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52화
제9장 다음 행선지(2)
“…….”
“…….”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응급실을 휘감고 있었다.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는데.
누군가는 손바닥에 난 식은땀을 의사 가운으로 훔쳤고.
누군가는 일하는 도중에도 응급실 출입구를 불안하게 응시했다.
그렇게 걱정과 불안은 삽시간에 전염되고 있었다.
“분위기 살벌하지?”
준후의 곁에 서 있던 소진이 준후에게 물었다.
“네. 이런 분위기는 처음 겪어보네요. 응급실에서는.”
준후는 응급실에 흐르는 조마조마한 기운을 살갗으로 느끼며 대답했다.
지금으로부터 10분 전.
응급의학과 교수가 레지던트와 전문의를 모아놓고 간략하게 상황을 전파했다.
음주 운전을 하던 승객이 연쇄추돌 사고를 일으켰다.
피해 차량은 총 4대였고 환자의 수는 총 10명.
인도를 지나가던 애꿎은 보행자까지 사고에 휘말렸다고 했다.
급하게 출동한 119대원들이 CPR 등의 처치를 실시하며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했다.
환자들 대부분이 응급하므로.
교수는 응급의학과 스태프들에게 단단히 각오하라고 일렀다.
3인 1조로 응급 소생팀도 짜주었다.
준후는 소진, 성민과 함께 3조에 속하게 되었다.
“말이 조금 이상하다? 응급실에서라니?”
“사람이 위독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거든요.”
대답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쓰라린 준후였다.
무림에서 준후는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것을 목격했다.
애석하게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에게 준후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사람 살리는 일에는 재주가 없었던 것이다.
100명의 악인은 벨 수 있으나.
소중한 사람 한 명을 살릴 수 없기에 무력함에 치를 떨어야 했고.
그 감정이 응어리로 남아.
현대에서는 외과의가 되기로 마음먹은 준후였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함을 유지해. 응급 환자 볼 때는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네. 선배.”
“윤성민, 너도 어리바리 타지 말고 준후 앞에서 선배 노릇 제대로 하고.”
“알겠습니다.”
소진의 이야기를 들은 성민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잠시 후 사이렌 소리가 줄지어 들려왔다.
마침내 다가온 결전의 순간.
스태프들의 눈빛이 일제히 비장해졌다.
“진료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진료 보고 콜 할 때만 지원하러 와. 소생팀은 분류실 앞으로.”
응급의학과 교수가 앞장서서 분류실로 향했고 그 뒤를 소생팀 조원들이 뒤따랐다.
준후는 가볍게 볼을 두드리며 대열에 합류했다.
더 이상 누구의 죽음도 무력하게 지켜보지 않아.
아니 누구도 죽게 하지 않겠어.
준후는 걸음을 재촉하며 대열에 합류했다.
* * *
위이이잉.
위이이잉.
요란한 사이렌 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꼭 환자를 살려달라고 앰뷸런스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드르르륵.
구급차 트렁크가 열리고 환자가 누운 스트레쳐 카가 일제히 지상에 착지했다.
비록 먼발치였지만 준후는 환자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대부분 의식이 없었고.
머리나 팔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관절이 기괴할 정도로 뒤틀린 환자도 존재했다.
CPR을 계속 진행 중인 환자도 무려 3명이나 있었다.
준후와 조금 떨어져 있던 명훈은 그 광경을 보고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준후는 아니었다.
오히려 환자들을 집중해서 살폈다.
환자의 고통과 아픔, 상처를 외면해서는 환자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1-2년 차랑 인턴은 구급대원들 도와서 환자 응급실로 보내.”
“네.”
교수의 지시에 준후는 다른 스태프와 함께 구급차를 향해 달렸다.
남다른 피지컬을 선보이며.
스트레쳐 카를 응급실로 운반하고 또 환자를 응급실 침상에 눕혔다.
환자를 스트레쳐 카에서 침상으로 이동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완력이 필요해서였고.
이동 과정에 환자가 다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준후는 매번 환자를 번쩍 침상으로 옮겼다.
그것도 혼자서.
그런 준후를 보고 몇몇 구급대원들은 아연질색하기도 했다.
