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49화
제8장 응급의학과(11)
콰지직.
손에 쥔 캔 커피가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캔 커피만큼이나 승범의 표정도 일그러져 있었다.
준후의 건방진 낯짝을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몸에 힘이 들어갔다.
타과 인턴 주제에 감히 환자 앞에서 나를 망신 줘?
불쾌함이 모욕감으로 발전하면서 몸이 파르르 떨렸다.
승범은 사납게 캔 커피를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
텅!
캔 커피가 쓰레기통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지만 승범은 줍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준후와는 의대에 다닐 때부터 악연이었다.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울 때 시비를 걸었던 것도 준후였고.
카데바 사진을 찍어서 SNS에서 업로드한 밀고자도 분명 준후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환자 앞에서 승범을 쪽팔리게 만든 사람도 준후였고.
승범에게 준후란 인생의 걸림돌이자 훼방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 나쁘단 말이지.’
승범은 턱에 얼굴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승범이 준후를 싫어하는 이유야 넘치고 넘쳤지만, 그중 핵심적인 감정은 열등감이었다.
승범은 모자란 것 없이 자라왔다.
부모님의 직업은 각각 어머니가 대학 교수, 아버지가 대학병원 진료부원장으로 빵빵했으며.
그런 풍족한 환경에서 비록 재수를 했다만 신원대학교 의대에 합격하는 데 성공했다.
의대 졸업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그래서일까.
승범은 세상이 자신을 위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앞길은 탄탄하고 꽃이 깔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준후를 만나면서부터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잘생긴 외모.
동기들과 주변을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씨.
학교 성적과 교수들의 인정.
승범이 가지고 싶었던.
승범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것들을 준후는 빼앗아갔다.
승범은 꼭 그런 준후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한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왜 내가 저런 근본도 없는 녀석보다 인정을 못 받는 거지 하고.
지이이잉.
의사 가운 속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지금 가요.”
상대방의 용건이 채 나오기 전에 승범은 자기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끊었다.
휴게실을 떠나 스테이션으로 이동하자 콜을 했던 간호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승범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승범에게 쓴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승범의 아버지가 병원 진료부원장이니 함부로 손을 못 대는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은 이토록 달콤했다.
“왜요? 할 말 있어요? 할 말 있으면 속 시원하게 해봐요.”
승범은 일부러 간호사를 도발했다.
준후에게 받은 열등감을 털어내고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다.
“아…… 아니에요. 환자 드레싱이 밀려 있으니까 부탁 좀 드리려고요.”
“인턴도 사람인데 숨 좀 쉬고 삽시다.”
승범은 드레싱 카트를 끌고 병실을 돌았다.
드레싱(상처 소독)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드레싱을 실시했다.
그러다가 수술 후 흉막 삼출로 흉관 삽관을 한.
아까 준후와 마찰을 빚게 만든 환자를 소독하게 되었다.
환자의 가슴에 꽂힌 흉관을 보는 순간.
승범은 당당하게 흉관을 삽관하던 준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교과서로만 배웠던.
실전에서는 해 본 적이 없었을 흉관 삽관을 그 새끼는 어떻게 그리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을까.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삽관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제아무리 승범이라도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았다.
카데바도 아니고.
메스로 환자의 피부를 가르고.
또 흉막강에 투관침을 찔러 넣는 일은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할 수 없었다.
젠장, 또 한 발 뒤처졌구나.
간신히 억눌렀던 불쾌함이 되살아났다.
환자를 보고 있으면 왠지 준후가 떠올라 승범은 서둘러 드레싱을 마쳤다.
드르르륵.
병동 복도를 통과하는데 한 병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승범은 걸음을 멈추고 병실 문 앞에 섰다.
1년 차 레지던트 준식이 2년 차의 지도하에 환자에게 흉관 삽관을 시도 중이었다.
“손 떨지 말고 침착하게.”
“네.”
“긴장되면 심호흡이라도 좀 하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준식의 어설픈 모습에 승범은 혀를 찼다.
