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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54화 (54/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54화

제9장 다음 행선지(4)

다음 날 오전 6시.

준후는 명훈과 회의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어휴, 어제는 진짜 정신없었다. 그치?”

명훈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명훈의 말대로 어제 근무는 무척 고되었다.

오전 느지막한 시간에 자동차 연쇄추돌 사건으로 응급 환자가 응급실로 쏟아졌다.

그 환자를 처치하고 관리하는 데만 해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일복이 터졌는지 응급실 방문자 또한 평소보다 2배가량 많았다.

그 탓에 스태프들의 탄식과 곡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난 나름 괜찮았던 것 같은데?”

“어제가 괜찮다고? 농담이지?”

“진담인데?”

준후는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의사에게 환자란 경험치였다.

많은 환자를 볼수록 많은 경험치를 얻으며 더 솜씨 있는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사고방식 때문일까.

준후는 명훈과 달리 앞으로의 근무도 어제처럼 힘들기를 바랐다.

덕분에 응급 환자를 진료하고.

심지어 심낭천자까지 실시해 봤으니까.

스스로가 강해지고 있다는 감각을 준후는 사랑했다.

“아 참. 아까 소진 선배랑 무슨 이야기했어?”

명훈이 화제를 돌렸다.

회의실 청소 전 준후가 3년 차 소진과 따로 이야기하던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아. 그거? 심낭천자 때문에.”

“엥? 갑자기 웬 심낭천자?”

“어제 우리 조에서 맡았던 환자한테 심낭압전이 있었거든. 여차저차 하다가 내가 직접 심낭천자했다.”

“와. 그거 대형사고 아니야? 흉부외과 콜 안 했어?”

“콜은 했는데 늦게 내려온다고 해서. 다행히 소형사고로 끝났다. 한 번에 성공했거든.”

준후는 머쓱한 표정으로 속사정을 풀어냈다.

컨퍼런스 시작 전.

준후는 일부러 소진을 찾아갔다.

준후가 아무리 처치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준후가 초인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몰랐다.

응급 상황이라고 한들 인턴이 심낭천자를 했던 전례도 없었고 말이다.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기에.

준후는 먼저 소진에게 심낭천자 사실을 고백했다.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너무 무모했어.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면 안 돼. 인턴 업무는 첫째도 노티, 둘째도 노티, 셋째도 노티부터 시작하는 거야.

-네. 선배.

-근데 성민이는 보고만 있었어?

-처음에는 기다리자고 하다가 제가 하겠다니까 돕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녀석도 문제네. 성민이랑도 잘 말해볼 테니까 심낭천자는 내가 한 걸로 하자. 그래야 둘 다 별 탈 없이 넘어갈 거야.

-감사합니다. 선배.

소진이 나서준다고 했으니.

아마 이번 사건으로 준후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준후 너는 심장이 두 개는 되나 보다. 나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환자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번 일은 너만 알고 있어. 소문내면 안 된다?”

“걱정 붙들어 매셔.”

명훈이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INFP다운 넉살이랄까.

준후는 청소를 마치고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오전 컨퍼런스 시간이 되었다.

* * *

레지던트와 펠로우, 교수와 과장이 회의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회의에 첫 번째 시간인 입원 환자 보고는 평소보다 30분가량 더 소모되었다.

어제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 환자가 들이닥쳤고.

내원 환자도 평소보다 많아서였다.

그래도 참 다행이었지.

준후는 치프의 입원 환자 노티를 들으며 속으로 안심했다.

놀랍게도 말이다.

어제 실려 온 교통사고 환자 중 목숨을 잃은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환자가 숨넘어가는 상황.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

부러진 뼈가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온 상황 등등.

각종 끔찍한 상황에서도.

응급의학과 스태프들은 환자를 소생시켜 기어이 수술실로 올려보냈다.

스태프들의 노고는 치하할 만했다.

덤으로 준후의 심낭천자도 소진이 봉합해 준 덕분에 소진이 처치했던 것으로 무사히 넘어갔고 말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그것뿐인가.

“서 선생님. 단상으로 올라와서 케이스 스터디 발표하세요.”

공식적인 회의 중이라서 치프가 준후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어.

인턴 평가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케이스 스터디가.

발표의 완성도에 따라 준후는 C턴이 될 수도, B턴이 될 수도, A턴이 될 수도 있었다.

준후는 단상에 서서 준비한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발표 주제는 ‘응급실을 방문한 기흉 환자의 진단’이었다.

