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51화
제9장 다음 행선지(1)
환자는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고.
준후는 환자의 등 뒤에 서서 환자의 왼쪽 어깻죽지에 손을 얹고 있었다.
준후가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법.
그것은 환자의 가슴이 아닌 등 쪽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혈관이란 돌고 돌아 어떻게든 연결되기 마련.
그렇다면 등 쪽에서 심혈관 방향으로 내공을 쏘아내는 방법도 유용할 것이다.
제대로 되어야 할 텐데…….
불안함이 없지 않았지만 준후는 물리쳤다.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었다.
일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을 때 대처 방법을 키우는 경험 말이다.
의대 시절 해부학 교수 밑에서 해부학을 공부했으므로.
준후는 방황하는 일 없이 등 쪽 혈관에서 심장 혈관으로 내공을 계속 흘려보냈다.
다만 먼 길을 돌아가는 탓에 내공 소모가 심했을 뿐.
어느새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주변 소음으로부터 집중력을 잃지 않는 일도 힘들었는데 잘못하면 환자와 준후 둘 다 위험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고 고된 검사.
준후만이 펼칠 수 있는 외로운 검사.
왔구나.
내공이 심장혈관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준후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지금부터가 승부처였다.
우(右) 관상동맥.
좌 전하행지.
좌 선회관상동맥.
이 세 곳으로 내공을 흘려보내 혈류의 속도를 확인해야 했다.
내공이 혈관을 통과하는 속도가 빠른 장소가 존재한다면.
그 장소는 동맥경화 등으로 혈관이 좁아진 곳이리라.
준후는 집중력을 날카롭게 벼린 상태에서 관상동맥으로 내공을 침투시켰다.
정상 혈관과 협착 혈관.
이 둘을 분간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던 도중.
준후는 우 관상동맥에서 중간 지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내공이 잠깐 빨라졌다가 느려졌던 것이다.
이 정도면 6할 정도 막혔으려나?
참고로 혈관이 절반가량 막힌다고 해도 환자는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수 있었다.
“휴우. 고생하셨습니다.”
진단을 마친 준후는 환자의 등에서 손을 뗐다.
등 뒤에서 펼친 내공 혈관 조영술에 성공해서 기뻤으나.
환자가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고 귀가했다가 응급실로 올 일은 없을 것 같아서 기뻤지만.
할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환자가 병원에서 혈관 조영술을 받도록 유도해야 했다.
내공 혈관 조영술의 결과는 오직 준후만 알고 있는 것이기에.
“선생님. 저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환자가 순박한 눈동자로 물었다.
“네. 의심 가는 증상이 있어서 다른 검사를 받아보셔야겠습니다. 이 검사를 하면 왜 가슴이 아프셨는지 밝혀낼 수 있을 거예요.”
“서 선생님. 잠깐 이쪽으로 오세요.”
본론을 꺼내려는 찰나, 성민이 준후를 호출했다.
하여간 훼방 놓는 데는 전문가라니까.
준후가 스테이션으로 이동하자 성민이 팔짱을 낀 채 불량한 태도로 물었다.
“야, 저 환자를 아직까지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해?”
“…….”
“차트 보니까 심전도랑 혈액 검사, 흉부 촬영 전부 정상이던데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하고 빨리 보내야지.”
“…….”
“계속 눈치 없이 굴 거야? 내가 분명 환자 밀렸으니까 빨리 보라고 했지?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아니면 엿 먹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냐?”
성민은 간호사와 다른 레지던트들 앞에서 준후에게 핀잔을 주었다.
‘마치 준후가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까 다들 여기 좀 봐라’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머리 좀 쓰셨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시겠다?
하지만 준후는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이 기회에 성민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리라.
“저 환자 흉통은 보통 흉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혈관 조영술 오더 내리려고요.”
“뭐? 혈관 조영술?”
성민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흉통이 있어서 혈관 조영술 오더를 내린다고?”
“…….”
“그럼 두통 환자들은 전부 브레인 CT 찍어야겠네?”
성민이 비아냥거렸고 준후는 속으로 웃었다.
준후는 절대 질 수 없는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왜냐고?
환자의 우 관상동맥이 절반 이상 막혀 있다는 사실을 이미 내공으로 확인했으니까!