어휴, 저 X신 새끼.
한심한 새끼.
저 실력으로 어떻게 준후를 엿 먹이려고 했는지.
승범은 드레싱 카트를 처치실에 두고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물었다.
서준후, 항상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
저주를 담은 승범의 담배 연기가 제사장의 연기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 * *
‘누가 내 욕을 하나?’
응급의학과 당직실로 복귀하며 준후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바라본 창밖의 풍경은 깜깜했다.
병원 건물들은 등대처럼 밝은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도로를 통과하는 자동차들은 꼭 반딧불 같았다.
예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서울 도심의 풍경은 삭막했다.
보이는 것은 죄다 건물들뿐이어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다음 오프 때는 등산을 가는 것도 좋겠다고 준후는 생각했다.
무림을 경험한 후 준후는 산이 좋아졌다.
산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겸손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일단 원하는 건 다 얻었네.
준후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흉부외과에서 환자를 살피는 동안, 준후는 내공 혈관 조영술을 완성했다.
승범에게 묵직한 한 방도 날릴 수 있었다.
그건 기대하지 못했던 뜻밖의 보상이었다.
승범을 볼 때마다 준후는 종종 남궁세가의 남궁소를 떠올렸다.
둘 다 똑같이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못된 짓만 골라서 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준후는 비무를 통해 남궁소를 혼내주었다.
하지만 현대는 무림이 아니었다.
단순한 힘 싸움이나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한, 정치적이면서도 권력과 연결된 해결책이 필요할 것 같아 보였다.
실력이 중요하지만 실력만 키워서는 안 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권력도 손에 넣어야 해.
먼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면서 준후는 숙직실에 도착했다.
숙직실은 고시원이 떠오를 정도로 비좁았다.
좌우 양옆으로 2층 침대가 각각 하나씩 놓였다.
창가 쪽에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디서 뭐 하고 있었어?”
먼저 와서 쉬고 있던 응급의학과 짝턴(짝궁 인턴) 명훈이 준후에게 물었다.
“뭐, 그냥 이것저것. 사우나는 잘 갔다 왔고?”
“어휴. 너무 좋던데?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더라. 너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명훈이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준후는 반대편 침대에 걸터앉아 아까 구입한 홍삼을 3포를 쪽쪽 빨아 먹었다.
몇 번이고 내공 혈관 조영술을 시험한 탓일까.
단전이 허한 느낌이 들었다.
“응급의학과가 빡세긴 하긴 한데 오프도 있고 좋네. 다른 과 인턴이었으면 이런 사치를 못 누렸을 텐데.”
“그건 그렇지. 근데 뭐 보고 있어?”
“너플릭스. 멍 때리면서 시간 때우기에는 너플릭스만 한 게 없지. 준후, 넌 너플릭스 안 보지?”
“난 딱히 재미있는 걸 모르겠더라고.”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준후의 눈에는 너플릭스의 드라마나 영화보다 현실의 이야기가 더 극적이고 흥미로웠다.
어제오늘 마주하고 진료한 환자들이 그랬고.
준후만 해도 호접지몽으로 무림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명훈과 잡담을 나누는 동안.
준후는 슬슬 몸이 간지러워졌다.
할 일이 없을 때 생기는 증상이었다.
무림에서, 또 무림을 경험하고 나서 준후는 시간을 허투루 쓴 적이 없었다.
준후의 시간은 언제나 실력을 갈고닦는 연장 선상에 있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준후는 괜히 불안했다.
시간을 아깝게 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답 못 들었는데.”
“무슨 대답?”
“오프 끝나고 뭐 했냐고. 이것저것 뭘 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 봐.”
명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내공 혈관 조영술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으므로.
준후는 그 사실만 쏙 빼놓은 채 흉부외과 일을 도왔다고 말했다.
“흉부외과 엄청 바쁘다고 들었는데 고생 많았겠다.”
“고생하는 만큼 성장하는 법이니까.”
“준후, 너한테는 성장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데?”
명훈의 질문이 의미심장했다.
