다.
몇 시간 동안 가슴이 좌우로 벌어져 있었으니 통증을 느끼는 게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준후의 의견은 달랐다.
-가슴이 엄청 결려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특히 그래요.
준후는 환자의 하소연 중 이 부분을 주목했다.
숨을 쉴 때마다 통증이 느껴진다는 언급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남다른 특징이 있는 통증이랄까.
“잠깐 상의 좀 걷어 올려보시겠어요? 청진을 해보겠습니다.”
환자가 환자복 상의를 걷었고 준후는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었다.
환자의 쇄골 아래.
젖꼭지 위아래.
견갑골 인근 쪽에서 심장음과 폐음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환자의 왼쪽 젖꼭지 아래 부근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뭔가 목탁을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랄까.
소리를 자세하게 포착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의문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환청을 들은 걸까.
아니면 주변의 잡음을 들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해당 부위에 정말 어떤 문제가 생긴 걸까.
워낙 작은 소리가.
워낙 짧게 들렸다가 사라졌으므로 준후조차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지가 무슨 진짜 의사라도 된 것처럼 구네. 청진을 하면 뭘 아나?”
준후를 지켜보던 승범이 비아냥거렸다.
준후의 청진을 얕잡아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100퍼센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턴들은 갓 병원 근무를 시작했고 실전에서 청진을 한 경험도 전무했기에.
“환자분 진료하는데 조용히 좀 해주시죠?”
준후는 승범에게 핀잔을 주었다.
환자가 앞에 있어서 말을 최대한 순하게 했다.
아파하는 환자를 제대로 진단하고 싶다.
게으른 승범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
그 일념으로 준후는 환자의 왼쪽 젖꼭지 아래에 다시 청진기를 갖다 대었다.
두 번째 시도는 첫 번째 시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같았지만 그 안을 들여다 보면 큰 변화가 있었다.
이번에는 내공을 끌어올려 청력을 강화했던 것이다.
내공은 그 용도가 무궁무진했는데 신체감각을 증폭하는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어!
내공으로 청력을 강화하자 청진기를 얹은 부근에서 탁한 폐음이 또렷하게 들렸다.
턱. 턱. 턱.
누군가 주먹으로 벽을 두들기는 듯한 둔탁한 소리.
환자의 폐가 문제가 있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검사가 필요했고.
“준후, 너 여기서 뭐 하냐?”
때마침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 준식이 병실로 들어왔다.
준식은 신원대 출신으로 준후와 안면이 있었다.
“너 타과 인턴 아니야? 흉부외과는 왜 왔어?”
“성호 형이 잠깐 도와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환자한테 무슨 문제라도?”
“방금 청음했는데 폐에서 탁음이 들렸습니다.”
준후는 청음 결과와 환자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준식에게 노티를 했다.
준식이라면 당연히 준후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건만…….
웬걸?
준식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흉통이 심할 텐데. 네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니야?”
준식이 승범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승범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준후는 뭔가 일이 꼬이는 듯 해서 불안했다.
이런 식의 전개는 원하지 않았다.
“그럼 선배가 직접 청진해 보시면 안 될까요?”
“그러지, 뭐.”
준후와 교대를 한 준식이 환자를 청진해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진상 전혀 문제를 찾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폐의 탁음이 희미해서 포착을 못 한 듯했다. 하긴 준후마저도 내공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확인할 정도였으니까.
“잡음 들은 거 아니야? 내 귀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그래도 환자가 불편해하니 흉부 촬영이라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서준후, 너 선 넘는다?”
준후의 제안에 준식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미간을 좁혔다.
“타과에서 오지랖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서 레지던트인 내 말이 틀렸다는 거야?”
“그런 게 아닙니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니 제대로 된 검사를 해보자는 것뿐이에요.”
“얼마나 잘났으면 선배가 진료를 해도 듣지를 않네. 대단하다, 너도.”
잠자코 있던 승범이 깐족거렸다.
준후는 졸지에 준식과 승범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내공으로 증폭한 청각을 통해 환자의 폐에서 확실한 탁음을 듣지 않았던가.
환자의 상태를 무시했다간.
이후 어떤 비극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때는 손가락으로 막을 질환을 손바닥으로 막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일까.
준후는 미움을 받더라도 강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선배. 흉부 촬영 오더 내려주세요. 만약 아무 문제 없으면 제가 책임질게요.”
* * *
흉부외과 당직실.
준식은 승범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입방아를 찧고 있는 대상이라면 당연히 준후였다.
준후가 흉부외과 일을 도와주기 위해 올라온 것은 분명 기특했다.
하지만 준식의 진단에 반해서 흉부 촬영을 요구한 것은 괘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가 병원 근무를 하면 얼마나 했다고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는 말인가.
인턴 주제에 말이다.
“준후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네가 이해해. 걔가 원래 의대 시절부터 까불고 다녔어.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안다니까.”
승범은 준식에게 반말을 했다.
재수생이라 준식과 동갑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신원대병원 진료부원장임을 이용해 친구를 먹었던 것이다.
“그러게. 이 기회에 군기 좀 빡세게 잡아놔야겠어.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했지.”
책상에 앉아 있던 준식은 모니터에 PACS(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 영상을 띄웠다.
준후가 환자를 데리고 가서 찍은 흉부 엑스레이 영상을 확인했다.
하여간 호들갑은.
환자한테 너무 감정 이입해도 안 된다는 것도 모르고.
준식은 준후를 혼낼 생각을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환자의 좌측 폐 하단에 하얀 음영이 존재했던 것이다.
