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공 쓰는 외과 의사-48화 (48/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48화

제8장 응급의학과(10)

“편하게 누워보시겠어요?”

준후는 침상에 걸터앉은 환자가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눕도록 유도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선생님.”

갑자기 환자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준후를 불렀다.

“네?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니요. 불편한 건 없고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에요.”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지금 선생님이 콩쥐팥쥐의 콩쥐 같은 역할입니까?”

환자의 질문은 준후의 처지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준식이 계모라면 승범은 팥쥐였다.

두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려 준후를 괴롭히는 중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환자의 나이가 있다 보니 신데렐라보다는 콩쥐팥쥐가 먼저 떠올랐던 것이리라.

“정곡을 찌르는 비유시네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당연히 있죠.”

준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저를 믿어주시면 됩니다. 저 둘이 옆에서 환자분의 불안감을 부추길 확률이 높거든요.”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환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두 선생님은 나를 꾀병환자 취급했잖아요.”

“…….”

“내가 저 사람들을 믿겠습니까? 아니면 잘 생기고 친절한 선생님을 믿겠습니까?”

환자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준후는 처치의 부담감을 덜었다.

사실 흉관 삽관 자체는 그리 두렵지 않았다.

준후가 두려웠던 것은 준식과 승범이 환자를 불안하게 만들어, 환자가 처치 중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준후의 손속이 정확하다고 한들.

환자가 중요한 순간에 미동을 보인다면.

메스와 바늘이 엄한 곳에 들어갈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자는 준후에게 선뜻 신뢰를 건넸다.

즉 최후의 변수마저 사라진 셈이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고.

준후는 환자를 통해 모처럼 인간관계의 선순환을 체험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것은 망상에 가까웠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옆에 있었다.

준식과 승범.

준후가 영민하게 환자의 흉막삼출을 진단해 주었으면 고마워할 일이지.

기강을 잡겠다고 흉관삽관을 시켜?

세상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준후야, 너답지 않게 뜸 들인다? 지금이라도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하든가.”

잠자코 있던 준식이 얄밉게 처치를 재촉하며 말을 이었다.

“환자분. 이 친구가 지금부터 어려운 처치를 할 건데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

“제가 곁에서 보고, 도울 거니까요.”

준후가 예상했던 전개, 그대로였다. 준식은 은근하게 준후를 물 먹였다.

“난 걱정 같은 거 안 합니다. 여기서 이 선생님이 제일 믿음직하거든요.”

환자가 준후의 손을 감싸 쥐었다.

환자의 손은 앙상했으며 탄력 없이 없었고 주름으로 가득했지만 그 따뜻함만큼은 난로 못지않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

“…….”

처지에 나서기 직전, 준후는 환자와 눈을 마주쳤다.

환자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보라고.

물론 준후는 그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후는 무림에서 검객으로만 20여 년을 살아왔다. 숱한 악전고투를 거치고 참혹한 생사결전도 이겨냈다.

비록 껍데기는 새내기 병원 인턴이었지만.

그 속에는 말도 안 될 만큼 알찬 알맹이를 갖추고 있었다.

준식과 승범은 준후가 함정에 빠졌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과연 그럴까.

고작 이 정도가 함정이라고?

겨우 발목까지 잠기는 개울물에 성인을 밀어 넣고 함정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 준후는 한심할 따름이었다.

“흉관 삽관, 시작하겠습니다.”

준후의 청명한 목소리가 병실에 퍼져나갔다.

* * *

본격적인 흉관 삽관에 앞서.

준후는 환자의 환자복 상의를 완전히 걷어냈다.

스으으윽.

스으으윽.

수술 장갑을 착용하고 환자의 우측 가슴 부위를 넓게 소독했다.

환자가 폐엽 절제술을 받은 부위가 우측 폐이고 흉막삼출이 발생한 부위도 우측 폐였다.

“리도카인(국소마취제), 주세요.”

“여기.”

곁에 있던 준식이 준후에게 주사기를 내밀었다.

“따끔합니다.”

준후는 건네받은 주사기로 환자의 우측 옆구리 인근을 마취했다.

마취가 퍼지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잠깐 여유가 생겼다.

“자신이 있는 거야? 아니면 무모한 거야?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막 진행하네?”