뭐랄까, 내면의 뼈대를 묻는 질문이랄까.
그래서 준후도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으음……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장하고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성장하는 거?”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쉬지도 않는구나.”
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어.”
“네가 앞으로 강해지지 못하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
명훈의 질문이 다시 준후의 뼈를 쳤다.
같이 일할 때는 몰랐는데 명훈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명훈은 꼭 심리 치료사 같았다.
준후는 어느새 지루함을 잊고 명훈과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대화 속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
“아마 괴롭겠지. 계속 강해져야만 주변 사람을 지키고 도울 수 있으니까.”
“무력감을 느끼는 걸 싫어하는구나.”
“무력감이라……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
돌이켜보면 준후의 내면에는 무력감에 대한 혐오가 깊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무림에서 아버지가 마두 적일귀에게 목숨을 잃을 때.
준후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무 뒤에 숨어서 그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무림에 출두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임무를 수행하던 동료가 죽어 나가는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준후는 피나는 수련을 해왔다.
그때의 성격이 굳어서 현대에서는 외과의를 목표로 삼았고.
미친 듯이 의학지식을 쌓으며.
무공과 의학을 접목하기 위해 기를 썼다.
자신의 뿌리에 무력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준후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네가 봤을 때 준후,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
“그러니까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말고 때로는 여유를 가지고 푹 쉬었으면 좋겠어.”
“…….”
“이건 너무 오지랖 부리는 것 같은 말이었나? 미안.”
“미안하긴. 오히려 고맙다. 덕분에 깨달은 게 있어.”
준후는 명훈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스스로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인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남은 시간만큼은 의학 공부가 아닌 여유로운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일단 같이 일하는 명훈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
의대 동기긴 했지만 준후는 명훈을 잘 알지 못했다.
어울리는 친구들이 달랐으니까.
“명훈아, MBTI 해봤어?”
“오올~ 준후 네가 MBTI도 알아?”
“오늘 배웠지.”
준후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준후의 분석에 따르면 MBTI는 그 자체보다 MBTI를 통해 자신의 성격과 취향을 서로에게 드러내고 알아가는 과정이 더 유익했다.
MBTI를 화제 삼으면 명훈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나는 INFP더라고.”
“INFP면 열정적인 중재자였나?”
“맞아. 그래서 너한테 오지랖을 부렸던 거야.”
명훈이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과연 MBTI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준후는 명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명훈이 낮에 ABGA 채혈을 하는데 왜 그렇게 애를 먹었는지도.
명훈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걸 좋아했지만 정작 자신이 힘들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어려워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앞으로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맡겨. 오늘 상담료 대신으로 해결해 줄 테니까.”
“그럼 너도 힘들 텐데…….”
“너를 도와야 내가 무력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방금 대화 잊었어?”
“…….”
“이런 게 바로 윈윈이란 말이지.”
“휴우~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할게.”
훈훈한 대화는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24시간 근무에 지친 명훈은 곧 잠 들었고.
체력이 쌩쌩했던 준후는 침대에 누워 침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의학 공부를 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참기로 했다.
으…… 그래도 너무 심심한데.
답답함을 느끼던 준후는 휴대폰으로 너플릭스에 접속했다.
회원 가입과 결제를 마치고 볼거리를 찾았다.
한참을 헤매다가 찾은 콘텐츠는 다름 아닌 무협이었다.
의협도룡기 2019.
무림을 경험해서 그런지 무협 드라마에 정감이 갔다.
즐기면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렇게 반신반의하면서 시청한 의협도룡기는 재미있었다.
-그릇은 무릇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는 법이지. 그릇이 비어 있어야만 그 안에 무언가를 담지 않겠는가.
-…….
-가득 찬 그릇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네.
극 중 대사를 듣고 준후는 크게 깨우쳤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오늘만 해도 의학 공부를 하지 않은 덕분에.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명훈과 친분을 쌓고.
무림에서의 좋은 기억들과 나쁜 기억들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정말 마음부터 비워야 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