와…… 이럴 리가 없는데?
눈을 비비며 영상을 다시 확인했지만 변하는 사실은 없었다.
정말로 준후의 진단이 맞았다.
환자 좌측 폐 하단에 자리 잡은 음영.
그것은 환자가 흉막삼출을 앓고 있다는 증거였다.
흉막삼출.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혈액 성분이 흉막강에 고이는 질환으로.
방치했다간 폐렴과 폐색전증으로 번질 수 있었다.
해당 환자의 경우 폐 절제술 후, 폐 기능이 떨어져서 발생한 듯싶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빨리 말해 봐.”
승범이 준식의 대답을 재촉했다.
“준후 말이 맞아. 환자한테 흉막삼출이 있어.”
준식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이 얼마나 쪽팔린 일인가.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가 햇병아리 인턴보다 환자 진단을 못 했다는 사실이.
주변에 사람만 없었다면 준식은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그럼 환자는 수술 후 자연스러운 통증이 있었던 게 아니야?”
“그런 것 같아.”
“그럼 준후가 청진기로 폐에서 탁음을 들었다는 것도 환청이 아니겠네?”
“제대로 들었다고 봐야지. 근데 이상하다? 나한테는 분명 안 들렸거든. 내 귓구멍이 막혔나?”
준식은 애꿎은 귀만 후비적거렸다.
어쨌거나 흉부 영상 결과로 준식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준식의 말이 틀리고 준후의 말이 옳은 것으로 드러났기에.
민망해서 준후 얼굴을 어떻게 다시 본담?
“너무 자책하지 마.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화제를 돌리는 승범의 목소리가 은밀하고 달콤했다.
* * *
같은 시각.
준후는 부축하고 있던 환자를 병실 침상에 눕히고 있었다.
막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결과는 확인 못했지만 준후는 본인의 진단이 옳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상이라면 들릴 수 없는 폐의 탁한 소리.
그것을 선명하게 들었으니까.
“선생님. 괜히 저 때문에 윗사람한테 혼나는 거 아닙니까?”
“…….”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든데 내가 유난을 떤 것 같기도 하고.”
환자가 쑥스럽고 미안해하며 말했다.
준후가 환자 편을 들다가 선배에게 찍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프다고 해서 환자분이 아픈 게 당연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아플 때는 유난 떨어야죠.”
“…….”
“아프다고 호소를 해야 간신히 알아주는 게 세상인 걸요.”
“허허허. 젊은 선생님한테 한 수 배웠네요.”
환자가 껄껄껄 웃었다.
그렇게 환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준식과 승범이 병실로 복귀했다.
드레싱 카트까지 손수 챙겨서.
드레싱 카트를 확인한 순간.
준후는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크흐흐흠. 준후, 네 말이 맞더라. 환자에게 이상 있는 것 맞아. 흉부 촬영으로 흉막 삼출 확인했다.”
준식이 딱딱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까는 내가 실수했던 걸 인정할게. 근데 말이다.”
“네.”
“기왕 흉부외과에 올라오고 진료까지 본 거 처치까지 하고 가는 건 어때?”
“처치라면…….”
“흉관 삽관. 흉막에 고인 삼출액을 빼줘야지.”
흉관삽관이란 말 그대로 흉강에 튜브를 삽입하는 처치였다.
본래라면 인턴 때부터 배우는 처치였지만 실제로 인턴들이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처치 난이도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레지던트 1년 차에 흉관삽관을 배우는데.
레지던트들조차 흉관 삽관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타 과의 경우, 흉관삽관이 필요할 때 흉부외과 콜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처치를 자신에게 맡긴다고?
준식의 불순한 의도를 준후는 금방 알아차렸다.
오진으로 추락한 본인의 권위를 흉관 삽관으로 바로 잡을 생각이겠지.
준식의 속이 이리도 옹졸할 줄은 준후는 미처 몰랐다.
“왜 못하겠어? 천하의 서준후도 흉관 삽관은 겁나나 보지?”
준식 곁에 있던 승범이 도발을 했다.
일부러 준후의 자존심을 긁었던 것이다.
“처치도 제가 할게요. 대신 준식 선배가 어시스트만 도와주세요.”
준후는 흔쾌히 흉관 삽관을 수락했다.
흉부외과를 잠깐 도와주러 온 입장이니 사실 처치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못하겠다고 말한 뒤 당직실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준후는 기 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다.
본인들의 오진을 슬쩍 넘기고.
준후를 찍어 누르려는 준식과 승범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또 흉관삽관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환자분, 편하게 누워보시겠어요?”
“엑스레이도 찍었는데 뭘 또 해야 합니까?”
환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준후를 쳐다보았다.
“네. 환자분이 불편해하시던 이유를 찾았거든요.”
준후는 환자에게 흉막 삼출에 대해 설명하고 처치가 필요함도 알렸다.
본인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환자의 표정은 의외로 환했다.
꾀병 환자 취급받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기색이었다.
답답한 인간들.
자기들 편한 것 밖에 모르는 인간들.
환자의 말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설령 청진을 못 했더라도 흉부 촬영으로 흉막 삼출을 진단할 수 있었을 텐데…….
준후가 나섰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환자는 흉막삼출의 후유증으로 폐렴이나 폐 색전증 등을 앓을 뻔하지 않았던가.
준후는 준식과 승범을 싸늘하게 노려보고 처치를 준비했다.
잘 봐라, 쓰레기들아.
흉관 삽관, 한 번에 성공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