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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쓰는 외과 의사-56화 (56/424)

무공 쓰는 외과 의사 56화

제10장 수술 체질(1)

병원 지하 2층에 위치한 식당 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아영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배가 고파서.

또는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준후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워서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영은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기보다는 말을 많이 들어주는 편이었다.

-아영아,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네 이야기도 좀 해 봐. 30분 동안 나만 떠든 것 같은데?

-고마워. 네가 들어준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졌어.

아영은 주변에서 이런 상반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성격이 내성적이었던 데다가 자기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말하는 재주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 아영도 준후 앞에서 만큼은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댈 줄 알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준후 앞에서는 성향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식사를 마치고 아영은 준후와 식당을 나왔다.

스쳐 가는 행인 중 여성들이 유독 준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준후의 멋진 외모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준후 본인은 별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아영아.”

“응.”

“그러고 보니 사과를 잊었네?”

“무슨 사과?”

“아까 집적거리던 스태프 쫓아낼 때, 내가 네 손을 멋대로 잡았잖아. 고의가 아니었던 거 알지?”

“…….”

“거머리 같은 인간이라 그 정도는 해야 쫓아낼 수 있겠다 싶더라고.”

“당연히 이해하지.”

아영은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의 돌발 행동 뒤에 숨겨진 의도를 아영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한 감정을 말하자면.

손이 맞닿았을 때의 감촉은 살짝 설레는 쪽이었다.

“준후, 넌 이상형이 어떻게 돼?”

아영이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친하게 지낸 지도 이제 5년 차인데 네가 연애하는 걸 한 번도 못 보기도 했고.”

“…….”

“연애를 안 하는 걸 보면 눈이 높은 것 같기도 하고.”

“이상형과 연애 문제라…….”

준후가 턱을 쓸어내리다가 말을 이었다.

과연 준후는 어떤 대답을 할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영의 호기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상형은 딱히 정해놓지 않았는데 차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차분한 사람? 예를 들면 어떤 사람?”

“예를 들면 아영이 너 같은 사람?”

준후가 아영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준후의 대답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어서 아영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기분이 좋았지만.

“근데 아영이 너한테 이런 질문 받으니까 재밌다. 너도 나랑 비슷하지 않아?”

“…….”

“그동안 연애하는 거, 못 본 것 같은데?”

당연히 하나도 비슷하지 않지.

너는 아무 데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줄곧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아영은 참았다.

아직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나도 연애 안 했지. 그래서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생겼나 봐.”

“아영이 네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데?”

“나는 믿음직스럽고 듬직한 사람. 준후 너처럼?”

“우리 둘 다 너무 비즈니스네.”

식당가를 벗어나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데 준후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누군가와 통화를 나눴다.

“응급의학과 콜이야?”

“아니. 아까 병원비를 대줬던 환자. 돈을 당장 못 보내줘서 미안하니까 식사나 한 끼 하자고 하네.”

“…….”

“오프니까 바람 쐴 겸 갔다 오려고. 촬영하느라 고생했고 다음에 또 보자.”

준후는 아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후 1층 로비로 향했고.

아영은 준후가 멀어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 * *

준후는 지도 앱을 보면서 낯선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어르신과 해나가 사는 집을 찾는 중이었다.

진료비가 부족하다고 했을 때부터 가정 형편을 짐작했는데.

동네는 낙후되어 있었다.

낡은 빌라와 구식 연립 주택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으며.

곳곳에서 공사장 인부들이 새 빌라를 지어 올리고 있었다.

‘여긴가?’

준후는 철창으로 된 문을 열고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어르신과 해나의 집은 반지하 방이었다.

쿵. 쿵. 쿵.

철문을 두드리자 이내 문이 열렸다.

응급실 원무과 앞에서 봤던 어르신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준후를 맞아주었다.

“선생님. 정말 와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불러주셔서 감사하죠. 그런데 혹시 제가 눈치 없이 찾아온 건 아니겠죠?”

“아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초대한 건 나인데. 빨리 들어와요.”

현관에 신발을 벗고 준후는 장판에 발을 대었다.

냉기가 양말을 뚫고 전해졌다.

날씨가 쌀쌀한데 냉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방은 두 칸이었으나 집은 좁았고.

살림살이는 옹색해 보였다.

낡은 식기구와 잡동사니가 한 몸으로 집안에 붙어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방에 있던 해나가 나와서 준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해나. 안녕? 해나가 준 선물 선생님이 잘 보관하고 있다?”

준후는 의사 가운 속 주머니에서 해나의 그림을 꺼내서 흔들었다.

그림은 어느새 코팅이 되어 있었다.

보물 1호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

병원 문구점을 들러 그림을 코팅해 두었던 것이다.

준후의 정성을 알아보고 해나가 기쁜지 빙그레 웃었다.

“선생님. 진짜 미안해요. 내가 바로 병원비를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도무지 생활비는 뺄 수가 없더라고요.”

어르신이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안 돌려주셔도 된다니까요? 정 마음에 걸리면 여유 있을 때 조금씩 주시고요.”

준후는 빈말이라 아닌 진심으로 말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울 때.

고액의 병원비는 엄청난 부담이 된다.

생계를 위협하는 수준을 떠나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다.

몸이 불편해서 돈을 못 벌고.