“초기 협심증 또는 불안정성 협심증의 경우 검사에서 멀쩡한 경우도 더러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저는 저 환자분이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명의 나셨네. 명의 나셨어. 그걸 인턴인 네가 어떻게 아는데?”
“혈관 조영술을 해보면 알겠죠.”
“만약 조영술을 해봤는데 환자가 정상이면 책임질 수 있어?”
“그만한 책임감도 없이 진료하는 의사가 있습니까?”
준후가 오히려 호기롭게 대꾸했다.
이제는 반격할 차례였다.
성민은 이 기회에 똑바로 깨달아야 했다.
본인이 까불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뼈저린 실책을.
“반대로 조영술 결과에서 환자에게 이상이 있으면 선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 요 당돌한 새끼 보소? 네 말이 맞으면 내가 오늘 하루 널 형이라고 부른다.”
“제가 틀리면 선배 가랑이 밑을 기어가죠.”
“그 약속 꼭 지켜. 저기요, 다들 이야기 잘 들으셨죠?”
성민이 주변 스태프들에게 두 사람 간의 약속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본인의 무덤을 파고 있는지는 까맣게 모른 채.
준후는 환자에게 돌아가 혈관 조영술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런 검사까지 받아야 할 정도인가요? 그 정도로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검사 비용도 비싸지 않을까요?”
환자와 보호자가 우려를 표했다.
“증상도 있고 연세도 있으시니, 이 기회에 받아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
“조영술에서 증상이 발견되면 보험 처리도 되실 거고요.”
준후는 환자와 보호자를 잘 구슬려 동의서를 받고 검사 오더까지 내릴 수 있었다.
그제야 홀가분해지는 마음.
이제 성민에게 형 소리를 듣는 일만 남았나?
* * *
하…… 새끼 짬밥도 안 되는 게 졸라 까부네.
스테이션에서 차트를 정리하던 성민이 진료 중인 준후를 힐끔 훔쳐보았다.
준후가 일을 잘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진료면 진료.
교통정리면 교통정리.
응급실 입원 환자의 처치 등등.
준후는 풋내기 인턴이 아닌 말턴(말년의 인턴)처럼 능숙한 모습을 선보였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인턴은 인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감히 인턴이 레지던트에게 기어오른다고?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지만 성민은 참았다.
곧 청량한 사이다 같은 상황이 찾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태프들 앞에서 가랑이를 기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본인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성민은 시간을 확인하다가 준후가 진료한 환자의 PACS(의료영상저장장치) 자료를 살폈다.
대망의 혈관 조영술 결과를 확인한 결과.
“…….”
성민은 본인의 눈을 의심했다.
환자의 우 관상동맥에 60퍼센트가량의 협착이 존재했던 것이다.
결국 준후의 진단이 맞았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결과에 성민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영상을 살폈다.
끔찍하게도 변하는 건 없었다.
환자의 상태가 심장 내과에 노티되면서.
스텐트 삽입술이 준비 중이라는 문구만 번쩍거릴 뿐.
“선배, 검사 결과 확인하셨죠?”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준후가 성민을 바라보며 씽긋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귀신처럼 섬뜩했다.
“어? 어.”
“환자 흉통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는데 관상동맥 협착증이 있었네요.”
“너 운 좋은 줄 알아. 심전도랑 혈액 검사에서 이상이 없는 관상동맥 협착증 환자는 많지 않다고!”
성민이 항변하듯 말했다.
솔직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았다.
환자의 케이스가 너무 특이했던 탓이었다.
저런 환자는 100명 중에 2-3명이 있을까 말까였다.
“그런 환자들을 가려내는 게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역할 아닐까요?”
“…….”
“그리고 방금 했던 말 중에 큰 오류가 있네요.”
“뭐? 오류?”
“너가 아니라 형이잖아요. 선배가 선배 입으로 말한 거 잊었어요?”
“으으으으.”
성민은 망신살을 느끼며 탄식을 흘렸다.
단 둘이서 내기를 했다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태프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기를 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내기를 무르는 것도 구차해 보였다.
실제로 스테이션에 있는 스태프들은 눈을 빛내며 자신 쪽을 주목하고 있었고.
“사람이 한 번 한 약속은 지켜야지? 안 그래?”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다고.
3년 차 소진이 다가와 성민을 자극했다.
성민은 점점 낭떠러지에 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치욕을 참아내며 형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려했지만 입술 모양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목소리도 꽉 막힌 듯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이 꿈이기를.