준후는 준비한 자료를 발표하자 교수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아무런 외상도 없는 30대 여성에게 기흉이 발생했다면 그 이유는 뭐일 것 같아요?”

교수 중 한 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월경성 기흉이라고 생각합니다.”

“월경성 기흉의 발병 원인은 뭐죠?”

“생리 기간 중 자궁 안쪽에 있어야 하는 자궁 내막세포가 폐에 달라붙어서입니다.”

준후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완벽하게 해치운다.

그것이 준후의 좌우명 중 하나였다.

오늘 케이스 스터디만 해도 그랬는데 준후는 교재는 물론이요, 기흉에 관련된 다양한 논문을 30개도 넘게 독파했다.

즉 기흉은 준후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키가 크고 마른 남성에게 기흉이 잘 발생하는 이유는요?”

“키가 크면 폐의 길이가 같이 길어져서 폐의 압력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부풀어 오른 풍선이 잘 터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수들이 집요하면서도 끈질기게 질문을 퍼부었지만 준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척척 대답했다.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순간만큼은 준후가 회의실의 주인공이었다.

“서 선생. 스터디 준비 잘 했네. 다른 인턴들하고 레지던트들도 좀 본받아요.”

준후가 자리로 돌아가는 도중 과장 진곤이 준후를 치켜세웠다.

무뚝뚝한 진곤이 스태프를, 그것도 인턴을 칭찬하는 일은 지극히 드문 경우였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리고 서 선생은 회진 끝나면 회의실에 남아요.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진곤의 호출 소식에 준후는 좀처럼 회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과장이 인턴하고 일대일 면담하는 경우가 있나?

과연 진곤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 * *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했고 오늘 못 쉰 건 다음에 챙겨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드르르륵.

준후는 회의실 문을 닫은 후 복도를 걸었다.

예상과 달리 진곤의 호출 내용은 싱거웠다.

-오늘은 우리 병원 홍보 포스터와 홍보 영상을 촬영하는 날이야. 응급의학과에서도 한 명을 보내달라는데.

-…….

-내가 보기엔 준후, 네가 적임자 같아서 말이지.

진곤이 준후가 선택받은 이유를 덧붙였는데 준후의 마스크(?)가 좋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문득 창가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준후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의술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외모였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한 것도 이 곱상한 외모 탓이 아니던가.

일진의 여자 친구가 준후의 외모를 칭찬했고.

거기에 질투와 시기를 느낀 일진이 준후를 괴롭혔으니까.

그런데 잘생긴 외모는 뜻밖의 진료에도 도움이 되었다.

준후를 마주한 환자들이 준후에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유대 관계를 ‘라포’라고 부르는데.

준후는 외모 덕분에 기본 라포를 깔고 들어가는 편이었다.

준후가 꼬치꼬치 문진을 해도.

환자들은 성가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꼼꼼하다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편이었다.

복도를 지나 준후는 응급실에 들어섰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4구역에 위치한 한 환자에게 머물렀다.

서용진.

준후가 심낭천자를 했던 환자였다.

환자는 어제 오후 3시쯤 해서 의식을 차렸고 흉부외과 진료도 보았다.

제때 응급처치 및 치료가 이루어져서 환자는 건강해 보였다.

덕분에 오늘 오후 퇴원 예정이었다.

용진이 어머니로 보이는 보호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준후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자신이 고생한 것을 용진이 몰라 줘도 상관없었다.

용진이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준후에게는 커다란 보상이었다.

이제는 나는 의사야.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지 않아도 돼.

내 손으로 사람들을 살릴 수 있어.

준후는 의술을 택한 스스로에게 만족했다. 설령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결심은 바뀌지 않으리라.

“바깥바람 쐬면서 커피나 한잔할까?”

“좋지.”

응급실에서 잡무를 보고 있던 명훈을 데리고 준후는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오늘은 오프 날이었으니까.

그런데 응급실 원무과 쪽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진료비 수납을 하셔야 처방 약도 받고 다음 진료 예약도 할 수 있어요.”

“나도 그건 아는데. 돈이 모자라서…….”

“아드님이나 따님에게 연락은 안 되세요? 아니면 지인분에게 송금을 부탁해 보세요.”

“아들은 하나뿐인데 죽었고 딱히 친한 사람도 없는데…….”

준후는 걸음을 멈추고 원무과 쪽을 쳐다보았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과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원무과 앞에 서 있었다.

안타까운 대화 내용.

어머니와 딸 조합이 아닌 할머니와 손녀 조합이라는 것.

