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50화
제8장 응급의학과(12)
새벽 4시 30분, 숙직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준후가 눈을 떴다.
30분가량의 운기조식을 마친 준후의 표정은 개운했다.
마치 대여섯 시간은 잔 사람처럼.
무림에서의 경험을 기억한 이후부터 준후는 잠을 잊었다.
일과 중 짬짬이 운기조식을 했으며.
잠이 필요한 시간에는 운기조식을 했다.
하루 중 운기조식을 운용하는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였는데.
그 정도만 해도 준후는 일상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지금의 준후를 만들어준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운기조식이었다.
“명훈아, 일어나.”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침대로 다가갔다.
꿈나라에 빠진 명훈을 깨웠다.
“으으음…… 좀만 더 잘 게. 5시에 일어나면 되잖아. 피곤해 죽을 것 같아.”
“안 돼. 투정부리지 말고 일어나.”
준후는 명훈을 억지로 깨웠다.
비몽사몽인 명훈에게 새벽녘 편의점에서 구입한 샌드위치를 건네고 자신도 샌드위치를 먹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아침을 챙겨 먹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준후는 아니었다.
아침은 꼭 먹어야 한다는 부류였다.
사람이 쓰는 에너지란 무릇 먹는 음식에서 나오기 마련 아닌가.
그러니 아침에 기운을 내려면.
아침 식사를 해야 했다.
아침 식사를 꼭 챙겨 먹는 습관은 무림에서 생겼는데.
아침 식사를 안 하면 정오쯤에 꼭 힘쓸 일이 생기는 징크스도 있었다.
“히잉.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좋은데.”
명훈이 투정부리듯 말하며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5시에 근무 시작이라고 5시에 일어나면 안 되지. 그러다가 트집 잡힐라.”
“뭐, 그렇긴 한데…… 그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과연 성민 선배가 그럴까?”
준후가 냉소적으로 웃었다.
레지던트 1년 차 성민.
어제 경험했지만 성민은 정치질에 능숙하고 후배들을 태우는데 특화된 인물이었다.
꼬투리 잡힐 일은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먼저 씻을게.”
준후는 숙직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근무가 워낙 고된 터라.
인턴들은 행색이 남루하고 꾀죄죄한 경우가 많았지만.
준후는 특히 위생과 용모에 신경을 썼다. 환자에게 신뢰감을 주고 싶어서였다.
식사와 세면을 마치고 준후는 명훈과 응급실을 찾았다.
현재 시각은 오전 4시 50분.
나이트 근무 중이던 레지던트들과 잡담을 나누고 일과를 시작했다.
회의록을 작성하고.
회의실 청소를 하고.
응급실에 입원 중인 환자들에게 루틴도 실시했다.
심전도 검사, ABGA 채혈, 드레싱 등등.
응급실 근무 2일 차임에도 준후는 벌써 업무에 능숙해졌다.
무림에서 제법 사회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무림맹과 세가 등등, 사회생활이 익숙하고 친근했다.
인턴에게 요구되는 다양한 술기와 처치는 무공을 익혔던 솜씨로 해결할 수 있었고.
준후는 할 일을 마치고 침상을 훑었다.
때마침 3구역에는 있는 명훈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ABGA 채혈 때문에 잔뜩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채혈할 환자가 우락부락했으며 목과 가슴에 살벌한 문신이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해봐.”
“실패하면 날 잡아먹을 것 같은데?”
명훈이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못 한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일도 못 하게 돼. 널 믿고 해봐. 내가 도와줄게.”
준후는 명훈이 ABGA 채혈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언했다.
“주사기를 좀 더 편하게 잡아. 지금 되게 불편해 보여.”
“…….”
“그렇지. 지금이 딱 좋다. 주삿바늘은 조금 더 눕히고. 조금 더. 오케이.”
준후의 조언을 받은 명훈은 단번에 ABGA를 성공했다.
채혈에 성공한 명훈이 아이처럼 기뻐했다.
“와, 대박! 나 한 번에 성공한 거 이번이 처음이야.”
“거봐, 하려면 잘할 수 있잖아.”
“고맙다. 진짜!”