“잘 듣고 이동해. 1조는 1구역 이태원 환자, 2조는 1구역 김성환 환자, 3조는 1구역 고정환 환자. 4조는…….”
3조가 1구역에 배당된 순간, 성민이 인상을 확 구겼다.
‘X발. 재수도 없네’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응급실 1구역은 당장 생명이 꺼져가는 초응급 환자를 다루는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구시렁거리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소진이 박력 있게 성민의 가운을 끌고 병상으로 이동했다.
준후는 그보다 한 걸음 빨리 병상에 도착했다.
3조가 맡은 남자 환자는 3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외상의 흔적은 뚜렷하지 않았으나 얼굴에 핏기가 없어 창백했다.
구급대원들이 한참 환자에게 CPR을 실시하는 중이었는데.
말 그대로 숨넘어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대원님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교대하시죠. 성민 선배, 기관 삽관하고 인공호흡기 연결해 주세요. 전 흉부압박 할게요.”
“말 안 해도 준비 중이거든?”
“나는 환자 감시 장치부터 연결한다.”
퍽! 퍽! 퍽!
준후는 환자의 가슴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 흉부압박에 나섰다.
준후가 힘을 주어 압박할 때마다.
환자의 육신이 육지에 올라온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됩니다.
기운을 내세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염원을 담은 준후의 흉부압박은 무려 4분 동안 꾸준하게 이어졌다.
보통이라면 체력 저하로 1분마다 교대가 필요했지만 준후는 혼자 할 수 있음을 호소했다.
실제로 준후의 흉부압박은 맨 처음 실시했을 때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두 팔은 직각으로 뻗어 있었고.
리듬감과 압력도 여전했다.
준후의 육신은 이미 초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흉부 압박 정도로는 지치고 싶어도 지칠 수가 없었다.
체력의 부담이 없었기에.
준후는 흉부 압박을 하면서도 처치 상황까지 냉정하게 살폈다.
성민은 기관 삽관을 끝내고 튜브에 산소 호흡기를 연결하고 있었다.
또 동맥혈에 수액 라인을 확보 중이었다.
소진은 환자 감시 장치를 환자에게 부착한 뒤 바이탈 사인과 심전도를 살피는 중이었다.
세 사람의 팀 웍은 꽤 좋은 편이었다.
이대로만 가도 괜찮겠어.
준후는 속으로 안심했다.
“준후야, 괜찮아? 교대 안 해도 되겠어? 벌써 5분 넘게 압박 중인데?”
소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후에게 물었다.
“저는 멀쩡해요. 그보다 다른 처치에 집중해 주세요.”
준후는 일부러 흉부압박을 고집했다.
흉부압박을 제외한 처지는 소진과 성민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편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은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라서 다른 소생술에 일가견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네가 버텨주면 든든하지. 대신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선배.”
“성민아, 제세동기 준비해. 이 선생님. 여기 에피네프린 3앰플만 재주세요.”
소진이 조원들을 야무지게 컨트롤 하며 오더를 내렸다.
그 모습이 듬직했다.
“100J 차지. 비켜.”
성민의 외침에 준후는 흉부압박을 멈추고 침상과 멀어졌다.
그러자 성민이 젤을 바른 제세동기의 패들을 각각 환자의 오른쪽 빗장뼈 아래와 좌측 가슴 아래에 대고 제세동을 실시했다.
“100J 클리어!”
전기 충격이 발생하자 환자의 몸이 바르르 떨리며 들썩거렸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보통 이 정도면 심장 리듬이 회복됐어야 하는데.
제세동을 지켜보던 준후는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다.
환자의 회복이 더뎌도 너무 더뎠던 것이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싶어서.
준후는 다시 한번 환자를 자세히 살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 치고는.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것치고는 환자의 외견이 너무 멀쩡했다.
장기나 심장, 뇌 쪽에 출혈이 있는 걸까.
아니면 골절이 발생하면서 신경에 손상이라도?
아직 검사를 실시하지 못했기에.
의증(의심 가는 질환)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
준후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기 바빴다.
“준후는 다시 흉부압박하고 성민이는 제세동 준비.”