준식이 비난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딱히 선배한테 궁금한 게 없어서요.”

“왜? 응급의학과에서 흉관 삽관해 봤어?”

“해본 건 아니에요. 근무 1일 차인 인턴한테 누가 흉관 삽관을 맡기겠어요? 선배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준후가 은근히 준식을 모욕하자 준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차피 너도 배워야 할 거 아니야. 난 미리 교육해 주고 있는 것뿐이라고.”

“…….”

“정 무서우면 여기서 그만두라니까?”

“아니요. 이 환자분은 제가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선배나 승범이한테 맡겨두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무섭네요.”

준후는 준식와 승범을 싸잡아서 비난했다.

상대방의 의도가 불순하니 준후도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기어오르는 것.

그것이 악당의 속성이었다.

“너 진짜 깡도 좋다. 남의 과에 올라와서 이런 일도 다 벌이고.”

“그런데 그 일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죠. 환자분 느낌이 어떠세요?”

준후는 마취 자리 인근을 검지로 지그시 누르며 환자에게 물었다.

환자는 별 느낌이 없다고 했다.

마취가 제대로 됐으니 본격적인 처치에 나설 시간이었다.

슬슬 실력 발휘를 해볼까.

“10번 주세요.”

무림에서 1미터 길이의 검을 휘두르던 준후의 손에 손가락 한 뼘 정도 길이의 메스가 쥐여졌다.

메스가 주는 감촉은 뭐랄까, 앙증맞은 느낌이 있었다.

스으으윽.

준후는 청진기로 탁음을 청취했던 4-5번 갈비뼈 사이에 절개창을 내었다.

카데바에 메스를 사용한 적은 있었지만 환자에게 사용한 건 처음이었다.

스으으윽.

준후의 손목 스냅을 따라.

2센티미터 길이의 세로 절개창이 생겨났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메스는 무척 날카로웠다.

피부가 종이처럼 매끈하게 잘려나갔다. 무림에서 사용해 봤던 명검에 버금갈 정도로.

주르르륵.

절개창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준후는 거즈로 닦아냈다.

“제대로 절개한 거 맞아? 동맥이나 정맥, 신경 건드린 건 아니고?”

지켜보고 있던 준식이 우려를 드러냈다.

“네.”

“말로만 대답하지 말고 똑바로 근거를 대.”

“선배, 정신 사나우니까 어시스트에 집중해 주시죠? 꼬투리 잡으려고 처치시킨 거 아니잖아요?”

“하…… 뭐라고? 이 자식이…….”

준식이 얼굴을 구기며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환자 앞이라서 참는 듯했다.

준식의 훼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준후는 다음 처치에 나섰다.

절개창으로 켈리(수술 도구, 지혈, 수술부위 고정, 핀셉 등으로 사용)를 삽입하며 절개창의 좌우 너비를 확장시켰다.

흉관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하는 사전 작업이었다.

‘자 다음은…….’

준후는 켈리로 확장시킨 절개창에 이번에는 검지를 쑤셔 넣었다.

삼출액이 고여 있는.

흉막강의 위치를 손으로 촉지하면서 거리를 재는 것이었다.

절개창으로부터 대략 3센티미터 전진한 장소에서 흉막강을 만져볼 수 있었다.

무림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의대 시절 해부학 교수 밑에서 해부학 공부를 했기 때문일까.

흉관 삽관을 처음하고 있음에도 준후는 망설임이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도전정신과 희열을 느낄 정도였다.

이는 무림에서 악인을 베어낼 때와는 또 다른 성취감과 만족감이었다.

슬슬 삽관에 마침표를 찍어볼까.

“가이드 와이어(투관침)”

준식에게 건네받은 투관침을 준후는 절개창으로 밀어 넣었다.

투관침이 너무 깊숙하게 삽입되면 자칫 폐 손상이 발생할 수 있었지만 그런 불상사가 벌어질 리는 없었다.

과거 검객이었던 준후는 거리조절에 탁월했으니까.

푹!

투관침이 흉막강을 관통하면서 손끝에 감각이 전해졌다.

비닐 뜯어지는 느낌이랄까.

삽관은 대성공이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는 엑스레이를 찍어봐야겠지만 준후는 자신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투관침의 전진 거리는 정확히 3센티미터.