명훈의 감사 인사에 준후는 멋쩍게 웃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어쨌거나 명훈이 자신감을 얻어서 참 다행이었다.
동기가 시무룩하고 쳐져 있는 모습은 준후도 보고 싶지 않았다.
준후는 루틴 업무를 끝내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오전 근무 레지던트들이 출근해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인물이라면 단연 1년 차 성민과 3년 차 소진이었다.
한 명은 악연이었고.
한 명은 인연이었다.
“서준후.”
인수인계 시작 전, 성민이 준후를 콕 찍어서 불렀다.
“네. 선배.”
“쉬는 동안 눈치는 잘 챙겨왔냐? 앞으로는 그 잘난 머리로 눈치도 좀 챙겨라. 알았지?”
성민의 말은 농담 같았지만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아무래도 이틀 전.
준후가 작성한 회의록을 자신이 작성한 것처럼 꿀꺽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앙금으로 남았던 모양이었다.
도둑놈이 성질부리는 상황이 준후는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어딜 가나 저런 얍삽한 부류는 꼭 있다니까?
무림에서도 그랬는데 말이다.
“챙긴다고 챙겼는데 제대로 챙겼는지는 모르겠네요.”
“뭐? 제대로 챙겼는지 모르겠다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이 새끼, 아침부터 나랑 농담 따먹기 하네?”
성민이 가소롭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지만 준후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잡담 그만하고 회의 시작하자.”
때 마침 소진이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했다.
인수인계와 함께 응급의학과에서의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 * *
“서준후.”
“서준후.”
“서준후.”
성민은 틈만 나면 준후를 불러댔다.
준후를 호출해서 자신이 진료해야 할 환자를 준후가 보게 만들었다.
명목은 교육이었지만 그 속내는 새까맸다.
교육이라면 응당 가르침이 있어야 하는데 성민에게는 가르침이 없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본인 일을 준후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인턴 주제에 레지던트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지.
오늘부터 군기 제대로 잡는다.
준후의 인턴답지 않은 여유로운 태도.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일처리.
무엇보다 2-4년 차가 준후를 예뻐하는 것이 성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준후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랑은 성민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성민은 준후가 기어오르기 전에 짓밟아줄 생각이었다.
학교 후배?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자신의 말을 따르고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성민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계속 굴림을 당하다 보면 준후도 뭔가 깨닫는 바가 있어서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을까 싶었다.
한편 성민의 바람과 달리.
준후는 성민의 괴롭힘을 축복(?)으로 여기고 있었다.
준후가 응급의학과에서 가장 배우고 싶었던 건 처치가 아니라 진료 및 진단이었다.
다른 과 병동으로 이동하면.
환자를 1차 진료할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왜냐고?
입원 환자들은 이미 진료 및 진단, 그리고 진단명까지 받아 입원한다.
따라서 준후가 나설 구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를 성민이 알아서 떠 먹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준후는 환자의 진료 및 진단.
필요한 검사 오더 내리기.
환자에게 필요한 과를 연결시켜주는 교통정리 등등.
응급의학과에서 필요한 경험치를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다.
머저리 성민은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본인이 지금 하는 행동이 준후가 그토록 바라고 있는 것임을.
“윤 선생님, 꼬장이 오늘 따라 유독 심한데…….”
준후가 스테이션에서 차트를 정리하는데 간호사 정윤이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강 쌤, 윤 쌤한테 찍힌 것 같아요.”
정윤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찍히면 뭔가 달라지나요?”
“직접 경험하고 있으면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시도 때도 없이 선생님을 호출하고 있잖아요.”
정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윤의 말에 따르면 성민은 일 잘하는 인턴이 들어오면 무자비하게 부려 먹는다고 했다.
정윤이 지켜보면 바에 따르면.
성민은 일 잘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성격 좋은 제가 참아야죠. 기다리다 보면 한 방 먹일 기회가 찾아올 겁니다.”
“와우, 포부가 대단하시네요.”
“원래 당하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성민 선배가 간호사 선생님들도 못살게 구나요?”
준후가 화제를 돌렸다.
문득 성민이 간호사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궁금해졌다.