오더를 내린 소진이 간호사가 가져온 에피네프린을 환자의 혈관에 투입했다.
그때까지도 환자는 이승보다 저승에 가까웠다.
의식은 고장 난 퓨즈처럼 꺼져 있었고.
심전도 그래프는 넙죽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마치 세 사람의 처치가 아무 소용없다고 비웃듯이.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안 되면 될 때까지 한다.
환자가 죽는 걸 보기 위해서 의사가 된 게 아니잖아?
퍽! 퍽! 퍽!
준후는 다시 흉부 압박에 나섰다.
겉보기에는 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이전의 흉부압박과 지금의 흉부압박은 차원이 달랐다.
준후는 즉흥적으로 흉부압박을 하면서 환자의 심장에 내공을 쏘아내고 있었다.
내공은 변화무쌍한 형태로 이용 가능한 에너지인데.
준후는 내공을 원기 회복 용도로 사용하는 중이었다.
멈춰 버린 심장의 기능에 원기를 불어넣는 용도로 말이다.
이것이 지금 준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필사의 처치였다.
환자만 살릴 수 있다면 준후는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결론적으로 내공을 활용한 흉부압박은 효과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제세동 충격.
환자의 심박을 살리기 위한 에피네프린 투여.
거기에 내공 흉부압박까지.
이 세 가지가 시너지를 일으킨 덕분에 환자의 심장 리듬은 5분 만에 상당 부분 회복되었다.
적어도 흉부압박과 제세동은 필요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태업 중이던 심전도 그래프가 상·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명의 약동이었다.
그제야 진땀을 흘리던 세 사람이 안심했다.
“겨우 한고비는 넘긴 것 같네. 준후야, 고생 많았다.”
소진이 빙긋 웃으며 준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체력이 강철이니? 어떻게 흉부 압박을 10분 넘게 해?”
“체력이야 타고났거든요.”
준후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성민이 너도 잘했어. 1년 차 자존심은 세웠네. 제세동도 잘 썼고 기관 삽관도 한 번에 성공했고.”
“저도 나름 1년 차 에이스 아닙니까?”
성민이 너스레를 떨었다.
“3조! 처치 끝났으면 사람 한 명만 이쪽으로 보내주세요!”
다른 병상 쪽에서 다급하게 구조요청이 들어왔다.
소진은 본인이 가보겠다고 했다.
준후와 성민에게 환자를 킵(keep, 환자를 지켜보는 일)하면서 검사나 다른 오더를 내리라고 말하곤 자리를 떠났다.
“간만에 심장이 쫄깃쫄깃했네. 적어도 우리가 처치한 환자는 무사해서 다행이다.”
“…….”
“직접 처치했던 환자가 사망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우울하단 말이지.”
성민은 후련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준후를 응시했다.
환자의 심장 리듬이 회복 중임에도 준후는 아까부터 무표정이었다.
전혀 기뻐하는 내색이 없었다.
응급실에서 사람을 살려본 것은 처음이라 나름 뿌듯해해야 정상인데 말이다.
“야!”
“…….”
“야! 내 말 씹냐?”
성민이 준후의 어깨를 툭 건드렸을 때야 준후가 잠에서 깬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환자도 잘살려 놨는데 왜 멍 때리고 있어?”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이 와중에 무슨 생각?”
“환자의 혈압과 맥박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요. 심전도 그래프도 갑자기 변하고 있고요.”
“…….”
“아까부터 의문이었거든요. 외상 흔적이 전혀 없는데 환자는 왜 의식을 잃었고 심폐소생술까지 받았어야 했는지.”
준후의 지적을 듣고서야 성민도 위화감을 느꼈다.
좀 전까지야 환자가 위독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만 지금은 달랐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지 않은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환자가 왜 이리 위독했는지.
여유를 되찾자 준후의 질문이 성민의 폐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보면 돼. 안 그래도 검사 오더 내릴 작정이었어.”
“검사보다 처치가 우선 같아요.”
“왜?”
“심전도를 다시 한번 보세요.”
성민은 심전도를 꼼꼼히 살피다가 경악했다.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오르고 팔뚝에는 소름이 돋았다.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한 심전도가 기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 심전도가 가리키는 응급 질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