자로 잴 수 있다면 0.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으리라.

주르르륵.

투관침 끝부분으로 삼출액이 고여 갔다.

“삽관 확실해? 너무 얕으면 다시 찔러. 깊숙이 찔렀다 싶으면 빨리 빼고.”

“판단 잘해라. 네 손으로 환자 잡는 수가 있어.”

준식과 승범이 번갈아 준후를 흔들어놓았지만 준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멀뚱멀뚱 서 있는 너희들이 뭘 알겠니?

스으으윽.

준후는 투관침에 딸린 카테터를 흉막강으로 밀어 넣었다.

그 상태에서 투관침을 제거하고 절개창을 꿰매기 시작했다.

역시 난생 처음 하는 봉합이었지만 손이 날아다녔다.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절개창은 뚝딱 봉합되었다.

흉관삽관을 마무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분.

흉관삽관에 숙달된 레지던트도 5분은 걸리는데 이를 절반 넘게 단축한 것이다.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준식은 준후의 처치를 다 지켜보고서 혀를 찼다.

본인이 직접 흉관 삽관을 해보고.

다른 연차 선배들의 흉관삽관도 오래 지켜본 준식이었다.

그런데 준후는 오늘 처음 흉관삽관을 했음에도 자신보다 훨씬 탁월한 솜씨를 뽐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튜브 안 주시고 뭐 해요?”

“어? 어.”

준후의 재촉에 준식은 뒤늦게 튜브를 건넸다.

드르르륵.

카테터에 튜브를 연결하자 누런 삼출액이 배액 통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는 카테터가 정확하게 흉막강을 관통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흉막강은 뚫었다고 해도 폐 손상이 있을지 모르니까.’

준식은 준후의 흉관삽관이 실패하기를 바라며 다음 오더를 내렸다.

두 번째 흉부 엑스레이 촬영이었다.

흉부 엑스레이상에서 특이 소견이 없어야만 흉관 삽관을 정상적으로 마쳤다고 볼 수 있었다.

“자신 있나 보네?”

승범과 환자를 촬영실로 내려보낸 준식이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의 표정은 수도승처럼 담담했다.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삽관하는 순간 느꼈거든요. 실패할 수가 없다는 걸.”

“너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거 알지?”

준후의 오만함에 준식은 치를 떨었다.

어쩌다 얻어걸려서 환자의 흉막삼출을 진단했다만 그 행운이 과연 흉관삽관까지 이어질까?

준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행운이란 성미가 고약해서 한 장소에 두 번 찾아오지 않기 마련이었다.

잠시 후 환자가 병실로 돌아왔고 준후와 준식, 승범은 함께 당직실로 자리를 옮겼다.

모니터로 흉부 엑스레이 결과를 확인했다.

“…….”

“…….”

흉부 영상이 떠오른 순간, 고요한 정적이 당직실을 휘감았다.

준식은 흉부 영상을 보고 또 봤다.

하지만 도무지 깔 것이 없었다.

카테너는 정확히 흉막강만을 꿰뚫었다. 폐 손상의 징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준후에게 흉관 삽관을 시킨 뒤.

제대로 못 하면 따끔하게 기강을 잡을 계획이었는데.

그 야심 찬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준식은 갑자기 속이 쓰라렸다.

문득 승범을 쳐다보니 승범도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구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제 눈에는 아무 이상 없어 보이네요.”

준후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 그래 보이네.”

충격 받은 준식이 말을 더듬었다.

완패를 당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선배는 후배 괴롭힐 시간을 환자에게 투자하는 게 좋겠네요.”

준후가 준식을 도발하고 승범을 쳐다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진료부원장인 아버지한테 기댈 생각 말고 네 실력부터 키워.”

“…….”

“일 못 한다고 매번 아버지를 호출할 순 없잖아?”

“너, 이 새끼 어디서 건방진 소리를…….”

승범이 발끈했으나 준후의 표정도 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웃기지 마. 네가 모른 척한 환자의 흉막삼출을 진단하고 흉관삽관을 한 게 건방진 건가?”

“…….”

“오히려 의사다운 게 아니고?”

“…….”

“두 분 수준, 잘 보고 갑니다.”

준식과 승범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준후는 흉부외과 당직실을 떠났다.

그제야 좀 속이 후련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