“말도 마세요. 나이 많은 선생님한테도 반말을 섞어 쓰고. 자기 기분 나쁘면 윽박도 질러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더니…… 혼 좀 나야겠네요.”
말을 마친 준후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방금 나눈 대화는 비밀로 하자는 제스쳐였다.
준후의 체스처를 읽은 정윤이 피식 웃으며 준후를 따라했다.
정윤이 떠난 후 준후는 환자를 진료 중인 성민을 바라보았다.
성민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준후가 무림에서 지긋지긋하게 상대했던 부류였는데.
이런 부류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윗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리라.
“서준후.”
타이밍 좋게 성민의 호출이 떨어졌다.
준후가 성민의 자리에 도착하자 성민이 눈짓으로 환자를 가리키고 귓속말을 건넸다.
“대기 환자 30명인 거 알지? 적당히 해서 보내라. 시간 질질 끌면서 농땡이 피울 생각 말고.”
성민이 바람처럼 자리를 비웠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이동 방향이 휴게실 쪽이었다.
대기 환자가 30명인데 본인은 농땡이를 치시겠다?
요즘은 대리운전도 앞뒤가 똑같은 시대인데 어쩜 저렇게 말과 행동이 다른지.
준후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안녕하세요. 환자분, 보호자분.”
준후는 환자를 바라보며 살갑게 인사부터 건넸다.
환자는 65세로 이름은 김순례였다. 외견상으로 봤을 때는 응급 환자가 아닌 것 같았다.
환자의 곁에는 딸로 보이는 40대의 여성이 서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며칠 전부터 가슴이 뻐근해서요. 숨도 자주 차고.”
“운동할 때 특히 더 불편하신가요? 아니면 쉬고 계실 때도 불편하신가요?”
“그게 잘 모르겠네요. 운동할 때도 힘든 것 같기도 하고, 쉬고 있을 때도 힘든 것 같기도 하고.”
“저런, 많이 답답하셨겠네요.”
준후는 문진을 통해 환자의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환자는 심장병에 대한 가족력이 없었다.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지병도 없고.
심장과 관련된 수술을 받은 적도 없고.
청진기로 심음과 폐음을 청진해도 특이 사항이 없었다.
최대한 꼼꼼하게 이학적 검사를 실시했으나 준후는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일단 몇 가지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네요. 잠시 후 검사 결과 확인하고 다시 뵙죠.”
준후는 환자를 대기실로 보낸 후 다른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리고 10분 쯤 지난 후 컴퓨터로 환자의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심전도 검사 이상 무.
일반 혈액 검사 및 동맥혈 분석 이상 무.
흉부 엑스레이 이상 무.
준후는 심장과 관련된 질환을 가장 걱정했는데 검사 결과 환자의 심장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환자분. 검사 결과를 확인했는데요.”
환자와 보호자와 다시 마주한 준후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느낌이랄까.
환자에게 흉통이 발생한 원인을 딱 꼬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단순 스트레스 때문일까.
아니면 역류성 식도염?
아까 식도염이나 위염은 없다고 했었는데?
“으으으윽!”
준후가 고민에 빠진 사이.
환자가 신음을 흘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가끔 이렇게 가슴이 아파요. 억울하게 금방 아프고 만다니까요. 계속 아프면 생색이라도 내지.”
환자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가만 보자.
이 정도 흉통이면 심장질환이 맞는 것 같은데…….
초기 심질환인 건가.
심전도와 혈액 검사가 정상이니 혈관 조영술을 찍어보자고 할 수도 없고(그러면 보험 적용이 안 돼서 비싸니까, 과잉진료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궁지에 몰렸던 준후는 곧 내공 혈관 조영술을 떠올렸다.
보험 적용이 필요 없는 검사.
3분 만에 결과가 뚝딱 나오는 검사.
바로 어제 완성한 따끈한 검사.
그 검사를 준후는 직접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반색했던 것도 잠시.
준후는 다시 곤란에 처했다.
공교롭게도 어제 내공 혈관 조영술을 펼친 환자들은 전부 남자였다.
그래서 비교적 거부감 없이 환자의 가슴에 손을 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환자는 여성이었다. 함부로 가슴에 손을 얹을 수가 없었다.
하…….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