지독한 악몽이라서 빨리 깨기를 바랄 뿐.
“혀…… 형.”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성민이 말했다.
순간 와하하 하고 응급실에 웃음이 터졌다. 성민이 근무하면서 응급실에 이만한 웃음이 터진 것은 처음이었다.
하필 그 웃음거리가 자신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니? 선배 진짜 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럼 제가 나쁜 놈이 되잖아요.”
준후가 갑자기 성민을 챙겨주는 척을 했다.
착한 척을 했다.
이 자식 설마 여기까지 다 계산한 건가?
눈치 없는 곰탱이인 줄 알았는데 사실 약삭빠른 여우였어?
“선배가 장난으로 말씀하신 줄 알고 저도 장난을 친 건데…… 죄송합니다.”
“…….”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네요.”
준후는 고개까지 숙여 가며 공손하게 사과를 했다.
마무리가 좋았기에 누구도 준후가 버릇없다고 여기지 않았다.
즉 이번 내기에서 준후는 이익만 챙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X발, 제대로 한 방 먹었네?
크게 충격을 받은 나머지 성민은 한동안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 * *
응급의학과 휴게실.
준후는 3년 차 소진과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너도 진짜 어지간하다.”
소진이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렇게 깡을 부릴 수 있어?”
내공으로 벌써 진단을 마쳤으니까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준후는 환자를 꼼꼼하게 진찰한 덕분이라고 둘러댔다.
“잘했어. 대기 환자 밀리면 초조해져서 눈앞의 환자를 대충 보는 경향이 있는데.”
“…….”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열 명을 대충 보는 것보다 한 명을 제대로 보는 게 더 중요하거든.”
“네. 명심할게요.”
대답을 마치고 준후는 캔 커피를 들이켰다.
실전에서 펼친 내공 혈관 조영술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더불어 꿩 먹고 알 먹는 느낌으로 1년 차 성민의 콧대까지 납작하게 눌러주었다.
준후는 모처럼 성취감과 통쾌함을 동시에 느꼈다.
지금쯤 성민은 모욕감과 치욕감에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겠지.
하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을 준후는 손톱만큼도 느끼지 않았다.
모든 것은 업보였다.
성민이 뿌린 대로 거둔 열매일 따름이었다.
“준후 너 소질 있어 보이는데 응급의학과 전공 안 할래?”
소진이 화제를 돌렸다.
“글쎄요. 저는 외과 말고는 생각한 적이 없어서…….”
“외과가 왜 그렇게 좋은데?”
“제가 직접 싸우는 느낌이 들어서 일 거예요. 질병들과 진검승부 하는 느낌이랄까요.”
무림에서 악인을 베어왔기 때문일까.
준후는 환자들을 괴롭히는 병소들을 직접 베어내고 싶었다.
검 대신 메스로.
수술방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는 듯한 치열함도 좋았다.
“벌써 결심한 눈빛이네.”
“네.”
“아쉽네. 너처럼 똘똘한 애가 레지던트로 들어오면 좋을 텐데.”
소진과의 대화는 10분 정도 이어졌다.
슬슬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
소진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있지. 아주 중요한 일이.”
“그게 뭔데요?”
“오늘 하루 운세를 점치는 일.”
진지한 표정의 소진이 다 마신 캔 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깡!
캔이 쓰레기통 모서리에 맞아 튕겨 나왔다.
“최악이네. 오늘 사건 하나 터질 것 같아. 캔이 모서리를 맞고 나오면 항상 일이 터졌거든.”
소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떨어진 캔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었다.
“징크스 같은 건가 봐요.”
“아주 끔찍한 징크스지. 적중률 80퍼센트가 넘는.”
벌컥!
때마침 동기 명훈이 헐레벌떡 휴게실로 난입했다.
“소진 선배. 빨리 응급실로 오시래요.”
“왜?”
“시내에 연쇄 추돌 사고가 일어났대요. T.A(교통사고) 환자, 전부 우리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는데요?”
명훈이 전한 급박한 소식에 휴게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환자는 몇 명인데? 응급이야?”
“저도 아직 거기까지는 못 들어서…….”
“그럼 됐어.”
소진이 가운을 휘날리며 휴게실을 벗어났고 준후와 명훈이 그 뒤를 따랐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교수까지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