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 쓰는 외과 의사 55화
제9장 다음 행선지(5)
로비 중앙에 한 무리의 스태프들이 모여 있었다.
각 부서에서 뽑힌 사람들은 그 복장과 역할도 가지각색이었다.
의사 가운을 걸친 의사.
간호사복을 입은 간호사.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 원무과 직원.
경찰복과 비슷한 복장을 입은 가드 등등.
준후는 모여 있는 사람을 훑으면서 새삼 깨달았다.
병원은 단지 의사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님을. 수많은 역할을 맡고 있는 수많은 사람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어? 준후야.”
준후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사람은 바로 아영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의대 동기.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갑다. 난 네가 귀찮다고 안 나올 줄 알았어.”
“인턴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겠어. 심지어 과장님이 시킨 일인데.”
준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준후는 병원 홍보 영상 촬영에 참여하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일단 오프 시간이 줄어들고.
의학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급의학과 업무는 어때?”
“아주 만족 중.”
“만족 중? 힘들지 않아? 응급 환자도 많이 보고 처치도 많아서 힘들 텐데?”
아영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사서 고생하는 걸 좋아하잖아. 호흡기 내과는 어때?”
“호흡기 내과도 괜찮아. 레지던트들 선생님들이 다 친절하더라.”
준후는 아영과 각자 근무 중인 과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각 과의 분위기.
레지던트들과 병동 간호사들의 성향.
예의 바르거나 또는 진상인 환자와 보호자 등등.
산더미처럼 쌓인 인턴 잡 등등.
고작 며칠 만에 대화를 나누는 것인데도 할 말은 넘쳐났다.
병원은 그만큼 사건사고가 많고 드라마틱한 곳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건 뭐야?”
“아? 이거? 내 보물 1호.”
아영의 질문에 준후는 가운 속주머니에 넣어 둔 그림을 꺼냈다.
아까 전 해나에게 받은 그림이었는데 그림은 어느새 코팅이 되어 있었다.
촬영 집합 전.
준후는 원내 문구점을 방문해서 코팅을 부탁했다.
보물 1호가 구겨지는 것이 싫어서였다.
“좋은 일 했네. 나라도 준후, 너랑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아.”
준후가 그림을 보여주며 사연을 들려주자 아영이 대답했다.
확실히 성향에 따라 사람의 행동 방식에 차이가 있긴 했다.
명훈은 준후와 의견이 달랐고 아영은 준후와 의견이 같았으니.
아영과 잡담을 나누는 사이.
촬영 스태프들이 속속들이 로비에 도착했다.
반사판, 카메라, 마이크 등등.
촬영 장비를 갖춘 사람들 대략 20명 정도가 스태프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을 맡은 푸사 스튜디어의 촬영 감독 박국진이라고 합니다.”
국진은 체구가 왜소하고 얼굴도 작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꾀돌이 같은 인상을 풍겼다.
“지금부터 간단하게 촬영 일정을 설명드릴게요.”
“…….”
“일단 로비에서 20초짜리 숏 영상을 하나 찍을 거고요. 그다음은……”
국진이 설명을 마치고 스태프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치였다.
“거기 두 분, 이쪽으로 와보실래요?”
국진이 지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준후와 아영이었다.
“저희 둘이요?”
“네. 두 분을 메인 모델로 쓰면 그림 좀 나오겠네요. 영(young)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이 좋아요. 빨리 나와 보세요.”
준후와 아영이 재촉에 못 이겨 국진과 마주했다.
잠깐 얼굴만 비출 생각이었는데 메인 모델이라니…….
얼떨떨한 건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원고도 읽어보세요.”
국진이 준후에게 먼저 원고를 내밀었다.
“신원대학교 병원은 100년간 우리나라의 의학발전을 이끌어 온 국립병원입니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진료 시스템. 쾌적한 환경. 환자 중심의…….”
“그만하면 됐어요.”