돈을 못 버니 몸이 건강해질 수 없고.

또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돈을 못 벌고.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준후는 이미 무림에서 겪어보았다.

무림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씨세가는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렸는데.

설상가상으로 준후까지 크게 부상을 당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준후가 어르신과 해나를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이유.

그 이유는 분명 그때의 설움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그때 깨달았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서러운 게 몸이 아픈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건 몸이 아픈데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다는 거라는 걸.

준후는 지난 기억이 주는 쓰라림을 밀어내며 현재에 집중했다.

어르신과 해나와 함께 늦은 점심을 함께 했다.

각종 나물 반찬은 투박했지만 맛이 있었다.

덕분에 아영과 점심을 했음에도 꾸역꾸역 밥 한 공기를 비울 수 있었다.

해나의 부모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준후는 식사 내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 대답 속에 가슴 아픈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묻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르신도 작금의 상황이 답답했는지.

본인 입으로 집안 사정을 줄줄이 읊었던 것이다.

해나의 아버지이자 어르신의 둘째 아들은 공사장에서 일하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해나의 어머니이자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해나의 양육은 어르신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난하고 힘든 건 상관없는데 해나가 걱정이에요.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어르신이 끌끌 혀를 차며 곁에 앉은 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에요. 저는 할머니랑 같이 있어서 기뻐요.”

해나의 대답이 어른스러웠는데 그 모습에 준후는 가슴이 더 아팠다.

9살짜리 아이에게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른이 내비칠 만한 그늘을 보았던 것이다.

해나가 벌써 철이 들어버린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고로 아이는 아이다울 필요가 있거늘…….

준후는 집안의 사연을 듣고서 한층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두 사람이 앞으로 행복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도 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제할 수는 없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준후였다.

“미안해요. 선생님. 괜히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 가지고.”

“…….”

“이러려고 초대를 한 건 아닌데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셨겠어요.”

“젊은 양반이 참 예의 바르고 싹싹하기도 하지.”

“별말씀을.”

준후는 쑥스러워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해나의 방문 틈으로 포스터가 보였다.

준후가 과거 의대 오리엔테이션에서 장기자랑을 했던 아이돌 옵티멈의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다.

이것도 인연인가?

저 얼굴을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해나야. 아이돌 좋아하니?”

“네.”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해?”

“선생님. 우리 해나 노래 부르는 거 들어보실래요? 가수 뺨친다니까요?”

어르신이 갑자기 활기찬 목소리로 대화에 껴들었다.

“그냥 가끔씩 부르는데. 잘은 못해요.”

“해나야. 선생님께 노래 한 곡 불러드리렴. 잘 할 수 있잖아.”

“쑥스러운데…….”

해나가 싫어하는 것 같아서 준후는 억지로 권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르신의 말대로 해나가 정말 노래를 잘한다면 말이다.

집안에 새로운 길이 열릴지 몰랐다.

“딱 1절만 불러줄래? 선생님이 부탁할게.”

“그럼…… 해볼게요.”

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쭈뼛거리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쩌나 어쩌나 이러지 마세요~

여인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해나의 선곡은 장윤경의 ‘어쩌나’였다.

아이돌 노래를 부를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아무래도 어르신이 듣는 노래를 자주 듣다 보니.

또 어르신을 기쁘게 해줄 생각에 트로트를 자주 불렀던 모양이다.

이거구나!

준후는 해나의 노래를 들으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해나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무림맹에서 무사를 하던 시절.

준후는 음공을 사용하던 동료를 알고 지냈다.

음공이란 말 그대로 음악을 무공처럼 펼치는 것인데.

음공을 사용하면 상대의 고막을 파괴하거나 심리도 조작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음공의 대가가 불렀던 노래에서 느꼈던 그 기묘한 감각을 해나에게서도 느꼈다는 점이었다.

남들과는 차별화된 음색.

남들과는 다른 목소리의 울림.

해나는 충분히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역시 우리 해나가 노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힌다니까.”

“아니에요. 저 잘 못해요.”

어르신이 칭찬하자 해나가 민망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해나야. 너 가수 해볼 생각 없니?”

준후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제가요?”

“요새 트로트 신동들이 TV에서 많이 보이던데 너도 할 수 있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선생님이 노래 듣는 귀가 있는데 해나 너 정도면 재능이 충분하고도 넘쳐.”

준후의 목소리는 어느새 흥분한 기색을 띠었다. 해나의 집안을 일으킬 한 줄기 빛을 보았기에.

“기회를 만들어줄 테니까 오디션이라도 한 번 봐봐.”

준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통화 상대는 지애였다.

중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시절 CPR 대회에 함께 참여하고.

지금은 배우 계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지애 말이다.

얼굴을 본 지는 오래됐지만 연락은 종종하고 지냈다.

-서준후. 오랜만이네?

“뭐, 거의 백 년만이지. 혹시 통화 괜찮아?”

-괜찮아. 촬영장 가는 길이라.

준후의 너스레에 지애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지애야.”

-뭐야? 갑자기 분위기는 왜 잡고 그래?

“사람 살리는 셈 치고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별일이네. 의사가 배우한테 사람을 살려 달라니.

“사정을 들어보면 알아. 부탁이 뭐냐면…….”

준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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