옹색해 보이는 옷차림에서 준후는 두 사람에게 말 못 할 사연이 있음을 감지했다.

“야, 설마 저 사람들 도와주려고?”

앞서가던 명훈도 걸음을 멈추고 원무과를 바라보았다.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좋은 일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사연 없이 병원에 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

“저런 환자들 일일이 신경 쓰면 네가 못 버텨.”

명훈이 의외로 냉정하게 이야기를 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병원을 찾는 환자의 사연에 일일이 공감하고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들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하지만 준후는 곤란에 빠진 사람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준후도 알게 모르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성장하지 않았던가.

가까이는 부모님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선생님, 교수님들이 있었고.

무림에서는 은거 기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다른 사람에게 받은 도움을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싶은 준후였다.

“먼저 나가 있어. 금방 따라갈게.”

준후는 명훈을 먼저 야외 휴게실로 보내고 원무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님. 이 환자분 진료비가 얼마나 나왔죠?”

“24만 원입니다.”

“이 카드로 결제해 주세요.”

준후는 선뜻 원무과 창구로 자신의 카드를 꺼내서 내밀었다.

“선생님이 계산하시게요? 아는 분이세요?”

준후의 결정에 원무과 직원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오늘부터 알아가면 되죠, 뭐.”

준후는 너스레를 떨며 노인과 눈을 마주쳤다.

노인도 이 상황이 얼떨떨한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진료비가 비싸서 많이 놀라셨죠? 동네에서는 진료비가 만원을 넘는 경우도 별로 없는데.”

“아, 네. 근데 선생님. 왜 제 진료비를…….”

“뭔가 딱한 사정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불쾌하기는요. 고맙고 죄송스럽죠. 선생님 번호 좀 알려주세요. 여유가 생기는 대로 갚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그 돈으로 손녀분하고 맛있는 거 사드세요.”

준후는 한사코 노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노인이 완강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연락처를 교환했다.

“친구는 이름이 뭐니?”

“해나요. 이해나.”

해나가 고개를 숙인 채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몇 살이야?”

“9살이요.”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씩씩하게 지내야 한다. 알았지?”

준후가 해나에게 용돈을 내밀었지만 해나는 받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다.

“어르신, 저희가 남인가요?”

“우리가 어떻게 남인가요. 선생님은 제 은인인데.”

“할머니 말 들었지? 우리는 남이 아니야. 자, 받아.”

준후는 반강제로 해나에게 돈을 쥐어 주었다. 그제야 해나가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을 돕고 나서야 준후는 후련하게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준후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없고.

세상 모든 사람을 도울 수도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곤란한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곤란한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

그 행동만으로도 준후는 충분히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좋은 일하고 나니까 이제 좀 마음이 편하니?”

야외 휴게실에 도착하자 명훈이 캔 커피를 내밀었다.

“맞아. 이제 좀 살 것 같아.”

“진료비는 얼마나 나왔는데?”

“24만 원.”

“으악! 우리 월급에 거의 7퍼센트네? 그리고 치킨만 12마리다.”

명훈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돈으로 환자가 건강을 회복했으면 아까운 돈도 아니지.”

“물론 아까운 돈이 아닐 수도 있지. 내가 아픈 곳을 치료하는 데 썼으면.”

“나 돈 좀 있어. 저번에 응급실 들이닥친 조폭 건으로 포상금 받을 것도 있고.”

준후는 바깥바람을 쐬며 명훈과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병원 홍보 영상 촬영은 오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명훈과 20분 정도 잡담을 나누는데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보폭이 좁은 걸 보면 어린아이 같은데?

누구지?

호기심에 고개를 돌리니 해나가 서 있었다.

“응? 집에 안 갔니?”

“네. 선생님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해나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준후에게 내밀었다.

그림이었다.

스케치북에 색연필로 투박하게 의사를 그린 그림.

그림 속의 인물은 의사였는데 아마 준후를 형상화한 것 같았다.

또 그림 속 의사의 양옆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건 천사를 상징하는 건가?

“선생님. 감사합니다. 용돈 잘 쓰고 할머니 말도 잘 들을게요.”

준후에게 그림을 내밀고 해나가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준후는 멀어지는 해나를 한 번 쳐다보고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도움받은 것을 보답하고 싶다는 해나의 갸륵한 마음이 느껴져서.

“야, 넌 이런 거 없지?”

준후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명훈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해나가 선물한 그림.

이 그림은 오늘부터 준후의 보물 1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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