국진이 감탄했다는 듯 준후를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외모야 타고났다고 치고 발성은 왜 이렇게 좋아요? 혹시 아이돌 지망생이었어요? 아니면 성우 지망생?”
“둘 다 아닙니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네요.”
준후는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
준후의 목소리가 좋았던 이유.
그것은 당연하게도 무림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무림에는 음공이라는 무공이 존재했다.
말 그대로 음(音)을 조절하는 무공인데 준후도 잠깐 음공을 익혔다.
아군의 사기를 북돋거나.
사자후로 아군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거나.
메시지의 강약 또는 감정의 강약을 목소리에 담는 수준은 가능했다.
“가운 입은 거 보니까 의사 선생님이죠?”
“네.”
“아깝네. 배우 했으면 완전 대박 났을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꿔볼 생각 없어요?”
국진의 말은 지극히 급진적이었는데 그런 말을 할 만큼 준후의 외모와 목소리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죠.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쩝. 어쩔 수 없지. 아영 씨라고 했나요? 이번에는 아영 씨가 원고를 읽어봐요.”
아영의 목소리를 들은 국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준후 때와 달리 반응이 시큰둥했다.
짝! 짝! 짝!
국진이 박수치며 다시 한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자, 촬영 시작합시다!”
* * *
국진은 베테랑 감독인 듯했다.
스태프들을 피곤하게 하는 법 없이 필요한 장소로 이동해 필요한 영상만 정확히 찍었다.
홍보 영상과 포스터의 메인 모델이 된 준후는 아영과 함께 영상에 가장 많이 등장했다.
하지만 얼굴을 잠깐 비추고 대사도 몇 마디 하지 않아 그리 피곤할 일은 없었다.
-내가 준후 씨, 얼굴하고 목소리를 가졌으면 의사 안 해. 가진 재능이 너무 아깝잖아.
-…….
-연예계에 관심이 없으면 틈틈이 뉴튜브라도 해 봐요. 나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휴식 시간 국진이 준후에게 뉴튜브를 넌지시 권했다.
얼굴도 알리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가 될 거라면서.
처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준후는 뉴튜브 촬영에 차차 관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돈이 된다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뉴튜브 동영상으로 월급 이외에 추가 수익을 얻으면 해나 같은 아이를 더 많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가난이 마음을 좀 먹고.
가난이 육체를 좀 먹는 경우를 준후는 무림에서 허다하게 목격했는데.
현대에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조금이나마 끊어보고 싶었다.
촬영 끝나면 알아봐야겠어.
의사들이 어떻게 뉴튜브를 운영하는지.
새로운 목표를 세운 준후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다.
병원 스태프들과 촬영 스태프들이 쉬는 장소로 복귀했는데 문득 눈살을 찌푸려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촬영 스태프 중 한 명이 아영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저 연락처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저요? 왜요?”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어서요. 언제 시간 맞춰서 밥이라도 한 끼 해요.”
“저는 인턴이라 바빠서 시간 못 내요.”
“에이, 너무 빼신다. 정 시간이 없으면 제가 병원으로 올게요. 그럼 되죠?”
“그것도 별로…….”
내공으로 청각을 증폭하니 먼 거리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가 선명하게 들렸다.
저 사람은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자기 멋대로 인 걸까.
아영이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음에도 막무가내로 귀찮게 굴었다.
“저기요. 그만하시죠. 아영이가 불편해합니다.”
준후는 둘 사이에 껴들어 점잖게 말했다.
“그쪽이 무슨 상관인데요?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
“방해는 그쪽이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멀쩡하게 잘 쉬는 사람 붙잡고 왜 괴롭히죠?”
“참 나. 연락처 물어보는 게 고문이라도 된답니까?”
스태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팔짱을 낀 채 준후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껴들 자리가 아니니까 빠지세요. 이건 여기 있는 선생님하고 제 문제니까요.”
아무래도 스태프는 순순히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집착이 심한 걸 보면 스토커 기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물러설 수 없지.
“자, 이러면 대답이 됐습니까? 남의 여자 함부로 건드리는 거 아닙니다.”
덥석!
준후는 과감하게 아영의 손을 붙잡았다.
준후의 돌발한 행동에 아영은 화들짝 놀라 눈만 깜빡거렸다.
뒤늦게 뺨이 발그레 물들기도 했다.
“어라? 둘이 사귀어요?”
“우리 유명한 C.C(캠퍼스 커플)였는데요. 그치 아영아?”
“응? 응. 맞아.”
준후의 의도를 눈치챈 아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김빠지게. 그럼 왜 처음부터 거절 안 했어요?”
스태프는 체념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아영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아영이 질문을 받고도 제대도 대답을 못 했기에 준후가 다시 나섰다.
정파 출신의 준후는 검술 말고도 화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사파가 다짜고짜 무력부터 사용한다면 정파는 일단 명분으로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본인의 명분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준후는 뜻하지 않게 탁월한 화술도 갖추게 되었다.
“한창 바쁠 인턴이 느긋하게 연애질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섭니다. 선배들한테.”
“…….”
“그리고 당신 제안을 거절하면 촬영 중에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준후의 똑 부러진 설명에 스태프의 얼굴이 구겨졌다.
“에이. 재수 옴 붙었네. 니들끼리 다 해 먹어라.”
스태프가 악담을 하며 떠나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데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준후는 멀어지는 스태프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아영아 많이 놀랐지?”
“으응. 아까부터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봐서 불안했는데. 준후, 너 없을 때 계속 추파를 던져서 무서웠어.”
“그래도 이 정도 했으면 더 설치지는 못할 거야.”
“미안. 내가 야무지지 못해서.”
아영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쁜 짓을 한 건 스태프인데 오히려 아영이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아영의 여린 마음씨에 준후는 문득 천 소저를 떠올렸다.
무림에서 약혼을 했던 천 소저도 아영과 성격이 비슷했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사람.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남 탓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문제가 생기면 항상 자기 탓을 하는 사람.
하지만 아영이 천 소저와 닮았다면 아영 역시 뛰어난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천 소저는 외유내강형의 정점을 찍었으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왜?”
“생각해 보면 아영이 네 성격, 의사랑 딱 맞지 않아? 온화하고 다정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
“그 마음씨를 환자 돌보는 데 사용하면 나보다 멋진 의사가 될지도 몰라.”
“……뭐야? 꿈보다 해몽이 더 좋네?”
준후의 말에 용기를 얻었을까.
아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느낀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야. 그리고 내 느낌은 좀처럼 빗나가는 법이 없지.”
“늦었지만 고마워, 준후야. 앞으로 이런 상황이 오면 나도 힘껏 거절해 볼게.”
“힘들면 나한테 부탁해도 되고.”
“아냐. 나도 할 수 있어.”
아영의 눈동자에 굳은 심지가 보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경험을 아영은 잘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너라면 잘해 낼 수 있겠지.
“촬영 시작합니다. 다들 모여주세요!”
촬영 스태프의 외침에 휴식 중이던 병원 스태프가 일제히 한 곳에 모였다.
1시간 후 촬영은 무사히 종료되었다.
아영에게 치근덕거렸던 스태프는 아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아영 역시 해당 스태프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네? 시간 괜찮으면 지하 식당갈까?”
촬영이 끝난 후 아영이 준후에게 제안을 했다.
“나야 오프라서 괜찮은데 아영이 너는 괜찮겠어? 땡땡이친다고 한 소리 듣는 거 아니야?”
“20-30분 정도는 괜찮아.”
“와. 그새 대담해졌는데. 그럼 나도 콜.”
홍보 영상 촬영에 대한 소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지하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러던 도중 아영이 문득 화제를 돌렸다.
“준후야. 너 응급의학과 다음엔 어느 과로 가?”
“다음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